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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백제, 세련된 문화를 꽃피우다

백제는 성왕때인 538년에 현 부여지역인 사비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백마강이라 불리는 금강 남쪽해안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도성을 쌓았다. 또한 부소산성 입구에 해당되는 관북리 지역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백제의 옛 도읍이었던 부여에는 중앙의 정림사지와 도성 바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궁남지와 부소산성을 제외하고는 유적지라고 느낄 만 곳은 실제로 많지는 않다. 하지만 도성 동쪽편 왕릉이 있었던 능산리를 비롯하여 도심과 외곽에 여러 절터들이 있으며, 이들 절터에서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사비기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높은 문화와 기술 수준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백제는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유물이다.

<치미, 6세기, 충남 부여 왕흥사 터>

치미는 기와 건물 지붕의 용마루 양 끝에 자리한 큰 장식 기와를 말한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 신성한 새 또는 물고기의 형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왕흥사 치미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치미로, 사찰에서 승려들이 묵었던 방으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해 위.아래로 잘라낸 후 가마에서 구워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치미는 상부, 북쪽의 치미는 하부만 남아 있어서 각각 3D기술을 통해 복원하였다. 지붕 끝에 얹혀 날아갈듯 한 생동감 있는 모양에 연꽃무늬, 구름무늬, 풀과 가지무늬 등을 새겨 넣었다. 지붕의 장식을 위엄을 갖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기와 장인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는 부여에서는금강변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도성을 쌓았다. 도성은 관북리에 위치한 왕궁을 중심으로 남쪽에 동서-남북방향의 도로가, 부소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 도성은 금강과 부소산 등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나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성 내부는 중.상.하.전.후부의 5부(府)로, 부는 다시 항(巷)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전부’ 등 행정구역 명칭이 새겨진 돌과 기와.목간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부소산성 아래 옛 부여현 관아가 있던 관북리 일대>
<1 수도관, 6세기, 충남 부여 관북리>

사비 도성에서 사용되었던 수도관이다. 수도관은 수키와를 연결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유물처럼 수도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경우도 많다. 틀에서 분리한 원통 모양의 수키와를 절반으로 가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거나, 일반적인 수키와에 비해 더 길게 만들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소상’ 글자를 새긴 토기, 6세기, 충남 부여 관북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이다. 수키와를 활용한 토관에 연결하여 흘러온 물이 안에 고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위쪽에는 뚜껑을 덮거나 연결할 수 있도록 턱이 있으나, 출토 당시에는 거꾸로 바닥에 묻어둔 상태였다. ‘소상小上’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작은 구멍이 위쪽’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흙으로 만든 굴뚝, 6세기, 충남 부여 쌍북리>

왕궁의 건물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구들을 시설하는 경우가 많으며,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굴뚝을 세웠다. 굴뚝 안으로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서까래에 그을음이 앉는 것을 막기 위해 뚜껑을 설치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대통’ 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대통大通은 중국 양나라 무제가 527년부터 529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백제의 사비 천도가 538년인데, 그보다 빠른 시기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은 부소산성이 천도 이전부터 축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기와, 6~7세기, 충남 부여>
<2 벽돌, 6세기, 전 충남 공주>

웅진 시기 백제는 중국 남조와 활발히 교류했고 그 영향으로 양나라의 무덤 형식인 벽돌무덤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무덤은 무령왕릉이다. 벽돌의 형태는 직사각형과 사다리꼴, 삼각형 등 다양하다. 벽돌의 측면에는 연꽃무늬나 동전무늬, 넝쿨무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벽돌은 금강의 물길을 이용해서 공주 송산리 일대로 운반되어 무덤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수막새, 6~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전북 익산 미륵사 터, 충남 부여 왕흥사 터>

사비 시기 건물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와를 사용했다. 막새기와는 바람개비무늬.동전무늬.연꽃무늬 등 다양한 무늬를 장식해 사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동전무늬 수막새, 4~5세기, 서울 석촌동>
<5 바람개비무늬 수막새, 7세기>
<6 수막새, 6~7세기>

백제의 기와는 웅진기와 사비기를 거치면서 연꽃무늬를 주로 하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 확립된다. 웅진기에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기술의 바탕위에 새로이 남조 양의 기와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이전과는 다른 기와를 제작하였다.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도성 안팎에 많은 사찰이 세워짐에 따라 기와제작도 활발해졌으며 양식도 다양해졌다. 

<7 연꽃무늬 서까래 막새, 6~7세기, 충남 부여 정림사터, 충남 부여 정림사 터>
<7 연꽃무늬 서까래 막새, 6~7세기, 충남 부여 정림사 터
전 충남 부여>

여러 개의 연꽃잎을 배치하고, 꽃잎 안에는 다서 잎의 인동초로 장식했다. 자방 한 가운데에는 서까래에 고정하기 위한 못 구멍이 있다. 테두리에는 톱늬무늬를 두르고 둥근 점을 연속으로 배치했는데, 막새 제작에 나무로 만든 틀을 사용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8 연꽃무늬 수막새, 6~7세기, 충남 공주 공산성, 전북 익산 왕궁리, 충남 부여 구아리, 충남 부여 동남리, 전 충남 부여, 충남 부여 정암리, 전 충남 부여>
<8 연꽃무늬 수막새, 6~7세기, 충남 공주 공산성, 전북 익산 왕궁리, 충남 부여 구아리, 충남 부여 동남리, 전 충남 부여, 충남 부여 정암리, 전 충남 부여>
<8 연꽃무늬 수막새, 6~7세기, 충남 공주 공산성, 전북 익산 왕궁리, 충남 부여 구아리, 충남 부여 동남리, 전 충남 부여, 충남 부여 정암리, 전 충남 부여>
<8 연꽃무늬 수막새, 6~7세기, 충남 공주 공산성, 전북 익산 왕궁리, 충남 부여 구아리, 충남 부여 동남리, 전 충남 부여, 충남 부여 정암리, 전 충남 부여>

불교가 널리 확산된 사비 시기에는 연꽃무늬 수막새를 많이 사용하였다. 관북리 유적과 왕궁리 유적 같은 왕성 구역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연꽃무늬 수막새가 7세기까지 제작되었다. 왕성의 건축에 지속적인 관리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건축문화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은 도성과 사찰에서 잘 드러난다. 한성 시기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의 성벽은 진흙과 모래 등을 번갈아 다져 가며 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 기술은 백제의 성곽이나 목탑의 기단, 둑 등을 쌓을 때 폭넓게 이용되었다. 사비 도성은 도읍을 옮기기 전부터 도시 계획을 수립하여 방어를 위한 나성을 비롯해 왕궁.관청 등을 만들었다. 특히 물길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만든 체계적인 수도 시설은 당시 건축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 준다.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에는 정림사와 왕흥사, 미륵사 등이 있다. 이 사찰들은 백제의 우수한 건축 기술과 독창적인 건물 배치 방식을 보여 준다. 백제의 건축 기술은 이후 왜에 전해져 일본의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 불교는 4세기 중국 남조 동진으로부터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전래되면서 시작하였다. 웅진기 백제 때에는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국보),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상(국보)같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지만 공주에는 큰 사찰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백제 불교는 성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정림사를 세우면서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이후 도성에는 왕흥사지, 능산리사지, 부소산성사지 등에 크고 작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무왕 때에는 익산지역에 미륵사, 제석사같은 사찰들이 도성 역할을 했던 왕궁리유적과 함께 세워졌다.

<1 보살, 6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2 부처, 6세기, 충남 부여 정림사 터>

1 보살, 6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능산리 절터 목탑지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보살상이다. 본래는 좌상으로 전체 높이 50cm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아 무언가를 들고 있는 형상이다. 목에는 끝이 뾰족한 둥근 목걸이를 걸고 있으며 천의가 바람에 날리듯 왼쪽으로 나부끼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좌우대칭을 벗어나 자연스런 표현이 주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부처, 6세기, 충남 부여 정림사 터
흙으로 빚은 부처로 머리만 출토되었다. 목의 아랫 면에 확인되는 구멍은 머리와 몸체를 서로 연결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숙세’가 쓰인 목간, 6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목간으로, ‘숙세결업동생일처 시시방문상배백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생의 업에 의해 인연을 맺게 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삼국시대 건축을 대표하는 유물이자 회화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여 외리 절터에서 출토된 여덟 종류의 무늬벽돌이다. 이 네모모양의 벽돌은 크기가 일정하고, 네 귀의 측면에 홈이 파여 있어서 서로 연결하여 고정시킬 수 있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들은 회화성이매우 뛰어나 당시의 예술과 건축, 종교와 사상적인 측면까지 살펴 볼 수 있다. 산수문전.산수봉황문전,연대귀문전.반용문전.와운문전.연화문전의 8매로 이루어진 벽돌에 새겨진 그림은 사비기 백제인을 사로잡았던 도교적인 풍경이 잘 그려져 있으며,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도깨비 그림 또한 벽돌에 새겨져 있다.

산수 짐승얼굴무늬 벽돌, 산수귀문전이라고 불리며, 하단부에 산수의 배경을, 상단부에 물결무늬의 구름위에 둥근 바위를 딛고 서 있는 도깨비 무늬가 그려져 있다. 

<4-1 산수 짐승얼굴무늬 벽돌>

연꽃무늬벽돌, 연화문전이라 불리는 이벽돌은 구슬을 이은 타원형에 연봉무늬가 있고, 원 중심의 씨방이 크며 이를 중심으로 10개의 꽃잎이 있다. 꽃잎마다 덩굴무늬를 새겨놓았다.

<4-2 연꽃무늬 벽돌>

연꽃 짐승얼굴무늬 벽돌, 연대귀문전이라고 불리며, 연꽃모양으로 만든 대좌위에 도깨비가 서있다. 치우천왕에서 독아비, 도깨비로 변천한 그림 중 삼국시대인들이 생각한 도깨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3 연꽃 짐승얼굴무늬 벽돌>

산수봉황무늬벽돌, 산수봉황문전이라고 불리며, 구름과 봉황이 있는 벽돌로 상단에 삼산형 봉우리가 솟아있고, 하단에는 산수풍경을 새겼다.

<4-4 산수 봉황무늬 벽돌>

 용무늬벽돌, 반용문전이라고 불리며, 구슬을 꿰어서 이은 타원형의 띠안에 S자 모양의 용이 새겨져 있다.

<4-5 용무늬 벽돌>

봉황무늬벽돌, 봉황문전이라고 불리며, 원안에 우아한 자태의 봉황 한마리를 배치한 모습이다.

<4-6 봉황무늬 벽돌>

연꽃구름무늬벽돌, 와운문전이라고 불리는 이벽돌은 연꽃무늬의 작은 원심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8개의 와운문이 원을 이루고 있다.

<4-7 연꽃 구름무늬 벽돌>

산수무늬벽돌, 상단에 상서로운 구름이 떠가며, 중단에는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있고, 하단에는 물이 있다. 전체적으로 규칙적인 배열이며,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균형잡힌 구도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제시대 산수화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유물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함께 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유물이다.

<4-8 산수무늬 벽돌>
<무늬벽돌 출토 당시 모습>

4 무늬 벽돌, 7세기, 충남 부여 외리 절터
부여 외리 절터에서 발견된 벽돌로 산수풍경, 산수봉황, 연꽃도깨비, 용, 봉황, 연꽃, 연꽃구름의 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가 일정하고, 네 귀의 측면에 홈이 파여 있어서 서로 연결하여 고정시킬 수 있다. 출토 당시 바닥에서 일렬로 발견되었다. 도교적 이상향과 상서로운 동물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 등을 가진 무늬가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어 백제 미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그릇받침, 1 경기 포천 저작리>
<2 전북 부안 죽막동>
<3 전 충남 부여>

1~3 그릇받침
그릇받침은 실생활보다는 의례행위 때 사용된 것으로, 공양물을 담은 바닥의 항아리를 올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성 시기부터 사비 시기까 백제 문화권 주요 유적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제사용 그릇받침이 확인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부안 죽막동 유적'(사적)은 변산반도 서쪽 끝 해안절벽에 위치한 해양제사유적이다. 이곳은 한반도 남서해안을 통해 연결된 한.중.일 해상교통로를 지나는 선박들의 안전운행을 기원했던 곳으로 해양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변에서 고대 이래 제자를 지내면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3~7세기 삼국시대 때 해양제사가 성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안 죽막동 유적(사적)>

삼국시대 해양 제사터, 부안 죽막동 유적
부안 죽막동 유적은 삼국시대 해양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바다를 향해 돌출된 변산반도 끝에 위치하고 있다. 부안 앞바다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오가는 배들의 연안 항로였으며, 조류가 심해 일찍부터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유적에서 확인되는 여러 공헌물을 통해 가야와 중국 남조, 왜의 사람들도 제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4 거울, 5~5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
<5 본뜬 석기, 5~6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
<5 본뜬 석기, 5~6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
<5 본뜬 석기, 5~6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는 도끼, 낫, 곱은옥, 손칼, 거울 등을 돌을 이용해 작게 만든 의례용품이 여러 점 확인되었다. 몸체 중앙이나 끝 부분에 작은 구멍이 1~2개 뚫려 있는데, 제사를 지낼 때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본뜬 석기는 우리나라보다 일본 고훈시대 제사 유적이나 고분에서 많이 확인된다. 백제와 왜가 부안 죽막동 유적 해양 제사에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6 본뜬 철기, 6~7세기, 충남 부여 논치>
<7 덩이쇠,6~7세기, 충남 부여 논치>

부여 논치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덩이쇠로 제사 봉헌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8 손잡이잔, 4~5세기, 서울 몽촌토성><9 굽다리 접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10 세발접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4~5세기, 서울 몽촌토성, 6~7세기, 충남 보령 노천리>
<10 세발접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4~5세기, 서울 몽촌토성, 6~7세기, 충남 보령 노천리>
<뼈단지, 6세기, 충남 부여 관북리>

화장은 불교식 장례 방법으로 시신을 불에 태운 후 남은 뼈를 그릇에 담아 묻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수용과 함께 삼국시대 장례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백제 화장묘는 정치적.문화적으로 안정기인 사비 천도 이후 승려와 귀족 사회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화장묘에 사용된 뼈단지는 모두 뚜껑이 있으며, 납작한 바닥에 회색빛이 도는 토기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의 무덤 형식은 초기에는 고구려 돌무지무덤이었지만 이후 중국 북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돌방무덤이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했던 웅진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이 사용되기도 했다. 백제의 왕릉이나 지배층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공주 무령왕릉이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의 능묘제도나 당시 사람들의 사상, 대외교류 관계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사적)

돌무지무덤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주로 한강 유역에서 확인된다. 서울 석촌동 무덤이 대표적이며 백제 초기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공주 무령왕릉 내부(모형전시관)>

벽돌무덤
벽돌을 쌓아 만든 긴 네모 모양의 터널식 널방무덤으로 중국 남조로부터 받아들인 무덤 형식이다. 공주 송산리 6호 무덤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부여 왕릉원(사적) 1호 무덤 내부(모형)>

돌방무덤
네모 모양의 돌방 한쪽에 출입 시설을 만든 무덤으로 추가 매장이 가능하다. 사비 시기에는 평평한 천장이 유행하는데,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도 등장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영산강 유역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는 독널무덤>

독널무덤
거대한 독널을 만들어 매장한 무덤이다. 영산강 유역 주변에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유행했으며, 나부 반남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종교와 사상
백제는 고대 국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사성적 기반이 필요했다. 건국 초기에는 시조가 되는 조상신과 하늘에 있는 천신, 땅에 있는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점차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불교는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후 크게 유행했다. 국가 주도로 많은 사찰과 의식용구들이 만들어졌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도교는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에서 환영받았다. 금동대향로.산수무늬 벽돌 등에서 도교가 성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세련된 문화를 꽃피우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백제 문화의 특징을 잘 말해 준다. 백제 문화는 석촌동 고분군에서 보이듯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중국 남조와 교류하면서 부드럽고 세련된 독자적 양식을 만들어 냈다. 백제 사람들은 고유의 전통 위에서 개방적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갔다. 이렇게 독자적인 문화를 만드는 데는 특히 불교와 도교 등 종교의 역할이 컸다.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사비 시기에 많은 사찰을 세웠고 정교한 불교 공예품을 만들었다. 백제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다양한 공예품은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며 세련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는 종래의 전통적 기반 위에 우수한 기술을 도입하여 토기.철기 등 생산 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토기는 세발접시.굽다리접시.검은간토기 등이 제작되어 이전까지와는 다른 모양과 기술이 선보인다. 기와는 지금까지의 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동전무늬 수막새 등 막새기와는 주로 한성기의 도읍에서 출토된다

<바리>
<곧은입 항아리>
<큰항아리>
<곧은입 항아리>
<납작바닥 항아리>
<곧은입 항아리>
<곧은입 항아리>
<항아리>
<항아리>
<항아리>
<항아리>
<손잡이잔>
<뚜껑>
<굽다리 바리>
<굽다리 바리>
<항아리>
<항아리>
<병>
<병>
<접시>
<전달린 그릇>
<전달린 그릇>
<굽다리 접시>
<굽다리 접시>
<손잡이 달린 항아리>
<시루>
<항아리>
<세발접시>
<세발접시>
<굽다리 항아리>
<그릇받침>
<병>
<호자>
<장군>
<장군>

백제 토기
우수한 기술로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백제 사람들은 다양한 일상 생활에 여러 종류의 토기들을 사용하였다. 또한 제사와 같은 각종 의례를 위한 특수한 토기들도 제작하였다. 백제 토기는 물레와 가마를 이용해 만들었다. 도성 내 건물터에서 같은 모양의 토기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대량으로 토기를 생산하고 유통했던 당시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생산 경제의 발달
백제의 장인은 금.은.구리.철 등의 금속 제품을 비롯해 유리.토기.기와 등 다양한 제품을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각종 귀금속과 철기를 생산하는 공방은 특정한 장소에서 집단으로 운영되었다. 부여 관북리 유적이나 쌍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 등과 미륵사지에서도 공방터가 확인된다. 백제의 공방 터에서는 도가니, 거푸집과 같은 제작 도구와 생산 재료가 함께 발견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다양한 경제생활을 하다
백제는 우수한 철기 생산 기술로 다양한 농기구를 만들었고, 발달된 토목 기술로 대규모 저수지와 농지를 확보했다.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이는 나라의 힘을 키우는 바탕이 되었다. 철기나 토기, 유리 등을 생산하는 작업장인 공방에서는 전문 기술자인 장인이 다양한 수공업 제품을 만들었다. 공방에서 생산된 제품은 유통망을 따라 중앙과 지방각지로 공급되었다. 사비 시기에는 관영 수공업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는데, 그곳에 소속된 장인 중에서 뛰어난 사람은 박사라는 호칭을 받기도 했다. 특히 건축이나 기와 제작 솜씨가 뛰어난 백제 장인은 신라와 왜에 파견되어 숙련된 기술을 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는 중국 산동성에서 일본 오사카로 이어지는 한.중.일 해상교역로에서 중심적인 곳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 신라와는 달리 국제규류와 무역이 활발하였다. 고조선과 낙랑이 가지고 있던 해상교역로에서의 역할을 백제가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남쪽으로 물러나야 했던 웅진기와 사비기 백제는 경제적인 요인과 함께 정치.군사적인 동기로 중국 남조, 일본과 밀접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와 부여, 익산 등지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와 동전,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목간 등이 출토되고 있다.

<1 청자 호자, 3~4세기, 전 개성>

호자는 중국 육조시대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호자 역시 서진 말에서 동진 초기에 제작되어 수입된 것이다. 개성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호자는 주구에 호랑이 얼굴이 표현되고, 몸체에 4개의 별과 함께 손잡이가 부착되어 이동에 용이하다. 백제 귀족층이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청자 벼루, 6세기, 전 충남 부여>

벼루는 사비 시기 왕궁과 절 터 유적에서 많이 출토된다. 특히 청자 벼루는 중국에서 직접 수입된 것으로 백제 상류층의 문자 생활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청자 사발, 충남 천안 용원리>
<4 흑유 바른 사발>
<5 흑갈유 바른 단지>

3~5 중국 도자기
백제는 중국과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교류하며 다양한 문물을 수입했다. 특히 청자와 같이 귀한 물건들은 원산지에서 유행한 시기와 큰 차이 없이 수입되어 상류층이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6 청자 넓은입 항아리, 4세기, 충남 천안 화성리>

천안 화성리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중국 동진 월주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옛 월국의 땅이었던 중국 위야오, 상위, 샤오싱 일대의 가마들은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로 월주요 또는 월요라고 불렀다. 4세기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7 청자 양모양 그릇, 4세기 강원도 원주 법천리>

청자 양모양 그릇은 중국 동진에서 제작해 수입되었다. 난징 주변의 동진 시대 묘에서 이러한 그릇들이 만히 출토된다. 한성시기 백제는 지방 세력가에게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을 위세품으로 하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백제 사신의 모습, 양직공도>

양직공도 6세기
양직공도는 중국 남조 양나라 원제가 왕자 시절인 539년에 그린 글미이다. 양나라에 조공하러 온 각국 사신의 모습과 함께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속 백제 사신은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와 폭이 넓은 바지를 입고, 관모를 쓰고 검은 신을 신고 있다. 백제의 사회상과 함께 중국과의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8 청동 도장, 6세기, 전북 고창 오호리>

‘복의장군지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이다. 전서체를 사용하여 세로로 2자씩 새겼다. 중국 남조 양나라의 관인과 유사하다. 출토 당시 표면에 직물과 목재 흔적이 확인 되었는데, 직물로 싼 다음 나무 상자에 담아 무덤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9 청동 자루솥,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9, 10 청동 자루솥,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자루솥은 중국에서 유행한 의기의 일종이다. 손잡이가 길고 세 개의 다리가 달린 솥의 형태로, 주로 술이나 약 등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사용했다. 풍납토성 출토품도 중국과의 교류관계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자루솥은 왕이나 귀족, 지방 수장과 관련된 유적에서 출토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1 뚜껑접시, 6~7세기, 전 충남 공주, 전남 나주 복암리, 전남 나주 복암리, 전남 나주 복암리, 전남 나주 복암리>
<11 뚜껑접시, 6~7세기, 전 충남 공주, 전남 나주 복암리, 전남 나주 복암리, 전남 나주 복암리, 전남 나주 복암리>

11 뚜껑접시, 6~7세기
스에키는 우리나라에서 왜에 전해진 토기 제작 기술에 의해 5세기 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토기 제작 기술 교류를 통해 스에키의 영향을 받은 토기들이 백제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꼭지가 없는 백제의 뚜껑접시는 스에키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2 넓은입 구멍 단지, 5~6세기, 광주 산정동, 광주 동림동, 광주 연산동, 광주 산정동, 전남 나주 복암리>

12 넓은입 구멍 단지, 5~6세기
넓은입 구멍 단지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고루 확인되지만,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주로 의례용기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여라 나라와 문화를 교류하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면서 국제적 입지를 다졌다. 일찍부터 바닷길을 개척해 중국 여러 왕조의 다양한 문물을 수입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문화 수준을 높이면서 독창적인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동진을 비롯한 남조로부터 도자기와 함께 벽돌무덤과 같은 양식도 받아들였다. 백제는 이웃한 신라와 가야, 왜와도 서로 문화를 주고 받으며 동아시아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왜에 불교를 전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일본 고대 아스카 문화가 성립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2.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