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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백제,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다

백제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왕이 건국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비류는 오늘날 인천지역에 해당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 이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여계통의 세력이 한강유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초기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라고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 위치가 풍납토성, 몽촌토성, 또는 하남의 또다른 지역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풍납토성에서는 대형 집자리.제사관련 건물지.도로 등이 확인되어 초기 백제 도성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서울 풍납토성 (사적)>

풍납토성은 한강 유역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백제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가 3.5km에 달하는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2.2km 정도만 남아 있다. 성벽은 흙을 다져 만드는 판축기법으로 제작하였다. 성 내부에는 대형 건물터.제사 터.창고.우물 등을 발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풍납토성 내부에서 발견되었으며, 토기 중앙에 ‘대부大夫’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 곧은입 짧은목 항아리,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2 벼루>

벼루는 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가는 도구이다.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원형의 벼루는 사비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많이 발견된다. 벼류의 다리는 짐승 발굽 모양을 하고 있어 장식성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돌추, 6~7세기, 충남 부여 동남리>

백제 도성에서는 부피.길이.무게를 측정하는 도량형과 관련된 유물도 확인된다. 백제의 추는 무게 차이가 심하고 배수 관계 등이 일정하지 않아서, 상대적인 무게를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지약아식미기’가 쓰인 목간,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복제품><5 ‘서부후항’이 쓰인 목간, 6~7세기, 충남 부여 궁남지, 복제품>

4 ‘지약아식미기’가 쓰인 목간,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복제품
4면에 글자가 있으며, 약 관련 업무를 담당한 약아에게 식료를 지급한 기록이다. 날짜별로 지금한 식미량 등이 기재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5 ‘서부후항’이 쓰인 목간, 6~7세기, 충남 부여 궁남지, 복제품
‘서부후항’에 사 사달사가 중구 4인, 소구 2인과 매라성 법리원의 수전 오형을 개간했다’라고 적혀 있다. 행정구역과 인명, 호구, 도량형 등 각종 사회 제도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6 ‘좌관대식기’가 쓰인 목간, 7세기, 복제품><7 ‘구구단’목간, 7세기, 충남 부여 쌍북리, 복제품>

6 ‘좌관대식기’가 쓰인 목간, 7세기, 복제품
사람 이름과 빌린 식량, 상, 미 글자가 반복된다. 빌려준 곡물과 돌려받은 곡물 그리고 아직 받지 못한 곡물의 양을 기록하였다. 이른바 환곡제도를 기록한 장부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7 ‘구구단’목간, 7세기, 충남 부여 쌍북리, 복제품
이 목간은 구구법의 공식을 차례대로 적은 이른바 ‘구구단 목간’이다. 첫째 줄에는 상하 방향으로 제곱 값이 적혀 있다. 곱셍이 필요할 때 어디서든 손에 쥐고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 구가단 활용을 알려주는 실물자료이며, 구구단이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려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다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백제는 외부 세력의 침략을 막아 내고 영역을 넓혀 가면서 점차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4세기 중엽 백제는 한강유역을 넘어서 마한 전역을 통합하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이후에는 왕권과 귀족 세력 사이의 균형을 잡고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를 재건하였다. 성왕은 웅진 도성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지방 통치 체제를 강화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펼친 백제는 크게 번영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가 한성에 수도를 정한 기간은 약 500년(기원전18 ~기원후 475)에 이르는데, 이는 백제가 700여년의 역사 중 대부분을 한성에서 보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성백제기 유적으로는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 지역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크고 작은 유적지가 있다. 또한 이 시기 지방세력의 유적으로는 공주 수촌리를 비롯하여 서산, 천안 등 금강유역과 서해안지역, 삼한시대부터 지방세력으로 존재했던 영산강 유역 등이 있다. 한성백제기에 지방을 통치했던 흔적으로는 중앙정부에서 지방세력의 수장들에게 보내준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중국도자기 등 다양한 형태의 위세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리자루 큰칼, 4~5세기, 1 전북 완주 상운리><2 충남 천안 화성리>

둥근 손잡이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 등을 조각하거나 고리에 직접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된 고라자루칼은 주인공의 높은 사회적 신분을 상징한다.

<3 충남 서천 봉선리><4 충남 서천 봉선리>
<5 창, 4~5세기, 경기 오산 수정동>
<6 마름쇠, 6~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7 화살촉, 6~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8 재갈, 4~5세기, 충북 청주 신봉동>
<9 말띠드리개, 4~5세기, 충남 천안 용원리><10 말방울, 4~5세기, 경기 오산 수정동>
<11 발걸이, 4~5세기, 충남 천안 용원리>

왕권 강화
마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였던 백제는 3세기 이후 중앙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관료 제도를 마련하여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통치 체제를 갖춰 갔다. 법령을 정비하고 도성을 비롯한 성곽을 축조해 가는 과정은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백제의 도성이나 왕궁은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다. 백제는 왕권을 강화하며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주변으로 영향력을 키워 갔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제 무기는 백제의 강력한 군사력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 중앙정부는 흡수.통합한 지역의 수장들에게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중국 도자기 등을 내려주며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충성을 요구하였다. 금동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꾸미개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형태는 둥근 고깔모양으로 모자의 뒷부분에 대롱모양의 장식을 달거나, 앞 또는 뒷부분에 화려한 장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금동관모는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천안 용원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 백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야와 일본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백제 왕과 지방수장
벡제 지배층은 화려한 금속 공예품과 중국에서 수입된 도자기와 같은 위세품을 통해 권위를 나타내고자했다.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확인된 무령왕릉에서는 당시 최고 수준의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그중 왕과 왕비의 머리에 쓴 관 꾸미개는 백제 고유의 우아하고 정교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지방 수장들은 왕실보다 격이 낮은 금동으로 만든 관이나 은으로 장식한 큰칼을 착용했다. 한성 시기 백제 지방 수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과 함께 중국제 도자기도 확인되었다. 백제 왕실에서 내려 준 이런 귀한 물건들은 지방 수장의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통제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공주 무령왕릉 내부(모형전시관)>

무령왕비 관장식(국보)은 왕관을 꾸미는 장식으로 머리 양쪽에 꽂을 수 있도록 1쌍으로 되어 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중간에는 꽃무늬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연꽃이 피어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무령왕 관장식에 비해서 간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 웅진기 백제에서는 왕비도 관장식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1 관 꾸미개(왕비), 국보, 6세기, 충남 공주 무령왕릉>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2점이 발견되었다. 약 2mm 내외의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꽂이 부분은 청동으로 따로 만들어다.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받침과 그 위에 활짝 핀 연꽃을 꽂은 꽃병이 있고 주위는 인동초무늬로 장식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금구슬 (왕비), 6세기, 충남 공주 무령왕릉>

왕비 머리와 가슴 부분에서 흩어진 채 발견되었다. 금으로 만든 작은 원형 고리 12개를 서로 맞붙여 공 모양을 만든 장식이다. 고리 3개가 만나는 지점마다 금알갱이를 덧붙였다. 모두 187점이 확인되며, 지름은 0.5 ~ 0.9cm까지 다양하다. 금 함유량은 97.2~99.5%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꾸미개, 6세기, 충남 공주 무령왕릉, 3 꽃모양 은꾸미개><4 꽃모양 금꾸미개><5 원형 금꾸미개>

금과은으로 만든 꾸미개이다. 원형 금꾸미개와 꽃모양 금꾸미개는 금실을 꼬아 만든 달개가 달려 있다. 이러한 꾸미개들은 구멍이 뚫려 있어 옷이나 천에 붙여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공주 무령왕릉, 6세기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년)과 왕비의 무덤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원에 있다. 이 무덤은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내부에서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5,2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신라.중국 남조.일본 왜와 교류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무늬벽돌돠 도자기, 청동거울, 귀걸이, 나무널 등이 발견되어 백제 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수촌리 고분군(사적)은 공주에 위치하고 있지만 웅진기 백제 고분은 아니고 한성 백제기 웅진지역 지방세력의 무덤들이다. 공주에서 금강을 지나서 차령고개를 넘어 천안으로 연결되는 23번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공주 수촌리 지역은 웅진백제기와는 달리 금강 이북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공주의 유력한 세력들이 한성 백제와는 우호적인 관계였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공주 수촌리 고분(사적)>

백제의 금동관모는 지방 유력세력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금은장신구나 중국 도자기 등과 함께 출토되고 있다. 중앙에서 지방세력에게 보내준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마한 지역을 통합해나가는 한성백제기 유적에서 주로 출토된다

<6 관모,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금동으로 만든 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지배자의 무덤에서 출토된다. 형태는 둥근 고깔 모양으로 모자의 뒷부분에 대롱 모양의 장식을 세우기도 하였다. 백제가 마한의 세력을 통합해 가는 시기의 지방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7 신발, 4~5 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좌.우측에는 凸자무늬를, 바닥에는 연꽃무늬와 용무늬를 맞새김해 화려함을 더했다. 신발안에서 무덤 주인의 발 뼈 일부가 함께 발견되어, 신겨진 채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공주 수촌리 유적, 4~5세기
공주 수촌리 유적은 한성 도읍 시기에 웅진지역을 지배한 세력의 무덤이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이 발견되어 백제 무덤이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 보여준다. 무덤에서 나온 금동관모, 금동신발, 중국제 자기, 고리자루 큰칼 같은 위세품들을 통해, 이 지역에 만들어진 지방 수장의 무덤 중 가장 격이 높은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검은간토기, 4~5세기, 1 서울 몽촌토성>
<2 충남 천안 용원리>
<3 경기 성남 판교>

1~3 검은간토기, 4~5세기
그릇의 표면에 검은색 광택이 나게 만든 토기로, 한성 시기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일상생활에 사용한 토기가 아닌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을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은 삼국시대 백제 토착세력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4개의 큰 봉분이 남아 있으며 발굴.조사결과 32기의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독무덤, 굴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으로 다양하며 4세기부터 7세기초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제신발, 관모, 고리자루큰칼 등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나주 복암리 3호 무덤>
<4 신발, 6~7 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나주 복암리 3호 무덤은 하나의 봉분에서 독널무덤과 돌방 무덤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확인되어, 영산강 유역 고대 문화의 무덤 변화를 잘 보여준다. 특히 독널무덤에서 사비식 석실무덤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갔음을 나타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5, 6 관꾸미개, 6~7세기,5 충남 부여 화황리><6 충남 부여 능산리, 복제품>


6세기 이후 백제 지방에 있는 고분도 중심지와 같은 사비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어 간다. 또한 중앙의 관등 위계에 따라 쓰도록 정해진 은으로 만든 관 꾸미개와 허리띠 장식이 등장한다. 백제 관리의 복식 체제를 보여주는 이런 유물이 나타나는 것은 지방 세력이 중앙의 정치 체제에 포함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7 관모테>
<8 허리띠 꾸미개>

7,8 남해 남치리 무덤 출토품, 7세기
백제의관등 복식과 관련된 유물로, 경상남도 남해에서 발견되어다. 당시 남해는 바닷길을 이용한 교통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남해안 지역까지 확대된 백제의 영항력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9 허리띠 꾸미가,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1 금귀걸이,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2 금귀걸이, 4~5세기, 충북 청주 신봉동, 전맘 곡성 방송리, 충북 청주 주성리, 충남 서산 부장리>
<3 유리목걸이,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푸른색 구슬은 목 부분에서 수습된 것으로 보 아 목걸이로 사용했으며, 붉은색 구슬은 머리 부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머리 장식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반지, 4~5세기, 충남 공주 금학동><5 팔찌, 4~5세기, 충남 공주 금학동><5 팔찌, 4~5세기, 충남 공주 소학동>
<6 목걸이, 4~6세기, 천마 영암 신면리,, 천남 영암 옥야리>

독널무덤에서 발굴되었으며, 새발자국 무늬가 항아리 전체에 새겨져 있다.

7 항아리, 4세기, 전남 영암 만수리
<8 귀달린 항아리, 4~5세기, 전남 무안 사창리>
<9 넓은입 항아리, 4~5세기, 전남 나주 금곡리>
<10 병,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지방운영
삼국의 대치 속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국가의 생존과 발전에 중요한 문제였다. 백제는 왕권 중심의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지방 세력들을 차례로 통합해 나갔다. 한성 시기에는 통합된 지역의 세력가에게 금동 관이나 신발, 중국제 자기와 같은 귀한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영향력을 과시했다. 사비 시기 여러 지역에서 은으로 만든 관장식이 확인되는데, 이는 중앙의 지방 지배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4세기 후반 백제가 통합한 영산강 유역에서 죽은 사람을 항아리에 넣어 묻는 옹관 문화가 이어지다가, 6세기 중엽 이후 돌로 방을 만들고 흙을 쌓아 묻는 사비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청자 뚜껑 항아리,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몸체 윗부분에 4개의 귀가 붙어 있는 청자 항아리다. 꼭지 손잡이가 있는 뚜껑에는 유약이 떨어져 나가 일부에만 남아 있다. 중국 남조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흑유 닭모양 항아리,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닭모양 항아리는 중국 서진부터 남조까지 사용하였다. 시기에 따라 둥근 몸체가 점차 타원형으로 바뀌어 목이 길어진다. 백제 왕실에서 수촌리 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청자잔>
<4 흑유병>
<5 세잎장식 고리자루 큰칼,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5 세고리장식 큰칼,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손잡이 부분>

5 세잎장식 고리자루 큰칼, 4~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삼국시대 고리자루 큰칼은 무력을 상징함과 동시에 자루 끝을 다양하게 장식하여 주인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 이 칼은 둥근 고리자루 안에 세잎장식을 표현했으며, 손잡이 끝부분에는 은으로 상감 무늬를 넣어 화려함을 더했다. 칼날에서는 옻칠한 칼집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5 세고리장식 큰칼,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자루 끝에 ‘C’자형의고리 세 개를 만들고 짐승 얼굴을 표현했다. 세고리장식 큰칼 둥 짐승 얼굴을 표현한 것은 출토된 예가 드문 편이다. 짐승 얼굴은 뿔과 눈, 코, 이빨 등을 나타냈으며 도금하여 장색했다. 손잡이는 용 문양을 새긴 은판을 감아서 화려하게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 왕과 지방수장
벡제 지배층은 화려한 금속 공예품과 중국에서 수입된 도자기와 같은 위세품을 통해 권위를 나타내고자했다.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확인된 무령왕릉에서는 당시 최고 수준의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그중 왕과 왕비의 머리에 쓴 관 꾸미개는 백제 고유의 우아하고 정교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지방 수장들은 왕실보다 격이 낮은 금동으로 만든 관이나 은으로 장식한 큰칼을 착용했다. 한성 시기 백제 지방 수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과 함께 중국제 도자기도 확인되었다. 백제 왕실에서 내려 준 이런 귀한 물건들은 지방 수장의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통제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
백제百濟는 기원 전후,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이주민들이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점차 마한의 여러 소국을 통합하면서 고대 국가로 성장했다. 그 후 웅진, 사비로 수도를 옮기면서 독창적인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한성 시기에는 국가 조직을 정비하고 왕권 중심의 고대 국가 토대를 갖춰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3세기에는 마한의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가 되었고, 4세기에는 영토도 넓어지고 국제적 지위도 올라갔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국력이 약해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무령왕 때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일본과의 외교에 힘써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백제 문화가 가장 크게 번성한 때는 사비 시기였다. 생산 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성과 사찰, 능묘를 중심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문화가 발달했다. 백제는 중국 남북조 국가를 비롯해 신라, 가야, 왜 등 주변 국가와 활발히 교류하며 고대 동아시아 문물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2.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