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색청자로 불렸던 고려 청자는 은은한 녹색을 띠는 도자기로 우리나라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예술작품이다. 고려청자는 도자기 종주국인 송나라 사람들조차도 그 빛깔이 중국 청자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비색청자는 유약이 반투명하며 그릇표면에 금이 생기지 않고 광택이 은은한 것이 특징으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에 절정기를 이루며 12세기에는 상감기법이 도입되어 그 빛깔과 함께 예술적 조형미까지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가 언제부터 만들어 졌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인 9~10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전에 청자가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말에서 일부 만들기는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황소의 난에서 시작된 당나라 말에서 오대에 이르는 혼란기에 중국 도자기 기술자들이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월주요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들이 고려초기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란 무엇인가?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를 합친 말이다. 도기와 자기를 나누는 기준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도기는 주로 1,200℃ 아래의 온도에서 굽는 그릇을 의미하며, 자기는 유약을 입혀 1,200℃를 넘는 높은 온도에서 굽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을 가리킨다. 18세기 백자 제작에 처음 성공한 서양에서는 도자기의 종류를 토기, 도기, 석기, 자기, 골회자기의 5단계로 나눈다. 그중 1,300℃이상 고온에서 구운 것을 자기로 분류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청자는 석기에 해당하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자기에 속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초기의 가마들은 개성과 가까운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중국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은 자기를 생산하였다. 11세기에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이 청자의 중심 제작지가 되었으며, 점차 완성도 높은 청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청자 조각.갑발, 고려 10세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출토
방산동 가마터는 초기 자기 제작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발굴 조사 결과 도기에서 자기 제작으로 기술 전환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이 밝혀졌다. 중국 월주요 자기와 유사한 그릇이 확인되었다. 고급 자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갑발에 절강성 영파 인근인 ‘봉화’ 등 중국 지명이 새겨져 있어 중국 장인과 직접적인 기술 교류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기도 시흥 방산동 가마는 초기 고려청자의 표식유물인 해무리굽완과 화형접시를 비롯하여 주구가 긴 주자, 뚜껑, 잔탁 등을 제작하였는데, 출토유물의 형태와 유색이 중국 오대(907~960년) 오월국 월주요 청자와 매우 흡사하여 그 시기를 10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하였다. 발형(鉢形)과 통형(筒形)의 갑발, 갑발 받침과 고리형 받침 등의 요도구가 사용되었다. 갑발에 새겨진 ‘봉화(奉化)’라는 글씨는 오월국 봉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청자와 백자 완(찻그릇), 고려 10~11세기
굽을 깎은 모양이 마치 햇무리가 진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햇무리굽 완’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그릇으로, 차를 담아 마실 때 사용한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전반이 되면 햇무리굽 형태의 완이 사라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제기 조각, 고려 10~11세기, 경기도 용인시 서리 출토
1980년대 발굴조사된 용인 서리 중덕 가마터에서 최초로 벽돌 가마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2000년대 이후 조사된 상반가마터는 중덕 가마터와 함께 고려 전기 가마의 구조 변화와 고려백자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다. 200여 점이 넘는 제례용 그릇이 발견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기도 용인 서리 중덕 가마는 처음에는 장방형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지만 이후 진흙을 쌓아 만든 형태로 전환하여 주목된다. 가마와 가마 좌우측 퇴적 구릉의 4개의 자연층위가 확인되었고, 해무리굽완과 화형접시, 주자, 잔탁 등의 기종뿐 아니라 해무리 굽완보다 앞서는 선해무리굽완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용인 서리 상반 가마는 폐기장에서 벽돌편이 수습되었으나 진흙 가마의 구조만이 확인되었고, 출토유물은 중덕 가마의 3,4기층과 유사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청자 음각 연꽃잎무늬 뚜껑이 있는 발, 고려 11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의 초기 생산 단계에 제작된 그릇이다. 전라남도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에서 1009년이라는 탑의 건립 연대가 새겨진 탑지와 함께 나온 사례가 있다. 승려의 사리를 담는 사리구나 사찰 공양구 등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음각 연꽃잎무늬 대접, 고려 11세기
음각된 연꽃잎무늬는 국화 넝쿨무늬와 더불어 고려의 초기 청자에 등장한다. 전라남도 강진 일대의 용운리와 삼흥리 등 11세기 가마터에서 주로 발견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자기 생산지가 남부로 이동한 후 가장 활발한 생산이 이루어진 곳은 전라남도 강진이다. 강진에서는 대구소(大口所, 현 대구면 용운리.사당리)와 칠량소(七樑所, 현 칠량면 삼흥리) 두 곳이 자기소 체제로 운영되었다. 강진의 진흙가마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바 가장 시기가 이른 것은 용운리 63호이다. 해무리굽완, 화형접시, 옥연접시 등이 발견되었고, 번조 시 구멍 뚫린 갑발이 사용되었다. 용운리 9호와 10호1층에서도 초기 청자가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청자.백자 꽃모양접시, 고려 10~11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경기도 시흥 방산동과 용인 서리, 황해도 배천 원산리 등 초기 가마터에서 주로 나타나는 그릇이다. 그릇 겉면을 길다란 모양으로 깊게 눌러 꽃모양을 만들었다. 중서부 지역 벽돌 가마뿐 아니라 전라남도 강진 용운리와 해남 신덕리 가마터 등에서도 생산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음각 연꽃잎무늬 병, 고려 11~12세기
고려시대 무덤에서 확인되는 주요 부장품이다. 12세기 초반 중국 하북성 선화에 있는 장세경의 무덤 벽화에는 이와 비슷한 병에 꽃을 꽂아 공간을 장신한 장면이 남아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제작 초기단계에는 무늬가 없는 청자가 주로 만들어졌으며, 색의 시대에 들어와 고려만의 비색으로 꽃을 피운다. 무늬없이 광택이 밝은 반투명 유약을 시유한 이 병은 고려 초 금속기를 모방하였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균형 잡힌 조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청자 제작의시작
통일신라 9세기 무렵 차 문화의 유행과 함께 중국 자기가 들어오면서 자기 소비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자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수요가 확대되면서 자기를 직접 제작하려는 의지도 강해졌다. 고려는 삼국시대부터 쌓아온 도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자기 제작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0세기에 청자와 백자 생산에 성공했다. 현재까지 조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가마들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경기도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등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주로 있다. 이 시기에는 중국 월주요의 기술을 받아들여 벽돌로 지은 가마를 만들었다. 11세기 초반에는 벽돌가마가 사라지며 전라남도 강진 용운리와 삼흥리 등에서 고려의 자기 제작 환경에 적합한 진흙 가마로 새롭게 발전했고, 백자보다 청자를 위주로 자기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차도구를 비롯하여 왕실과 국가 의례용 제기를 제작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아름답고 완벽한 12세기 전반 절정기의 순청자이다. 이와 유사한 접시가 중국 송나라 접시에도 보이지만, 이 접시는 꽃잎의 표현과 유약의 아름다움에서 고려청자 고유의 세련된 멋이 느껴진다.
청자 꽃모양 사발,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4)
틀을 사용하여 꽃모양으로 그릇을 찍어낸 후 꽃잎의 면을 볼록하게 다듬어서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푸른 옥빛의 비색 유약을 사용하여 맑고 청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중국 북송대 하남성 청량사 여요에서도 같은 형태의 그릇을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병,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장식 없이 길게 뻗은 목과 풍만한 몸체의 병으로, 청동제 병과 모양이 비슷하다. 그릇 전체를 감싸는 반투명한 유약과 단아한 형태에서 오는 조화로움이 비색청자의 진수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꽃모양 접시,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대표적인 비색청자 중 하나로, 접시 끝부분을 꽃모양으로 부드럽고 얇게 마무리하여 사실감과 입체감을 표현했다. 청아한 비색과 꽃잎의 우아한 곡선은 고려청자 특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비색 청자 유약은 반투명하며, 그릇 표면에 갈라진 금이 생기지 않고 광택이 은은한 것이 특징이다. 비색 청자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까지 가장 세련된 색을 띤다. 12세기 중엽부터는 상감 청자가 유행하여 비색 유약에서 상감무늬가 잘 드러나는 맑고 투명한 유약으로 바뀌게 된다.
청자 병, 고려 12세기
두 귀 달린 금속제 병을 본 떠 청자로 만들었다. 뛰어난 조형성과 비색이 어우러져 단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의례용 그릇으로 추정되지만 꽃병이나 감상을 위한 장식용 병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매병, 고려 11~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충청남도 태안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인 마도 2호선에서는 ‘준’이라는 명칭이 쓰인 화뭎표가 함께 있는 청자 매병 두 점이 나왔다. 당시 매병을 ‘준’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자 매병, 고려 11~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백자는 청자와 다른 바탕흙을 쓰고 더 높은 온도에서 구워야 한다. 그러나 청자와 같은 가마에서 구워지면서 완전히 자기로 만들어지지 않고 마치 석고의 질감처럼 무른 상태가 되었다. 이 매병도 낮은 온도로 구워져서 단단하지 않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비색청자의 완성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은 11세기 후반부터 완성도가 높아져서 12세기에 가장 세련된 색을 띠었다. 반투명한 유약과 차분한 광택이 특징인 비색은 유리질로 변한 얇은 유약층에 가득 들어차 있는 미세한 기포들 속으로 빛이 퍼지면서 나타난다. 비색청자는 전라남도 강진 사당리 일대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고려인은 고려청자의 은은한 녹색을 스스로 ‘비색’이라고 부르며 충국 청자의 ‘비색(秘色)’과 구분하였다. 1123년(인종1) 개경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기록한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령인은 ‘비색’이라고 한다”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은 우수한 고려 비색청자에 대한 고려인의 자부심으로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압출양각 도철무늬 향로, 고려 12세기
고려는 각종 의례제도를 정립하면서 중국 송나라 제도를 참고하였다. 이때 들여왔던 <선화박고도> 등 의례와 관련된 책에 수록된 중국 고대 청동기를 고려청자로도 만들었다. 도철은 고대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의례와 관련된 각종 공예품에 무늬로 등장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압출양각 연꽃모양 향로,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동물 모양의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향로의 몸체만 남았다. 중국 하남성 청량사 여요에서 발견된 청자향로와 조형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송나라 사신 서승이 <고려도경>에서 언급했던 여요 자기와 고려청자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용무늬 음각 용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전남 강진 사당리 가마터 출토
용무늬를 새긴 매병의 일부이다. 당시 용은 최고 권력자의 위엄을 상징했기 때문에 의복이나 기물에 용무늬 장식을 금지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했다. 용무늬 청자는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예가 드물다. 네 마리의 용이 장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매병은 최고 수준의 용무늬와 비색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전라남도 강진 사당리 가마는 고려청자 전성기 가운데서도 정품 중의 정품을 생산해 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사당리 당전마을 가마터는 고려시대 대구소 자기소 체제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바 기종과 기형, 문양장식이 가장 다채롭고 정교하며 유색 또한 매우 좋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청자 양각 용무늬 참외모양 매병,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조각탈을 옆으로 뉘여서 새긴 용무늬와 모란무늬의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고려시대에 용무늬 매병은 왕실의 의례나 행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고급 고려청자를 제작했던 전라남도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이와 같은 매병 조각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압출양각 이룡무늬 대접, 고려 12세기, 이홍근 기증
이룡무늬는 대접.완.잔.접시.잔받침과 국자 등 일부 청자에만 장식되어 있어서 의례 등 특정한 목적과 용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늬는 중국 북송 휘종의 각종 용품에서 확인되므로 고려에서도 왕실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음각 이룡무늬 잔 받침,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도마뱀처럼 길쭉한 모습에 뿔이 없는 용을 이룡이라고 하는데, 주로 고급 청자에 등장한다. 이룡무늬가 장식된 청자는 왕실과 국가 의례에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왕실과 의례용 청자
고려 왕조는 성종 (재위 981~997) 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제를 정비하면서 의례용 자기를 제작했다. 고려는 <성정고금례> 등 예제에 관한 책을 간행하고 제기도감, 도제고 등의 관청을 설치하여 왕실과 국가 의례용 기물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관리했다. 의례용 그릇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철(饕餮), 용, 이룡 등의 무늬를 장식했다. 고려 왕실은 상상 속 동물인 도철무늬를 장실한 청자 향로에 향을 피웠다. 용은 태조가 후대 왕들에게 당부를 담은 <훈요십조>에 국가 주요 행사인 팔관회가 열릴 때 꼭 기려야 할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뿔없는 용을 뜻하는 이룡은 상서로운 존재로서 왕실의 존엄함을 상징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양각갈대기러기문 정병'(보물)는 고려시대 12세기에 만들어진 물가풍경무늬 정병이다. 몸체의 한면에는 물가의 갈대와 기러기 1쌍을 그렸고 다른 면에는 수양버들 아래에서 수영하고 원앙 1쌍을 그려 놓고 있다. 이 정병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은입사기법으로 만든 정병(국보)과 거의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 사용하던 동기(銅器)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만든 수법이 매우 세련되었으며 안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청자 양각 물가풍경무늬 정병,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보물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데 쓰이거나 여러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다. 서긍의 <고려도경>(1124)에는 민가에서도 정병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정병의 한쪽 면에는 갈대 밑에서 노니는 기러기 한 쌍이, 다른 면에는 수양버들 아래 쉬고 있는 원앙 한쌍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음각연꽃넝쿨무늬매병'(국보)은 고려시대 12세기에 만든 청자 매병이다. 작은 아가리와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등 고려청자 매병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적인 특징들을 잘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몸통에는 연꽃넝쿨무늬가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맑고 투명한 회청색 유약이 고르게 씌워져 있다. 전남 강진 가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색청자로 잘 알려진 고려 순청자 전성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자 음각 연꽃 넝쿨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국보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귀하게 여겼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연꽃을 비롯하여 연근.연밥까지도 신성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매병의 연꽃은 비췻빛 비색과 조화를 이루며 12세기 고려인이 추구한 미감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청자의 시작과 발전
우리나라는 고려 1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청자와 백자를 제작했다. 전통적인 경질 도기의 제작 기반 위에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한바도 중서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던 초기 가마는 중국 오대 월주요 가마와 비슷한 형태로 벽돌을 쌓아 지은 대형 가마였다. 처음에는 중국 자기의 양식을 따른 청자와 백자를 함께 만들었지만 곧 청자를 중심으로 한 생산 체계로 바뀌었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 전라북도 고창 등 남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기 가마가 운영되었다. 당시 고려 왕실과 중앙 관청은 인력이 많이 필요한 수공업 물품이나 특정 지역에서만 나오는 광물.수산물 등을 ‘소’라는 지역에서 세금으로 받았다. 그중 자기소는 강진에 두고 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쓸 최고급 청자를 만들었다. 11세기 무렵 벽돌 가마가 점차 사리지고 전통적인 도기 가마 기술을 결합하여 고려의 자기 제작 환경에 맞는 진흙 가마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또한 좋은 원료를 확보하는 방법과 가마 온도를 조절하는 기술 등이 향상되면서 고려청자의 빛깔이 급격히 좋아졌다. 12세기 전반에는 은은한 비취색을 머금은 아름다운 비색청자를 완성했고 세련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17대 인종의 능인 장릉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유물들이다. ‘참외모양 병'(국보), 사각받침대, 잔과 뚜껑, 국화모양 합 등 순청자와 ‘청동도장’, ‘은제수저, ‘청동내함’, ‘석제외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왕실의 공예문화와 고려청자가 절정기로 접어드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인종 장릉에서 나온 청자, 고려 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단정한 기형과 비색 유약, 잔금없는 깔끔한 표면이 특징이다. 청자 받침대는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제사 유적에서 향로, 향완, 잔받침 등과 함께 나온 사례가 있다. 모서리에 단이 있어 포갤 수 있다는 점, 윗면 중앙이 오목하여 음식물 들을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포개어 쌓는 의례용기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동 도장, 고려 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불교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인 사자 두 마리가 앞발로 보배구슬을 받치고 서 있다. 도정 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의 뚜껑에도 같은 형태의 보배구슬이 장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자 참외모양병'(국보)은 고려청자 전성기였던 12세기에 만들어진 참외모양을 하고 있는 청자병이다. 아가리부분은 활짝 핀 참외꽃 모양을, 몸통은 참외 모양을 하고 있다. 장식이나 무늬가 없지만 청자고유의 빛깔과 단정하고 세련된 조형미로 당시 귀족들을 취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뛰어난 색과 완벽한 균형미를 잘 갖추고 있는 걸작으로 비슷한 형태의 참외모양 병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자 참외모양 병, 고려 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국보
고려 왕실 청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비색청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용도는 꽃을 꽂는 꽃병으로 추정된다. 중국 산서성 평양현의 금대(1115~1234) 무덤 벽면에는 참외모양 병에 연꽃을 풍성하게 꽂아 놓은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은제 숟가락과 젓가락, 고려 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숟가락은 구리가 약간 포함된 은으로 만들어졌다. 자루의 단면은 납작하고 길게 휘어진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자루 끝에는 장식이 없다. 젓가락 역시 은으로 만들어졌다. 단멸이 둥글고 끝마디에 두 개의 홈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함, 고려 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외함은 모래 성분으로 된 이암이며, 이 석재는 경상북도 포항 일대에서 많이 난다. 외함의 표면에는 분장토와 진사 등이 확인되어, 원래는 장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황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시대에 뼈 항아리를 넣어둔 석제 함과 비교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인종 장릉에서 나온 비색청자와 공예품
고려 제17대 임금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국보 <청자 참외모양 병>은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이다. 중국 도자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려 특유의 세련된 미감으로 새롭게 창조되었다. 1123년(인종1) 개경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극찬한 고려 비색청자는 비로 아 <청자 참외모양병> 같은 예술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정이 묻힌 장릉의 위치는 개성 일대로 추정될 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안았다. ‘황통 6년(1146)’의 연대가 있는 인종 시책을 포함한 각종 청자와 공예품은 12세기 전반 고려 왕실의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청자, 자기의 시대를 열다
유약을 입혀 1,200℃가 넘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자기는 수준 높은 제작 기술과 첨단 설비가 필요한 정교한 예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자기를 사용해 왔다. 특히 통일신라 때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로 차 문화가 유행하면서 중국 청자와 백자 찻그릇 등을 수입해 왔다. 고려는 삼국시대 이래 쌓아 온 도기 생산 체계를 기반으로 중국의 자기 제작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10세기에 청자와 백자를 만들어냈다. 자기 제작의 성공은 고려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뛰어난 기술력이 빚어낸 결과로 역사.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가마들은 경기도 시흥 방산동과 용인 서리 등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중서부 지역에 주로 있었다. 처음에는 중국의 기술을 들여와 벽돌로 가마를 짓고 청자와 백자를 같이 만들다가 곧 청자 중심의 생산 체계로 바뀌었다. 11세기 이후 국가 문물과 제도가 갖춰짐에 따라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 등 남서부 지역에서는 왕실과 중앙 관청 등에서 사용할 청자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도기 가마 기술이 합쳐진 진흙 가마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고려는 청자 제작 기술을 거듭 발전시켜 예술적 경지를 높였다. 12세기에 은은한 비취색을 띠는 비색청자를 완성했고 다양한 동식물 모양의 상형청자를 제작했다. 바탕흙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흙을 메워 장식하는 상감청자는 13세기에 크게 꽃을 피웠으며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13세기 후반 이래 원나라와 문화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고려청자 제작에도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등장했고, 그릇에 상감 무늬가 가득 채워지며 복잡하고 화려해졌다. 14세기 후반에는 밖으로는 중국에서 원.명 교체 등의 복잡한 변화가 있었고, 안으로는 고려의 정치.사회적 혼란도 더욱 커졌다. 왕실과 조정의 주도 아래 고급 청자를 생산했던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의 가마들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청자의 품질이 낮아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고려 말의 이와 같은 청자 제작 환경은 조선 초 분청사기로 이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2024년
- ‘국보 청자 참외모양 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
- ‘국보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
- ‘보물 청자 양각갈대기러기문 정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