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거울은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전국의 주요 박물관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제사장이나 부족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주술적인 용도였으나, 점차적으로 화장을 위한 일상용품으로 그 용도가 변하고 고려시대에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제작연대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어진 것이 많다. 청동거울에는 주술적의미나 장식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그림이나 글자를 새겨 놓고 있으며, 조형미가 우수하며, 보존상태가 좋은 유물들이 많은 편이다. 때문에 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 중에서는 눈에 잘 띄는 문화재이다
거울을 거는데 사용한 도구로 맨위에 있는 연꽂과 봉황장식은 거울을 거는 고리이다. 타출기법으로 넝쿨무늬 등을 새겨놓고 있다.
거울 걸이, 은제 도금 경가, 고려 12~13세기
거울을 걸어서 사용하는 거울걸이로 두 개의 사각틀을 교차하여 펼치거나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거울걸이는 나무로 만들고 봉황과 당초문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한 은제도금판으로 감쌌다. 거울걸이 뒤쪽 틀 중앙에는 돋을새김으로 연꽃을 만들고, 그 위의 봉황모양의 유를 만들어 거울을 걸게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거울 뒷면의 사가 테두리 안에 ‘고려국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거울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거울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청동거울로 이야기를 표현한 그림을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
청동거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제작한 금속공예품이다. 청동기시대부터 거울은 정치와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였다. 이후 지배층의 전유물에서 점차 사용계층과 용도가 확대되어 화장용구, 무역품, 공양물 등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거울의 형태와 무늬가 다양해졌고, 고려에서 만들었다는 ‘고려국조’가 새겨진 거울도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속제 그릇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무덤 부장품으로 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이 점차 일상생활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옛 기록에도 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금속제 그릇은 음식을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향그릇이, 조선시대에는 여인네들의 화장품 그릇 등이 만들어 졌다. 그 중 조선시대 화장품 그릇은 그 제작수법이 화려하고 뛰어나다.
‘복녕궁방고’가 새겨진 접시, ‘북녕궁방고’ 명 은제 도금 화형 접시, 고려 12세기
고려 숙종의 넷째 딸인 북녕궁주의 궁방에서 사용하던 은제 접시이다. 여섯 잎의 꽃 모양 접시 안쪽에는 돋을새김으로 무늬를 새기고 도금하였으며 뒷면에는 ‘북녕궁방고’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12세기 전반 고려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접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은제도금화형탁잔'(보물)은 잔과 잔받침이 같이 1벌로 있을 때 ‘탁잔(托盞)’이라 부르는데 1벌이 온전히 남아 있는 유물이다. 잔과 잔받침은 모두 꽃잎이 6개인 육화형(六花形)을 하고 있으며 잔받침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타출기법으로 장식해 놓고 있다. 고려시대 은제탁자 가운데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나며 장식된 문양이 세련되어 고려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청자 탁잔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잔과 잔받침, 은제도금탁잔, 고려 12세기, 보물
탁잔은 술이나 차를 마시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잔을 놓는 받침인 탁(託)과 액제를 담는 잔으로 구성된다. 이 탁잔은 여섯 개의 꽃잎 모양으로 새김과 돋을새김 기법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서긍의 <고려도경>(1124년)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외국의 사신에게 술을 대접할 때 이런 은제 도금 탁잔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숙신공주묘 출토 화장품 그릇, 은제 화장호, 조선 1650년경, 숙신공주묘 출토
조선의 17대 효종대왕의 첫째 딸인 숙신공주 묘에서 출토된 은제 화장품 그릇이다. 숙신공주는 효종이 볼모로 만주 심양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가 병사하였다. 숙신공주묘에서는 신선무늬가 새겨진 화장호와 과일무늬가 새겨진 화장호가 출토되었고, 과일무늬 화장호에서는 연백으로 추정되는 분가루가 남아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원빈 홍씨묘 출토 화장품 그릇, 은제 화장합, 조선 1779년 경, 원빈홍씨묘 출토,
원빈 홍씨는 홍국영의 여동생으로 1778년 13세에 정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1779년 병사하였다. 원빈 홍씨묘에서는 적색유리합과 칠보장식 팔각합 및 수복강녕과 수보고진이 새겨진 은제 화장호가 출토되었다. 이 중 적색유리합과 팔각합에는 연백으로 보이는 분가루가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소꿉 도구, 은제 완구, 대한제국
은으로 만든 소꿉 도구들로 제기를 비롯해 식기와 경대, 뒤주, 화병, 수막새 등을 정교하게 축소하여 만들었다. 소꿉도구들에는 음각으로 오얏꽃을 새겼으며, 소꿉도구들의 밑면에는 이왕직미술제작소에서 만든 것을 알 수 있는 ‘美’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꽃모양 잔, 은제 화형 잔, 고려
여덟 잎의 꽃 모양 은제 잔으로 안쪽 바닥에는 새김기법으로 국화, 그 주외로는 연꽃, 구연부에는 국화무늬를 새기고 도금하였다. 이처럼 은제 그릇에 무늬를 새기고 도금한 것을 금화라고 부른다. 잔의 구연부 뒷면에는 ‘최(崔)’자를 새겨 놓았는데, 은기를 사용했던 인물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 금은그릇
고려시대에는 세련된 기형과 화려한 무늬의 금은그릇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왕실과 지배층이 주로 사용하였고, 외교사절의 접대에도 사용되었다. 술과 차 및 향과 관련된 그릇이 많고, 새김이나 돋을새김으로 무늬를 새기거나 무늬 부분만을 도금하는 장식기법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송과 요,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금은그릇도 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무덤 부장품으로 많이 만들어졌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일상생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청동그릇들이 많이 남아 있다.
청동 그릇,
청동 그릇은 삼국시대에는 주로 부장용이었으나 통일신라 이후로 점차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송사》<고려전>에 ‘민가에서 모두 청동그릇을 사용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청동그릇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접시, 대접, 합 등으로 이루어진 식기류와 술, 차를 담는 잔, 주전자, 병 등을 하나의 조합으로 구성하여 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입사(入絲)는 동, 철 등의 금속에 선이나 홈을 파서 금, 은, 동 등 다른 금속을 채워 넣는 기법으로 상감(象嵌)이라고도 부른다. 금속공예의 장식기법으로는 주조, 단조, 새김 등 다양한 기법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화려하면서도 발달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입사기법은 기원전 3000년 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생겨났으며 사산조페르시다와 이슬람에서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청동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선으로 표현하는 입사방식을 사용하다고 통일신라시대에 얊은 판을 사용한 입사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입사기법을 사용해서 만든 단지이다. 입사기법이 아주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사기법을 만든 유물로는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칠지도(369년)을 들 수 있으며, 삼국시대 환두대도, 마구(馬具) 등을 장식하는데 입사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향완, 정병 등 불교공예품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화로, 촛대, 담배합 등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생활용품을 장식하는데도 많이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금동으로 만든 병으로 은실로 무늬를 만들어 장식하고 있다.
버드나무와 물위를 한가로이 오가는 오리와 하늘을 나는 새들이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장식한 것을 말하며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금속제 정병이나 청동향완, 도자기 등에 많이 쓰였던 무늬이다. 이런 무늬를 그린 정병은 다양한 형태로 많이 만들어 경우가 많다고 하며, 아마도 중국 남조 도교의 영향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한말에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향로이다. 은입사기법으로 수복(壽福)을 상징하는 글자는 무늬를 표현하고 있다.
입사(入絲)
입사는 금속공예품의 표면을 파내어 금, 은 등 다른 금속을 넣어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끼움입사와 쪼음입사로 구분된다. 끼움입사는 무늬를 장식할 부분에 홈을 파고 금실이나 은실을 넣는 기법이다. 쪼음입사는 끌을 이용하 기물의 전체 또는 일부늘 촘촘하게 쪼은 후 자유롭게 입사한느 기법으로 철제공예품에 주로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 관리의 허리띠, 과대
고려시대에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끈 위에 장식판을 달아 만든 허리띠를 과대(銙帶)라고 한다. 관리가 궁궐에 나아갈 때 입는 관복에 착용하여 계급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려사>와 <고려도경> 등의 문헌에는 계급에 따라 금, 옥, 은, 물소뿔, 검은 칠을 한 가죽, 검은 칠을 한 나무 등으로 만든 과대를 착용하였다. 고려시대의 과대는 이웃 나라와 국가적 교류를 할 때에 주고받는 의례품이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왕에게 보내는 선물이나 답례품으로 과대를 보냈다. 또한 고려 왕은 신하들에게 벼슬과 함께 과대를 내려 주었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정치적으로 훌륭한 신하들에 대한 상으로 과대를 내려 주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