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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통일신라, 불교 문화

통일신라는 삼국시대의 전통에 이어서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그 중 불교 조각은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나라와 서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수법과 예술적인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의 불교조각은 서역의 간다라 미술의 사실적인 묘사가 그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석탑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뛰어난 유물들을 남겨 있으며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자부심을 갖게 해 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로는 사천왕사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서역출신 사람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양지를 들 수 있다. 신라의 조각은 석굴암 불상처럼 전신을 조각한 것도 있지만, 당시에 많이 세워졌던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 들을 돋을 새김한 부조작품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으며, 그 조각 수법들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보다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천왕상 전돌, 경북 경주 배반동 사천왕사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670년경, 녹유>
<사천왕상 전돌, 경북 경주 배반동 사천왕사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670년경, 녹유>

사천왕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은 탑의 기단을 장식한 것으로, 기단 네 면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3개씩 총 24개가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지키는 형태로 배치되지만, 사천왕사 탑의 기단에는 3개의 신장만으로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석굴암 내부>

석굴암
경주 토함산 정상부의 동쪽에 있는 사찰로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산자락을 잘라낸 후 다시 인공으로 석굴을 만든 특수한 구조이다. 석굴 내부는 돔 형식의 건축 구조로 되어 있고, 주실의 본존불을 포함한 38구의 조각이 안치되어 있다. 전실의 좌우 벽면에는 각각 4구씩 팔부중이, 주실 입구 좌우에는 금강역사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전실과 주실을 연결하는 통로 좌우에는 각각 2구씩 4구의 사천왕상이, 주실 주위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비롯한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들이 배치되었다. 이 조각들은 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정수를 알려주는 최고의 작품으로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철불, 출토지 미상,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철>

통일신라 불상
통일신라 불상은 통일 이전 토착적인 신라의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조각 양식을 흡수하는 한편,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통일신라만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성립했다. 통일신라 불상 중 가장 완성된 예가 바로 8세기 중엽 경 석굴암 본존불이며, 이 시기를 정점으로 통일신라의 불상 조각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이후 신라 사회의 모순과 선종의 유행으로 약사불과 비로자나불이 등장하며, 금동불이 줄어들고 철불이라는 새로운 불상이 유행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팔부중, 경북 경주 담엄사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9세기, 돌>
<팔부중, 경북 경주 담엄사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9세기, 돌>

팔부중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신으로 팔부신중이라고도 하며,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睺羅迦가 있다. 여기에 전시된 팔부중은 아수라와 건달바인데, 원래 석탑의 상층 기단부 면석에 새겨진 것이다. 아수라는 원래 싸움의 신이었으나 부처님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으며, 얼굴은 셋, 손과 팔은 여덟 개 혹은 여섯 개로 표현된다. 건달바는 모두 사자의 머리가죽과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불국토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불교의 토착화를 위해 본래부터 불교의 인연이 깊었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었고, 이 설은 이후 본격적인 불국토설로 전개되었다. 국가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대중적인 종교로 변모시켰으며, 불교를 통해 사회 안정을 이루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포용하고 융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통일 이후에는 주로 화엄종과 법상종 등의 종파가 유행하였고, 하대에는 선종이 전래되어 구산선문이 형성되는 등 선종 불교가 주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절들이 별처럼 많았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 <삼국사기> 권제3 흥법 제3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갖춤, 경북 경주 나원리,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세기, 1 사리상자>
<앞면에 새겨진 그림>
<뚜껑에 새겨진 그림>
<2 소탑 3 부처>

금동사리엄장구,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신라 8세기
1996년 석탑 보수공사 중 3층 지붕돌 윗면에 마련된 사리구멍에서 나왔습니다. 금동 사리함의 표면에는 촘촘히 찍은 둥근 무늬를 바탕으로 사천왕상이 유려하게 선각되어 있습니다. 사리함 안쪽에 별도의 사리 내함은 없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금동과 나무로 만든 작은 소탑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함께 수습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묵서 지편의 내용과 관련있는 것이어서 무구장경 신앙에 의거하여 석탑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0년)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이 쇠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는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형태이다.

<‘함통육년(8650’명 금고, 1 전 경북,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65년, 청동>
<촛대 2. 출토지 모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9세기, 청동>
<십이지상, 경북 경주 충효동 전 김유신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9세기, 곱돌 1 말>
<십이지상, 경북 경주 충효동 전 김유신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9세기, 곱돌 2 토>
<십이지상, 경북 경주 내남면 전 민애왕릉,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9세기, 곱돌, 3 뱀 4 말>
<월지 출토 의례 유물, 경북 경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9세기, 1 가위 2 손칼 3 둥근판>
<1 가위 2 손칼 3 둥근판>

월지는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궁궐 안에 만든 연회시설이다. 삼국사기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월지를 이르는 설명이다. 이곳에는 연회를 위한 건물뿐만 아니라 종교시설도 있었다. 연못에서 불상을 비롯한 불교용품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아울러 납으로 만든 가위나 손칼과 같은 비실용적인 물건도 있었다. 이를 통해 불교의식뿐만 아니라 무속행위도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국가 권력과 의례
통일신라는 의례를 통해 국가 권력의 정당성과 왕권의 위엄을 과시했다. 도성에서 베풀어진 국가 의례는 왕경인과 지방인에게 왕에 대한 충성과 복속 의식을 그들의 마음 속에서 불러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사찰 역시 국가와 왕권의 위엄을 구현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통일신라는 수도인 경주의 사방 입구에 성전사원이라는 사찰들을 건립하여 수도를 천하의 중심이자 불국토의 중심으로 연출했다. 왕릉과 원찰에서는 왕권의 정당성과 신성함을 강조하는 의례를 거행하여 신라 왕실을 영원불멸을 기원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 때 유물로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담는 돌함과 뼈단지이다. 돌함은 둥근 꼭지가 달린 꽃잎모양의 용기이며 뼈단지는 몸체와 뚜껑에 녹색유약을 입혀서 구운 항아리이다. 뼈단지는 몸통에 점선과 꽃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뼈단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물이다.

<돌함과 뼈 단지, 경북 경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9세기, 돌.녹유, 국보>
<뼈단지>
<청자 뼈 항아리 1 경북 경주 배동 삼릉 부근, 통일신라 남북국시대. 중국 오대, 토제.청자>
<뼈 항아리 2 출토지 모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세기, 토제>
<세발 뼈 항아리, 출토지 모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세기, 토제>
<뼈 항아리, 출토지 모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8세기, 토제>

뼈단지
불교가 삶 속 깊숙이 자리 잡은 통일신라에서는 불교식 장례방식인 화장이 유행하였다. 화장 후 유골은 뼈단지에 담았고, 땅에 묻은 튼튼한 보관함에 넣어 장례를 치렀다. 8세기의 고급스러운 뼈단지는 화려한 도장무늬를 새기거나, 녹유.청유.삼채와 같은 유약을 발랐다. 국력이 쇠퇴하는 9세기 이후의 뼈단지는 이전과 다르게 꾸밈을 없앤 소박한 형태로 서서히 바뀌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