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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서예실] 서예(書藝),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

우리나라 서예는 기원전 2세기무렵, 중국의 한자문화를 수용하며 한국 서예문화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의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 글씨 영향을 받았으며, 7세기 중반부터 당(唐)의 구양순(歐陽詢) 해서체 유행하였다. 고구려는 북조(北朝) 계통의 강하고 날카로운 글씨풍을 수용하였다. 백제는 남조(南朝)계통의 유연한 글씨풍과 북조(北朝) 계통 글씨풍을 함께 수용하였으며, 신라는 북조(北朝) 계통 글씨풍을 수용하였다. 통일신라는 구양순 해서체의 유행하였고, 8세기에 저수량(褚遂良), 안진경(顔眞卿) 해서, 왕희지(王羲之) 행서 유행하였다. 또한 이시기는 서예가 김생(金生) 활동하였다. 김생의 글씨는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시대까지 계속 유행했다. 771년에는 명문이 새겨진 성덕대왕신종 제작되었으며  9세기에는 비석 글씨를 중심으로 구양순 해서체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미불(米芾),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 중국 북송(北宋) 서예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 전반에는 구양순체 바탕의 날카롭고 강한 필치의 글씨가 비석의 글씨로 주로 쓰였으며 11세기부터 왕희지 행서체 유행, 탄연(1070~1159)의 탄연체(坦然體)가 나왔다. 14세기에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왔다.

중앙박물관 2층 서화관 서예실.

조선시대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술이었던 서예(書藝)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동아시아와 우리나라 서예의 역사를 살펴보고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뛰어난 서예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실 내부.

조선전기에는 조맹부의 송설체의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은 송설체 유행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 서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6세기에는 송설체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과 함께 김구(金絿,1488~1534), 이황 등의 왕희지 서체 연구 진행되었으며 왕희지 글씨를 기반으로 한 한호(韓濩)의 석봉체(石峯體)가 나왔다. 또한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양송체(兩宋體), 허목의 미수체(眉叟體) 등장하였으며, 명의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其昌) 글씨가 유행하였다. 17세기 후반-18세기에는 왕희지 서체를 비롯한 중국의 서체를 연구하으며, 이서(李潊,1662~1723), 윤두서, 윤순(尹淳,1680~1741), 이광사(李匡師, 1705~1777)로 이어지며 동국진체(東國眞滯)가 나왔다. 또한 중국 청과의 학문교류는 중국 고대 비석 글씨를 연구하는 비학(碑學)의 영향으로 고대 서예 연구 진행되었다. 구한말에는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 완성되었다. 추사체는 중국 전한시대 예서에 각 서체의 장점을 융합한 서체로 조형미가 뛰어나다.

서체의 종류
서체는 읽기 쉽고 쓰기 편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서예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는 한자의 서체 또한 다양한 변화를 통해 각각 아름다운 글자미(書體美)를 갖게 되었다. 대표적인 한자 서체에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전서(篆書),

고대 한자에서 발전한 서체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문자 개혁 이전 글씨체는 대전(大篆), 문자 개형 이후 글씨체는 소전(小篆)이다. 대천체는 모양이 다양하고 변화가 크며, 소전체는 네모반듯하고 고르며 글씨 획도 단정하다. 갑골문(甲骨文), 종정문(鐘鼎文)은 전서에 포함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안평대군이 쓴 세종영릉 비액, 전서, 1452년.

조선전기 대표적인 명필 중 한명이었던 안평대군이 남긴 글씨이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세째 아들로 서예와 시문(詩文), 그림 등 다양한 방면에 능했으며, 특히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손꼽혔다. 세종대왕 신도비와 「몽유도원도 발문」이 유명하다.

이 글씨는 세종 임금의 영릉 신도비의 비액 탑본이다. 안평대군의 전서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서 소전을 법도에 맞게 고른 필치로 썼다. 이 비석은 경기도 광주에서 여주로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으로 1574년에 발굴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오세창이 쓴 기와.벽돌.금속에 새긴 글씨, 전서, 오세창,

1925년, 일제강점기에 쓴 것으로 다향한 형태의 전서 글씨를 볼 수 있다.

오세창은 미술품에 대한 높은 감식안을 지녔으며 서예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전서를 잘 썼으며, 옛 기와와 벽돌, 금속기 등에 새겨진 전서를 연구하였다. 이 글씨는 중국 한대의 기와와 벽돌 및 주대의 제기, 무기 등에 새겨진 글씨들을 쓴 것으로, 대전 서체의 다양함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05년 한국박물관회가 서울 옥션으로부터 구입하여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예서(隸書),

전서체에서 정리된 예서체는 오늘날의 한자 글씨 형태를 띤다. 중국 전한 시대 예서체인 고예(古隸)는 정사각형에 가깝고 전서의 필획으로 쓴다. ‘팔분서(八分書)’라고도 하는 후한 시대 예서 팔분예서(八分隸書)는 모양이 납작하고 물결모양의 가로획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석준이 쓴 글씨, 예서, 김석준, 19세기, 이홍근 기증,

소당 김석준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 이었던 이상적의 제자였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로부터 직접 서체지도도 받고 소장품도 빌려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김정희는 그의 글씨를 높이 평가했는데, 그의 글씨가 안진경체의 출중한 뜻을 깊이 터득하였다고 평했다. 이 작품은 청나라 여류문학가인 전연인이 남편인 백야 장기에게 한 말을 쓴 것으로 예서체와 해서체를 절충하였다. 이홍근 선생이 1987년에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해서(楷書),

정자체(正字體)인 해서는 예서를 정리한 것이다. 한자의 표준 서체이기도 한 해서체는 각 획이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읽고 쓰기가 좋다. 해서는 전서와 예서를 비롯한 각 서체의 장점을 모두 포함하고 이어 서예를 배울 때 특히 공부가 많이 되는 서체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왕희지가 쓴 <동박삭화찬(東方朔畵贊>, 해서, 왕희지, 제주박물관 소장.

 왕희지(王羲之)이는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이자 장군이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해서.해서.초서를 예술적으로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 최고의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회계의 난정(蘭亭)에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41인의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에 서문으로 썼다는 『난정서(蘭亭徐)』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서예교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서예를 예술로 승화시켜 품격 높은 문인 문화의 하나로 만든 서성이라 일컬어진다. 이 서첩은 왕희지의 해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글씨이다. 원명은 <한 태중대부 동방선생화찬>이며 보통 <동방삭화찬>으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의 해서는 특히 15세기를 지나며 조선 서예의 변화의 모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후 석봉 한호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석봉 한호가 쓴 서첩, 해서, 한호, 1602년.

한석봉은 선조대의 명필로 정자체인 해서에 능했다. 그의 글씨는 석봉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글씨체이다. 오늘날 인쇄된 책자나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한자의 글씨 중 상당수는 그의 글씨체라 할 수 있다.

석봉 한호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명필로, 중국의 왕희지체를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특유의 석봉체를 이루었다. 서예의 감식안이 있었던 선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국가의 여러 문서와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최립과 매우 가까웠는데, 서로 인척이었을 뿐 아니라 둘 다 한미한 집안에서 나서 뛰어난 재주로 입신하여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서첩은 한호가 최립에게 써 준 것으로, 오른쪽 면은 한호가 선조에게 하사받은 별루에 대해 읊은 시 <구룡연>을 왼쪽 면은 그 시에 대하여 칭송하는 최립의 지문을 쓴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성종임금이 부채에 쓴 글씨, 해서,

작은 부채 면에 쓴 성종 임금의 해서 글씨이다. 성종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매우 비슷하야, 남아 있는 글씨 자료가 거의 없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이해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 임금이 쓴 <문상정사에 제함>(왼쪽)해서, 1789년, 보물.

1789년에 제작된 것으로 정조가 정화 정민시의 문상정사(汶上精舍)에 대하여 지은 어제어필 칠언시다. 연청색과 상아색 비단으로 꾸민 조선후기 궁중표장을 보여주고 있다. 서체는 두터운 필치에 파임이나 갈고리부분에서 안진경의 유풍이 두드려져 있다. 짜임새가 긴밀하며 약간 직사각형인 글씨골에 맞도록 여백과 행이 적절하고 시원하게 조절되어 있다. 만년의 대표작으로 예술성이 뛰어나 정조어필의 최고작으로 평가된다. 운룡문이 장식된 종이에 썼으며, ‘규장지보’, ‘홍재’, ‘만가지가’라 쓴 도장이 있다. 정조 임금이 쓴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오른쪽), 해서, 정조, 1796년,정조가 철옹(지금의 영변) 부사로 임명되어 떠나는 서형수에게 이별을 아쉬워하며 내린 칠언 절구의 시이다. 위쪽에는 지방 행정에 힘써 달라는 당부의 편지와 함께 네가지 약재와 서른 자루의 부채를 선물로 보낸다는 목록을 써 놓았다. 정조의 글씨는 한석봉체에서 발전한 양송(송시열, 송준길)의 서체에 기반을 두었으며 여기에 안진경의 두툼한 필획의 멋을 곁들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윤순이 쓴 글씨, 해서, 1737년.

윤순(尹淳)이 중국 제.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엮은 책인 <문선>에서 옛 시 12수를 골라 쓴 것이다. 글씨는 해서, 행서, 초서체로 쓰여졌으며, 북송대 서체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윤순의 58세때 작품으로 격조와 감각이 잘 어우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인목왕후가 쓴 <민우시>, 해서, 1712년 만든 모본, 17세기.

명필이었던 선조의 비 인목왕후는 오늘날까지 글씨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예작품뿐 아니라 한글 글씨도 남아 있다.

선조의 비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선조 임금의 글씨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서예가였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 임금의 글씨 및 석봉체 계열 글씨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상황을 구박받은 늙은 소에 비유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당당한 인상을 주는 품격 높은 해서 글씨로서 이 시기 글씨의 경향답게 굵고 강한 필획의 힘이 인상적이다. 글씨 왼쪽 하단에는 숙종 임금이 인목왕후의 이 글씨를 찾아낸 감회와 글씨의 보전을 위해 판각을 하게 한 내용을 발문으로 남겼다. <출처: 중앙박물관>

행서(行書),

행서는 해서의 획을 줄여서 흘려쓴 서체이다. 흘려 쓰지만 읽기에는 크게 어렵지 않으며, 초서와 같은 생동감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 행서, 18세기.

한호 이후 조선 후기 서풍의 조선화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로 평가되는 이광사(李匡師)의 행서이다. 이광사의 호는 원교.수북이고 자는 도보이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은 이광사가 어떤 그림을 본 후 중국 고개지와 한비자의 화론을 인용하며 높게 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행서는 빠른 붓놀림과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감이 뛰어난 작품으로, 이광사의 스승이었던 윤순(1680~1741)의 영향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병인년, 즉 이광사가 42세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송시열이 쓴 적취병, 행서, 17세기.

조선후기 서인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의 글씨이다. 힘차게 쓴 글씨에서 그의 성격을 볼 수 있다.

적취병(積翠屛)은 삼각산 동쪽 우이봉에 있는 아름다운 폭포다. 송시열은 힘차고 활달한 행서를 잘 썼다. 또한 이런 글씨들을 바위에 새겨 남기기도 하였다. 이 서첩에는 우이동 구곡의 대표적인 산과 계곡 이름들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글씨, 행서, 1882년, 이홍근 기증,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 후기 서단에 새로운 흐름을 창도한 추사 김정희를 진심으로 추승하여 그의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터득한 제자이다. 강한 골기를 지닌 스승의 서풍에 비해 보다 윤택하고 부드러운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옆에는 작은 글씨로 윤씨 성을 가진 선비의 청에 응하여 글씨를 쓰지만 바로 잡아 달라는 내용과, 자신이 62세가 되는 해임을 적었다. 이홍근 선생이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명한이 쓴 오언시, 행초서, 이명한, 조선 17세기.

백주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월사 이정구의 아들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명한은 비교적 필획에 살이 풍성하고 속도감 있는 필치로 썼으며, 그의 작품은 선조 임금 시기 서예의 특징이기도 한 강하고 굵은 필치로 글씨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서(草書),

초서는 획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인 흘림체이다. 속도감과 선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서체로, 흥취와 예술성을 드러낸 초서체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변화가 크고 주관적인 표현이 많기 때문에 읽고 쓰기는 매우 어렵다. <출처:중앙박물관>

윤순거가 쓴 풍화설월, 초서, 윤순거,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성문준, 강항, 김장생에게 배웠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조선시대를 대표한 초서의 대가이다.

조선 17세기. 윤순거( 尹舜擧)는 조선시대 초서의 대가로 손꼽힌다. 병자호란 때 척화죄로 부친과 숙부가 유배되어 순절하자 벼슬을 그만 두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風花雪月’ 대자 초서는 속도감의 활달함과 감각적인 면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동토 윤순거가 쓴 <무이구곡가>, 초서, 윤순거, 17세기 중반,

윤순거가 주자(朱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쓴 것이다. 그는 초서를 잘 썼으며 특히 변화을 중시하여 광초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글씨를 이루었다. 힘을 중시하는 17세기 서예 분위기를 반영한 그의 글씨에서 유연하면서도 강한 필치를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글씨와 교류
김정희(1786~1856)는 조선말기에 활동한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서예가이다. 그는 청나라 문물 수용에 개방적이었던 박제가를 통해 중국의 학술과 문물을 익혔고, 스물네 살 되던 해 부친 김노경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갈 때 동향하여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연경에 머무는 동안 청나라의 금석학자이자 고증학자인 옹방강( 翁方綱,1733~1818)과 뜻 깊은 만남을 갖고 ‘경술(經術0과 문장(文章)이 해동 제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인연은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완원(阮元, 1764~1849)과도 사제의 인연을 맺는 등 청대의 문사 및 서화가들과 교유하여 경학 및 금석학, 고증학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혔다. 청나라 고증학은 금석자료를 통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영향을 받은 김정희도 탁본으로 전하는 한나라의 예서(隸書)를 서예학습의 중요 자료로 생각했다. 기교가 없는 고졸(古拙)한 미감을 특징으로 하는 한(漢) 예서를 바탕으로 김정희 예서체는 고졸한 맛을 보여주고, 나아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서체의 특징은 김정희의 행초서(行草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 글씨와 그림에 대한 후대 사람의 평, 김윤식 외, 1924년,

김정희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예서와 난초그림에 대한 조선말기 문신들이 쓴 친문이다. 운양 김윤식, 석촌 윤용구, 서남 민병성으로 모두 서화에 능했다. 세로로 긴 축에 네모난 방형을 두 곳 두고 위쪽에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 시인 유신의 <고수부>를 예서로 썼으며 아래쪽 난에는 난초를 그렸다. 그 위쪽과 가운데, 아래쪽으로 세 명의 찬문을 어우러지게 배치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옹방강의 서론(왼쪽), 옹방강(1733~1818), 청 19세기,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쓴 행서이다. 청대 건륭 4대가 중 한사람인 옹방강의 글씨는 옛 것을 본받는데 충실했으나 새로운 경지를 창출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행서 글씨는 골기는 굳세지 않으나 부드럽고 중후하게 느껴진다. 이 글은 옹방강이 당나라 서예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것이다. 인장이 모두 4개 찍혀 있는데 왼쪽 끝의 인장 ‘천심죽재(千尋竹齋)’는 민영익의 인장으로 한때 그의 소장품이었음을 말해준다. 김정희가 조운경을 위해 지은 송별시(오른쪽), 김정희, 1811년, 이 송별시는 1811년 조윤대(1748~1813)가 동지사로 북경에 갈때,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그의 아들 조용진이 함께 가게 되자,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김정희가 조용진에게 지어준 칠언절구이다. 내용은 옹방강을 찾아 뵙고 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조용진은 옹방강을 찾아갔고, 돌아올 때는 그가 보내는 선물을 김정희에게 전해주었다. 이 글씨는 유려한 옹방강의 행서풍을 따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동지사(冬至使):조선시대 동지에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던 사절 또는 파견된 사신.


주학년(朱學年)을 위해 쓴 함추각 행서 대련, 김정희, 19세기,

김정희는 청나라의 학계 및 예술계의 문인들과 교유하였는데, 그 가운데 청대의 화가인 주학년(1760~1834)과도 교류가 깊었다. 주학년은 김정희가 연경을 떠나기 전에 그의 부탁을 받고 조선 북학파 유득공이 쓴 씨를 빌어 <고목한아도(古木寒雅圖)>를 그려주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그 내용을 행서 대련으로 만들어 주학년에게 보냈다. 진한 먹의 쓰임과 힘이 넘치는 이 글씨는 행서에서 추사풍의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가 조광진에게 보내는 편지, 김정희, 조선 19세기,

이 편지는 김정희가 53세인 1838년 조광진에게 보낸 것이다. 1837년 3월30일 부친 김노경의 사망으로 상중(喪中)이어서 자신을 죄인이라 칭하고 슬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편지 봉투의 ‘장동(壯洞)’이라는 지명은 김정희가 유배가기 전 살았던 서울의 월성위궁(月城尉宮)을 가리킨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가 자인현감에게 보내는 편지, 김정희, 조선 1827년,

김정희가 42세인 1827년 말에 자인현감(慈仁縣監)에게 보내는 초서체의 편지로 자인현은 지금 경북 경산시 자인면이다. 당시 자인현감은 노광두(1772~1859)였다. “김승지(金承旨) 올림”이라고 적혀 있는데, 『정사책(政事冊)』에 의하면 김정희는 1827년 8월19일에 승정원 정3품직의 공조(工曹)를 담당하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어 있다고 되어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한나라 동경의 명문을 임서한 글(왼쪽), 김정희, 19세기,

금석학자 김정희는 옛 거울에 새겨진 명문을 연구하여 자신의 서체를 확립하는데 응용했다. 그는 글씨의 근원을 예서에서 찾았으며 파임이나 삐침이 분명한 동한의 예서보다는 전서의 형태를 지닌 서한 예서를 더 높이 평가했다. 이 글씨는 중국 한나라 동경(銅鏡)의 명문(銘文)을 임서(臨書)한 것이다. 김정희는 동경의 명문을 임모하면서 자신의 예서를 익혀갔는데, 이것은 그이 『완당의고예첩(阮堂依古隸帖)』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김정희가 쓴 칠언시(가운데), 김정희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힘이 있고 강건한 필치로 썼다. 장식적인 배경과 힘 있고 빠른 필치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개성적인 추사서풍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대련으로 쓰여졌으나, 현재 다른 폭은 함께 전하지 않는다. 김정희가 쓴 칠언시(오른쪽), 조선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골기를 드러내고 비수(肥瘦)가 강한 추사 서풍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젋은 날 옹방강을 비롯한 청대 인물과의 교류를 통해 심화되고 발전된 그의 글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련으로 쓰여졌으나, 현재 다른 폭은 함께 전하지 않는다. <출처:중앙박물관>

묵소거사자찬(오른쪽), 김정희, 조선 19세기,

김정희는 다양한 서체에 모두 능했는데, 그 중 해서(楷書)에 있어서는 당나라 구양순(557~641)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김정희의 해서는 남아 있는 작품이 드문데, <묵소거사자찬>은 김정희 해서 중 규범이 될 만한 대표작이다. 붉은 바탕의 냉금지(冷金紙)에 행간과 자간을 맞추기 위해 줄을 친 후, 단정하면서 정중한 필치로 써내려 갔다. ‘묵소거사(默笑居士)’는 침묵을 지켜야할 떄에는 침묵을 지키고 웃어야할 때에 웃는다는 의미로 김정희의 호(號)로 알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행서 대련(對聯), 신위(申緯, 1769~1845), 조선 19세기,

신위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화가.서예가이다. 산수화와 함께 묵죽(墨竹)에 능했는데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는다.

신위는 조선후기 문인이자 서화가로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이 행서 대련 글씨는 활달안 윤필로 썼으며, 획에는 살이 붙어 부드럽고 넉넉한 맛을 느끼게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위가 쓴 당나라 사공도의 시, 신위, 조선 19세기,

신위는 조선후기 문인이자 서화가로 시.서.화 삼절로 불렸으며,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1812년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을 때 김정희의 소개로 청의 옹방강과 교유하였다. 신위이 글씨는 옹방강의 두툼하고 단아하며 부드러운 필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획의 굵기가 더 변화롭다. 전시되어 있는 병풍에 쓴 시는 당의 시인 사공도(司空圖)의 「十二四詩品」 중의 ‘전아(典雅)’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권돈인이 쓴 칠언시, 권돈인(權敦仁, 1783~1859), 조선 19세기,

권돈인은 조선후기 헌종 때의 문신으로 김정희의 평생 벗이었다. 1819년과 1836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과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권돈인의 글씨는 김정희 글씨에 영향을 많이 받아 유사한 점이 많은데 이 칠언시에서는 필획이 두툼하며 동글동글한 맛을 느끼게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석도화첩(石濤畵帖)>에 대한 김정희의 논평, 김정희, 조선 19세기,

중국 청나라의 화가 석도(1641~1720) 그림에 대해 김정희의 발문(跋文)을 적은 화첩이다. 발문에 의하면, 이 <석도화첩>은 골동가게에서 구했으며, 김정희의 절친한 벗 김유근, 권돈인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회화평에는, 회화에 있어서 궁극적 목표는 원인(元人) 화풍인데 이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먼저 청날 문인화가 석도와 운수평(惲壽平, 1633~1690)의 갈필법을 습득해야 한다고 방법을 제시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가 발췌한 중국 서예가의 글, 김정희, 조선 19세기,

김정희는 글씨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 또는 서예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서체를 만들어나갔다. 이 첩은 중국 서예가들의 글을 발췌하여 쓴 글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글자의 획, 붓의 운용, 서법에 관한 내용으로 김정희가 직접 작성한 글은 아니지만, 이 글을 통해 그가 서법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 서첩, 조선 19세기,

홍우철의 부탁을 받고 김정희가 쓴 글씨 모음집이다.

난정서(蘭亭序) 등의 글이 실려 있다. 홍우철은 정조의 사위였던 영명위 홍현주의 아들이다. 첩의 가장 머리에는 ‘완당선생소조(阮堂先生小照)’라는 김정희의 모습이 있다. 이 상(像)은 허련이 판각한 탑본첩에 수록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우창생의 발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 작품 탑본첩, 혀련 판각, 조선 1877년 이후,

소치 허련은 조선후기 서화가로 김정희의 제자였다. 허련은 김정희 사후 그를 기리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김정희 작품을 나무에 새겨서 탑본을 한 후 첩으로 만들어 유포하였다. 허련의 나이 70세에 접어든 1877년 3월부터 남원 선원사에 머물면서 선원사와 교룡산성을 오가며 김정희 작품을 판각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신위와 김유근이 권돈인을 위해 쓴 글, 1836년 이전,

신위와 감유근이 권돈인을 위해 흘림기 있는 해서로 각각 ‘녹의음시(錄意吟詩)’와 ‘녹의헌(綠意軒)’을 썼다. 권돈인은 이를 받은 후, 1836년 중국에 사은사(謝恩使)로 가서 중국인 곽의소(郭儀宵)를 만나 글을 요청했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지란지교를 나눈 세 명의 벗인 신위, 권돈인, 김유근의 돈독한 교우관계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의 안평대군 사경첩에 대한 논평, 김정희, 19세기,

김정희가 안평대군의 글씨로 전해오는 사경첩의 진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 글이다. 단정하고 정갈한 해서체로 청 옹방강의 영향이 많이 보이는 이 글씨는 언제 쓴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글의 내용으로 대략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글 내용 중에 1824년 봄 석공이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서 창림사 탑을 깨트렸을 때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9세인 1824년 이후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언급된 사경첩은 이 글의 앞쪽 부분에 전한다. 개인소장품으로 2005년부터 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쓴 서한시대 거울 명문, 예서, 김정희, 19세기.

이 서첩은 추사 김정희가 서한시대 거울에 새겨진 5개의 명문을 옮겨 쓴 것이다. 김정희는 한나라 청동 거울에 새겨진 글씨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서체를 확립하는데 응용하였는데, 파임이나 삐침이 분명한 동한의 예서보다는 전서의 형을 지닌 서한의 예서를 높이 평가했다. 한나라 거울 글씨는 추사체가 이루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시문을 새긴 양면 벼루, 19세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종가에서 전래된 벼루이다. 위아래 양쪽 면 모두 먹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쪽 면에는 작은 글씨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벼루는 문인들의 필수품이자, 감상의 대상이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반드시 먼저 벼루부터 고른 후에야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인장을 찍어 모은 책, 인보(印譜)

추사 김정희의 인장, 전서, 김정희,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종가에서 전래된 인장 중 일부이다. 인장을 새기는 작업을 전각이라고 하는데, 인장에는 자, 호, 이름, 그리고 좋은 글귀들을 새겨 넣는다. 인장은 직접 새겨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각의 대가에게 부탁을 해서 새겨 받거나, 선물을 받는 경우도 많다. 추사는 워낙 전각을 잘 하는 분이었는데, 이 인장들 중에는 그가 직접 새긴 것과 중국의 학자들 및 친한 문인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들도 있는 듯 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왕과 왕실의 서예
어필은 왕의 글씨이다. 왕은 왕자 시절부터 이상적인 왕이 되기 위하여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학문을 익혔으며, 서예를 통해 정신과 마음을 꾸준히 닦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서예에 대한 소양이 깊었다. 어필은 그 시대의 글씨에 대한 선호도와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왕은 당시의 서예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왕실에서는 선진 서예 문화의 흐름과 중국의 새로운 자료 등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으며, 왕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예의 흐름을 이끌었던 여러 왕들 가운데 조선의 선조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석봉 한호라는 서예가를 발탁했을뿐 아니라 석봉체가 나라의 서체가 될 수 있도록 <한석봉 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종조는 당시의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들 뿐 아니라 조선 왕실에는 송설체의 유행을 이끈 안평대군 이용, 서예와 그먹문 연구를 증신시킨 낭선군 이우, 서화에 이름을 떨쳤던 흥선대원군 이하응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처럼 임금과 왕실의 글씨는 한국 서예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서예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선조 임금이 쓴 ‘적선’, 해서, 판각탑본, 16세기,

조선시대 국왕들은 어릴적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아 대체를 글씨를 잘 썼다. 선조는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명필에 속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으며, 한석봉을 발굴할 정도로 서예에 대한 안목도 뛰어났다.

필획이 굵고 당당한 큰 글씨의 해서체이다. 특히 큰 글씨를 자신감 넘치게 잘 썼다. 또한 글씨는 잘 쓰는 인물을 찾는데 있어 자신의 서예적 안목으로 골라낼 정도로 예리한 감각과 눈을 가졌던 임금으로, 명필 석봉 한호로 하여금 <해서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 서당에 보급시켰다. 선조 임금의 이러한 큰 글씨는 명필로 이름 높았던 딸 정명공주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중앙박물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서예의 발전.

 삼국시대에는 남북조 글씨의 영향을 받았으며, 당나라 구양순의 해서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예가 김생이 활동하였으며 그의 글씨체는 조선시대까지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북송의 영향을 받았으며 왕희지의 행서체가 주로 유행했다. 14세기에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들어와 조선전기까지 우리나라 서예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서예의 발전.

조선전기에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으며, 중기에는 송설체로부터 탈피하여 왕희지 서체가 연구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한호의 석봉체가 등장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청나라와의 학문교를 통해 고대 비석글씨 연구가 유행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김정희의 추사체가 완성되었다.

중국 서예의 발전(~당唐)

송대 이후의 중국 서예.

서예
서예(書藝)는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선(線)의 움직임, 변화, 힘 그리고 감정을 보여주며 동시에 문자의 의미로 정신을 전달한다. 서예는 예로부터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했던 중요한 교양의 하나였으며, 아름다운 글씨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서예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글씨를 열심히 써야 할 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등 학문을 깊이 공부하고 부단히 인격을 닦아서 고결한 정신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서예는 중국에서 한자를 수요한 기원전 2세기 무렵 시작되었다. 순수한 문화 교류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서예는 끊임없이 우리 서예 문화의 자극원이 되어 한국 서예를 형성한 토대가 되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陵碑)의 글씨는 한국 서예의 기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며, 통일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는 우리 서예의 커다란 줄기가 되었다. 고려의 승려 탄연(釋坦然).조선의 한호(韓濩).이광사(李匡師).김정희(金正喜)와 같은 인물들은 한국 서예를 진취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선조들의 발자취는 한국.중국의 서예라는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예술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예 문화는 조선말의 개화와 길제의 침략 및 서구문화의 급격한 유입 등으로 약화되었다. 정신의 고도한 시각적 표현인 서예는 기예(技藝)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침체기를 맞았으며, 현대문화에 밀리어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서예가와 서예 연구자들은 한국 서예 문화의 전통 회복과 계승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서예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바탕으로 발전하여 왔다. 오늘날 서예 문화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서예실에서는 대표적인 서예작품을 전시하여 옛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변화와 창조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