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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사적),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이다. 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조선중기 선조 7년(1574)에 세워졌다.  선조는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때 월천 조목이 배향되었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도산서원은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한곳이다. 1970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 도서관인 광명실에는 약 5000여권의 장서가 있었으며, 장판각에는 2790여판의 목판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전시되고 있다. 2019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사적)>

<도산서원 공간배치>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직접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던 공간으로 도산서당(보물)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건물 등이 있다. 도산서원은 사당을 중심으로 한 배향공간과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서원 공간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선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는 서원 본래의 역할 뿐 아닐, 서원 건축에서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마을에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나 낙동강 너머로 들판과 마을이 보인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계단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서원내 어디에서든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원 출입문>

도산서원은 누각이나 솟을삼문이 있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서원의 풍경을 가리지 않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정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진 서원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볼 수 있다.

<출입문 안으로 보이는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당, 퇴계 이황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

출입문을 들어서면 서원 강학공간까지는 계단식으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양쪽에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퇴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도산서당(보물)이 있고 서쪽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농운정사(보물)와 관리소인 하고직사, 별채 건물인 역락서재가 있다.

<도산서당(보물)>

도산서당(陶山書堂, 보물)은 퇴계 이황이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중기(1561년)에 지어졌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공부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퇴계가 머물던 방은 완락재(玩樂齋이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주자(朱子)의 글에서 인용한 이름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당이 점차 확장되면서 서원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도산서당(보물)>

퇴계는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당 한편에 있는 연못인 ‘정우당’>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에 있는 작은 연못 속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글자 뜻대로 한다면 ‘깨끗한 법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퇴계는 절의를 지키는 정결한 군자의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당 동쪽편에 있는 작은 화단은 ‘절우사’라고 불리우며 이 곳에 매,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퇴계가 직접 가꾸었다고 한다.

<도산서당 동쪽편 화단>

작은 우물인 ‘몽천’은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도산서당 아래 마당에 있는 작은 우물인 ‘몽천’>

몽천(蒙泉)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퇴계가 <역경>의 몽괘(蒙卦)에서 의미를 취해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를 뜻한다. 한 방울 샘물이 수많은 어려움 끝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뜻을 이루라는 의미를 담았다. 퇴계는 이 샘물을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이유의 하나로 꼽았다. 이 지역의 자연 배경이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농운정사(濃雲精舍, 보물)는 도산서당을 세울 때 제자들이 묵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조선중기(1561년)에 지은 건물로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건물은 ‘工’자 형태를 하고 있는데 공부가 성취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건물 양쪽에는 돌출된 형태의 마루가 있는데 제자들이 모여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건물로 다른 서원이나 향교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도산서당 앞 정원에서 보이는 농운정사>

<농운정사(보물)>

건물은 ‘工’자 형태의 도토마리 양식을 하고 있는데, 도산서당 건립을 맡았던 승려 법연의 구상에 따른 것이라 한다. 건물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쪽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공부를 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이라 하여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동쪽마루는 문을 열면 퇴계가 거처했던 도산서당이 바로 보인다. 가운데에는 온돌방이 있으며 뒷편에 돌출된 형태로 부엌과 창고가 있다.

<농운정사 온돌방>

<농운정사 뒷편>

도산서당에는 농운정사 외 ‘역락서재’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다.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독립된 건물로 퇴계가 도산서당에 머물때 제자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유생들이 묵는 숙소라고 하나 서원을 찾은 손님들이 묵는 장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서원에 비해 고직사 또한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아마도 전국각처에서 도산서원을 찾아온 선비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락서재>

<역락서재>

<바깥에서 본 역락서재>

역락서재(亦樂書齋)
역락서재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두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하고직사는 도산서당 관리인들이 머물거나 식사를 하는 장소이다. 원래 도산서당에 딸린 고직사 건물이었는데 도산서원을 건립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아마도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과 부엌 등이 배치된 ‘ㄷ’자형 건물이다.

<하고직사>

도산서원,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퇴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덕사(보물)와 전사청이 배향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며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전교당(보물)과 유생들의 기숙사, 장판각, 광명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서쪽편에 관리인의 숙소인 상고직사가 있다. 

<서원 영역 앞 마당>

강학공간은 서원 뒷편 높은 곳에 있는데 앞쪽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까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학공간 출입문인 진도문을 들어서면 전교당(보물)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기숙사인 박약재와 홍의재가 배치되어 있으며 진도문 양쪽에 누각형태의 건물인 서광명실이 있으며 동쪽 박약재 뒷편에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도산서원 강학공간>

강학공간 출입문은 진도문(進道門)이라 부르며, 양쪽에 많은 동,서 광명실이 있다.  진도문을 지붕을 크게 만들어 경치를 약간 가리고 있는데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문>

<강당에서 내려다 본 모습>

전교당(典敎堂, 보물)은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에 지은 건물로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사당인 상덕사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낙동강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진 매우 간소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대청마루 앞 현판에 적힌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글씨는 선조가 도산서원에 이름을 내리면서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쓴 글씨라고 한다.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옆에서 본 모습>

온돌방 문을 들어올리면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며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논했던 서원 강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는 전교당(典敎堂)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이곳을 찾은 유력 인사들이 남긴 글이 적힌 액자들이 걸려 있다.

<전교당 내부>

<뒷편에서 본 모습>

강학공간 마당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 부른다. 두 건물 모두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앞쪽에 툇마루를 달아 내었다. 선배들은 동재를, 후배들은 서재를 사용한다.

<동재인 박약재>

<서재인 홍의재>

동.서재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편 건물을 ‘박약재’라 하고, 서편 건물을 ‘홍의재’라 한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광명실은 누각 형태의 건물로 적을 보관하던 도서관 해당하는 건물이다. 건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주위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었다. 동광명실은 조선후기 순조 때(1819년), 서광명실은 일제강점기 때(1930년) 지어진 건물이다. 동광명실은 역대 왕들이 내려준 서적들과 퇴계가 직접 보던 서적들을, 서광명실에는 국내유학자들의 문집 등을 보관하였다. 보관중이던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동광명실>

<서광명실>

광명실(光明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고 열람을 하던 곳으로,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장판각은 책을 찍어내었던 목판을 보관했던 곳이다. 벽체를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앞면 위쪽에는 살창을 설치하여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보관해오던 목판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장판각>

장판각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선조어필, 퇴계선생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상덕사(尙德祠)는 퇴계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 지어졌다. 퇴계를 모신 서원은 원래 안동 월곡면에 있던 호계서원이었으나, 지역 사람들의 요청으로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새로이 건립하게 되었다. 호계서원에서는 유성룡과 김성일을 같이 위패를 모셨는데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 유성룡과 김성일의 사에 위상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가 같이 빠지면서 제자로서는 조목만 남게 되었다.

<상덕사 내삼문>

상덕사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 제사 준비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상덕사 경내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고 담장너머로만 그 모습을 살짝 볼 수 있다.

<상덕사>

상덕사 옆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이 있다. 동쪽은 제수를, 서쪽 은 제주를 보관하던 건물이다.

<제수를 보관하던 동쪽 건물>

<제주를 보관하던 서쪽 건물>

전사청
전사청은 사당인 상덕사에서 향사를 받들 때 제주와 제수를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 건물은 제수를 보관하고 서쪽건물은 제주를 보관하던 주고(酒庫)이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상고직사는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 규모도 크고 방의 숫자 또한 많은편이다. 서원이 주변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묵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고직사>

상고직사에는 제사 준비를 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양쪽으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많은 편이다.

<상고직사 출입문과 문간방>

<상고직사로 들어오는 길>

고직사(庫直舍)
고직사는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전교당과 도산서당 왼쪽에 각각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있다.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고직사는 뒤편의 전사청과 앞쪽의 하고직사와 바로 연결되어 관리인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학문을 수양하는 서원으로서는 입지가 상당히 좋은 곳에 있다.  민가와는 상당이 떨어져 있는 숲속에 있으면서도 낙동간 너머 넓은 벌판이 있어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세상을 보면서 치세를 고민할 수 있는 장소이다.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서원 앞에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넓은 마당이 있으며, 서원의 유서깊은 내력을 보여주는 우물과 오래된 고목들이 심어져 있다.

<서원 앞 넓은 마당>

<서원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고목>

<향나무>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는 고목>

<서원 입구에 있는 고목>

서원 앞에 있는 우물인 열정(冽井)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세웠을 때부터 사용했던 우물이다.

<열정>

열정(冽井)
열정은 도산서당이 있을 떄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리고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말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 있다. 이와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에는 낙동강변에 절벽이 있는데 퇴계는 서쪽을 천광운영대, 동쪽을 천연대라 불렀다. 주변의 절경과 자연의 이치를 벗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천연대>

<천연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

천광운영대
도선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고 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하늘 천(天)과 연못 연(淵)을 따서 지었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퇴계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낙동강 너머로 꽤 넓은 벌판이 있고, 민가들이 많은 마을도 볼 수 있다. 마을과는 낙동강으로 막혀 있어서 멀리 떨어진 듯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조선후기 정조 때 이곳 시행한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시사단을 볼 수 있다.

<시사단>

시사단
시사단(詩士壇)은 조선시대 특별 과거시험을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 있는 곳이다. ‘시사(詩士)’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1792년 정조는 평소 존경하던 퇴계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영남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문과급제 2명 등을 선발하였다.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있던 자리에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뒤 옛 건물과 비석을 원행대로 옮겨 지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퇴계 종택은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북쪽 언덕길을 따라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있던 종택은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후손인 하정공이 옛 종택 규모를 짐작하여 새로 지은 집이다

<퇴계 종택>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운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림의 발의로 1574년 도산서당 뒤편에 세우기 시작하여 1575년 낙성이 되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576년에는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그 후 도산서원은 19세기 후반 서원철폐령에도 영남 유학의 중심 역할을 해 온 중요성을 인정받아 철거되지 않았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비롯하여 퇴계 사후에 만든 전교당, 상덕사, 전사청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박약재와 홍의재, 서원에서 만든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서원 관리인의 숙소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출처>

  1. 도산서원홈페이지, 도산서원, 2022년
  2.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