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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각 공예관] 불교 공예

불교공예는 부처의 장엄, 공양,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를 가리킨다. 불교공예는 그 쓰임새에 따라 범음구, 공양구, 장엄구, 밀교법구 등이 있다. 공양은 불(佛).법(法).승(僧)과 부모, 죽은자의 영혼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며, 공양구(供養具)는 공양을 올릴 때 사용되는 도구를 만한다. 공양물로는 향, 등(燈), 꽃, 음식 등이 있으며, 공양구로는 촛대, 향로, 정병 등이 있다. 공양구는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많이 만들어 사용되어 왔으며, 백제금동대향로(국보)를 비롯하여 뛰어난 걸작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고려시대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물가풍경무늬 정병(국보)을 전시하고 있다.

<물가풍경무늬 정병, 고려 12세기, 국보>

물가의 풍경이 은입사기법으로 그려져 있다고 해서 물가무늬정병이라고 불리는 정병이다. 이런 무늬를 그린 정병은 다양한 형태로 많이 만들어 경우가 많다고 하며, 아마도 중국 남조 도교의 영향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병(淨甁)은 부처에게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병으로, 승려가 지녀야 하는 18가지 필수품의 하나였다. 일찍이 통일신라 석굴암의 범천상에 보이며 고려시대에 유행하여 청동과 청자로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정병 표면을 파고 은실을 끼워 넣는 입사기법을 사용하여 물가 풍경을 그림처럼 장식한 예가 많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반대편에서 본 모습>

물가풍경무늬 정병,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고려 12세기, 국보
0.5mm 굵기의 은실로 버드나무와 갈대, 오리 등 물가풍경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고려시대 대표적인 정병이다. 몸체의 앞, 뒤에는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갈대가 솟은 섬과 오리, 기러기, 배를 타거나 낚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은입사로 표현되었는데, 푸른 녹과 어우러져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불교공예 중 공양을 올리는데 사용하는 공양구이다. 공양구로는 향을 올리는 데 사용하는 향로와 향완, 밝은 빛을 올리는 데 사용하는 촛대와 화로 등이 있다

<잔받침, 청동탁, 고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출토>

하남시 춘궁동 절터에서 출토된 향로이다. 걸이가 있는 향로로 아미타법회와 같은 특정한 불교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편적인 향로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항아리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뚜껑에 향이 나오는 구멍이 있다.

<걸이 향로, 청동 현향로, 고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출토>

걸이향로는 타원형의 몸체와 반구형의 뚜껑, 구름 모양의 손잡이로 구성된다. 이 향로는 춘궁동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원주 법천사지와 청주 사뇌사지 등에서도 이러한 향로가 발견되었다. 걸이향로는 아미타법회와 같은 특정 불교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곡사 청동은입사 향완’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은실을 박아 장식한 은입사기법을 사용하였다. 은입사기법이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습이다.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를 위해 1397년 진주 청곡사에서 이 향완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글자로 새겨져 있다.

‘청곡사’ 이름이 새겨진 향완, 조선, 진주 청곡사
<글자가 새겨진 부분>

‘청곡사’ 이름이 새겨진 향완, 청곡사 청동은입사 향완, 조선 1397년, 진주 청곡사
향을 사르는 향로 중 높은 굽과 넓은 전이 달린 향로를 향완이라 한다. 이 향완이 제작된 진주 청곡사는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의 원찰로, 1397년에 돌아가신 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만들어졌다. 청동 바탕 위에 무늬대로 홈을 판 후 은실을 끼워 장식하는 입사 기법으로 뇌문, 연꽃넝쿨, 연판, 여의두, 구름, 범자(梵字) 문양이 유려하게 장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향완고 촛대>
<향완, ‘무자’명 법천사 청동향완, 고려 1168년>
<촛대, 청동 광명대, 1. 고려>
<촛대, 청동 광명대, 2. 고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향로의 형태를 하고 있다.

<향로, 청동삼족 향로, 고려>

고려초에 만들어진 향로로 중국 요나라의 영향을 받은 향로의 형태이다. 받침에 요나라 연호가 새겨져 있다.

<연꽃가지 모양 손잡이 향로, 청동 연지형 병향로, 고려>

연꽃가지 모양 손잡이 향로, 청동 연지형 병향로, 고려
받침은 연잎, 노신을 연꽃, 손잡이는 연꽃가지 모양으로 만든 향로이다. 연지형병향로는 요나라에서 가장 먼저 제작, 사용하였고, 고려에서는 11세기 후반경에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향로의 받침에는 음각으로 ‘태강삼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077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향로(香爐)는 고대 인도지방에서는 고온다습하여 생긴 악취를 없애고 해충을 쫓기 위해 향을 사용하였다. 향을 공양하는 것을 최고의 대접으로 여겼으며 잡귀나 잡념을 제거한다고 하여 불교 의식과 여러 의례에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향을 태우는 그릇인 향로를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다. 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가 있는 향로를 특별히 향완이라고 하며,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공양구
공양은 불(佛), 법(法), 승(僧)과 부모, 죽은 자의 영혼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모니가 6년의 고행에도 꺠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마을에서 우유죽을 공양 받은 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것에서 유래하였다. 대표적인 공양물로는 향(香), 등(燈), 꽃, 과일, 차, 음식 등이 있고, 공양구로는 향로와 촛대, 꽃병 등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불교공예 중 승려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적인 용구로는 설법할 때 위엄과 예법을 세워는 상징으로 여의(如意), 가사띠 장식, 지팡이머리 장식 등이 있다. 또한 고려말 원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밀교(密敎)와 관련된 금강저, 금강령 같은 법구(法具)들도 있다.  금강저와 금강령은 라마교 영향을 받아서 사용되었던 밀교법구로 번뇌를 깨뜨린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일반적인 불교의식구는 아니다.

금강저는 밀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법구이다. 고대 인도에서 사용되었든 무기의 형태로 번뇌를 깨트린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금강저, 청동 금강저, 고려>

금강저는 고대 인도의 무기에서 유래한 형태로 번뇌를 깨드린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밀교법구이다. 제석천이 지닌 상징물이기도 하다. 고려 후기에 중국 원과 교류하면서 유입된 라마교의 영향으로 이와 같은 밀교법구가 유행하였다. 양 끝의 뾰족하게 돌출한 부분의 갯수에 따라 독고저, 삼고저, 오고저로 나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금강령, 청동 금강령, 1, 고려>
<금강령, 청동 금강령, 2. 고려>

사리(舍利)는 시신을 화장하여 나온 유골이며, 사리구(舍利具)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의 공양물을 뜻한다. 사리는 일반적으로 유리나 수정용기에 담고, 그 용기는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넣어서 탑에 안치한다. 사리구는 불국사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미륵사지석탑 등 웬만한 유명한 탑에서는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발견된 사리구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어서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은 해체/보수하기가 쉽지 않고 도굴하기 또한 상당히 어렵고, 불교신앙에서 중요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미륵사지석탑의 경우처럼 석탑의 해체/보수과정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동탑 해체.수리시 발견된 사리갖이다. 조각수법이 상당이 섬세하고 뛰어난 걸작이다. 당시 활동했던 조각가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를 모신 수정유리병>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고귀함을 상징하는 닫집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감은사 터 동탑 사리기,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구, 통일신라 682년 경, 보물>
<닫집 기둥, 사천왕상, 승려상>
<기단부>

사리구 외함 바깥에는 4면에 사천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돋을새김으로 사천왕상을 새겨놓고 있는 사실적인 표현과 조각수법 등이 상당히 우수하며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양쪽에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는 문고리가 있다.

<사리구 외함>

감은사 터 동탑 사리구, 통일신라 682년 경, 보물
1996년 감은사 동 삼층석탑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것으로 수정사리병-내함-외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라함은 사천왕이 배치된 최초의 사리구이며 탑을 든 북방 다문천왕을 중심으로 방위를 결정한다. 내함의 기단 위에는 화염보주 주위로 사천왕 및 승려상이 있고, 기단에는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1층 목탑을 축소하여 금동으로 재현한 공양탑이다. 불전 안에 두며 사리탑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 1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으며 기단과 탑신 1층이 목조 불전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공양탑, 금동 다층 소탑, 고려 전기>
<기단부와 1층 탑신>

공양탑, 금동 다층 소탑, 고려 전기
높이 74.5cm의 금동 소탑으로 불전 안에 두는 사리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탑은 사각형의 기단과 11층의 탑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의 한쪽에 계단을 놓아 탑으로 연결하고 있다. 초층탑신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부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보물)는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이다. 가장 안쪽의 은제 도금 탑형 사리기와 이것을 넣는 은제도금팔각당형 사리기, 청동 발, 백자 발 순으로 포개어 납입되었다. 백자발과 사리기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1391년)에 부인 강씨 등과 함께 발원하여 만들어 봉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가 발원한 사리장엄구, 고려 1390년, 1391년,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출토, 보물>
<내함에 해당하는 은제도금탑형사리기>
<사리기>
<이성계가 발원한 사리장엄구, 고려 1390년, 1391년,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출토, 보물>
<집모양을 하고 있는 외함>
<집모양을 하고 있는 외함>
<백자발>

이성계가 발원한 사리장엄구,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고려 1390년, 1391년,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출토, 보물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부인 강씨, 승려 월암 등과 함께 발원해 금강산 비로봉에 봉안한 사리장엄이다. 백자 발 4점과 백자 향로, 청동 발, 은제 도금 사리기 2점과 유리제 사리기, 은제 귀이개로 구성되었다. 백자 발과 사리기에 새겨진 총 5개의 명문에는 이성계와 그의 둘째 부인 강씨, 그리고 홍영통, 황희석 등의 조선 개국 공신과 지지자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심룡, 나득부, 박자청 등 백자 발과 사리함을 만든 장인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14세기 백자와 금속기 제작 상황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사리구(舍利具)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이며, 탑 속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용기가 사리구이다. 사리는 불교경전에 따라 금, 은, 동, 석으로 만든 용기에 차례로 넣어 탑에 안치한다. 우리나라에는 6세기 중엽에 사리가 전래되었고, 현재까지 백제와 신라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 차원의 사리봉안이 많았으며 상자모양, 집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사리구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원형과 팔각형, 라마탑형의 사리구가 만들어졌고, 청자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원형합이 많이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범음구(梵音具)는 불교공예에서 범음(梵音)을 만들어 내는 도구이다. 범음은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한다. 대표적인 범은구로는 큰 종인 범종, 큰 북인 법고,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 구름 모양의 판인 은판이 있으며 이들 네 가지 범음구를 불교사물(佛敎四物)이라 한다. 범종은 전생과 지옥의 중생을, 법고는 땅 위의 짐승을, 목어는 물속의 중생을, 은판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든 날짐승을 구제하기 위해 울린다고 알려져 있다. 범음구 중 금속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는 사찰에 걸려 있던 범종과 쇠북을 있다. 

<동종, 고려 13세기, 황해도 평산군 월봉리 출토>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국보)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범종 중 가장 큰 규모로 높이 1.33m이다. 유곽 아래 위패형 틀을 설치하고, 범종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글을 새겨 놓고 있다. 요나라 통화(統和) 28년인 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신라범종에서 볼 수 없는 고려시대 범종만의 특징이다.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국보)>
<글자가 새겨진 부분>
<종을 매달아 주는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

범종(梵鍾)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었던 고동기(古銅器)의 종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서역문화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범종은 학명으로 ‘한국종’이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규모와 장식하고 있는 조각에서 보여주는 예술성 등을 볼 때 신라금관과 함께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범종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상원사 동종으로 752년에 제작되었으며,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4㎝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동종, 고려 13세기, 황해도 평산군 월봉리 출토>
<동종, 고려 13세기, 황해도 평산군 월봉리 출토>
<동종, 고려 13세기, 황해도 평산군 월봉리 출토>
<동종, 청동 종, 고려 13세기, 경기도 고양군 진관내리 발견>
<반대편에서 본 모습>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금고(金鼓)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불린다. 범종이 아침저녁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을 갖는데 사용하는데 비해 쇠북은 단순히 공양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으는 사용된다. 소리는 범종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고음을 낸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함통6년(865년)”이 새겨진 시공사 쇠북이 있다. 쇠북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만들어졌으며 조선후기 만들어진 것은 지금도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쇠북, 청동 금고, 고려>
<반대편>
<경암사 쇠북, ‘경암사’ 명 청동반자, 고려 1073년>
<글자가 새겨진 부분>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금구 또는 반자라고도 한다. 사찰에서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드을 모을떄 사용한다. 북의 옆면이나 뒷면에는 북의 제작연대와 걸려 있던 사찰 이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북을 만들며, 빌었던 소망이 새겨진 것이 많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범음구
범음은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하며, 범음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범음이라 한다. 범음구에는 종을 비롯해 큰 북인 법고,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 구름 모양의 운판이 있는데 이를 불교사물이라 한다. 이외에 불교의식이나 공양 때 치는 쇠북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불교공예
불교공예는 불보살의 장엄과 공양 및 의식에 사용하는 도구들을 말한다. 석가모니의 삼의일발(세가지 옷과 한개의 발우)에서 시작되었고, 석가모니의 사리를 탑에 봉안하면서 발달하였다. 불교공예는 쓰임새에 따라 전각이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장엄구, 사람을 모으거나 교화하는데 사용하는 범음구, 부처님께 공양드리는데 사용하는 공양구, 밀교의식에 사용하는 밀교법구 등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