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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선사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사찰

경북 경주시 암곡동에 있었던 고선사(高仙寺) 절터 출토유물들이다. 고선사의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원효가 머물렀던 곳으로 신라 29대 무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1913년 절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조각이 발견되었다. 절터에는 신라를 대표하는 석탑 중 하나인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거북받침돌 석등대석 등이 있었다. 1975년 덕동댐 공사로 절터가 수몰되면서 유물들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義解第五) 사복불언 (蛇福不言 ), 사복과 원효의 만남
하루는 그 어머니가 돌아가니, 이때 원효(元曉)는 고선사(高仙寺)註 273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보고 예를 갖춰 맞이하였다. 사복은 답배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실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함께 장사지냄이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서당화상비는 고선사 절터 출토된 원효대사를 기르는 비석이다. 9세기초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서당화상비, 경주 고선사지, 통일신라>

신라 출신의 위대한 승려이자 사상가였던 원효대사를 기리며 세운 비석으로 서당화상은 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효대사는 지금의 경산 지방인 압량군 남쪽 불지촌에서 태어나 15세 무렵에 출가하였습니다. 그는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 유학을 가던 도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발걸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후 수행과 저술에 힘쓰는 한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하층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비석은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애장왕 때 세운 것입니다. 그 뒤에 어느 때인가 파손되었으나, 1914년 고선사 터에서 아랫부분이, 1960년대에 경주시내 민가에서 윗부분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석을 받쳤던 귀부는 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의 고선사 터 삼층석탑 옆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비문은 33줄이며 한 줄에 61개의 글자가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의 내용은 ‘십문화쟁론’을 비롯한 대표적인 저술서의 성격, 수학과정과 행적, 입적한 장소와 시기, 비석의 건립과 추모사업등을 담고 있어서 원효대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경주박물관에는 고선사지에서 출토된 거북받침돌을 볼 수 있다. 서당화상비가 있던 거북받침돌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비석의 규모에 비해 크기가 작아 다른 비석의 받침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지 출토 거북받침돌>

 <금동 문 장식, 7세기, 고선사터>

문에 달린 빗장의 일부였습니다. 덕동댐 건설로 1975년 수몰된 경주 고선사터의 금당터 서북회랑 바깥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끝부분은 세 잎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중간에 수직으로 돌출된 부분은 연꽃처럼 만들어 구멍을 뚫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고선사 건물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

<지대석>

고선사(高仙寺)
고선사는 원래 알천 상류인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절로, 현재 이 곳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문왕 때 원효대사(617~686)가 머무르던 곳이라고 합니다. 1914년 5월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어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 이전에 사찰의 면모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는 ‘현종 12년(1021) 고선사의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절의 법등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75년 이 절터를 발굴하였는데,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 터를 확인하였고, 금동불,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를 찾아냈습니다. 여기 있는 석탑과 금당 터, 비각터의 지대석과 비석받침은 절터에서 옮겨온 것들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2015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3. 삼국유사 권 제4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