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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1962-2),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1962-2)이다. 이 불상은 높이 93.5 cm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유상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고미술상으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모양 관(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원형에 가까우며 눈과 입가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등 제작수법과 조형미가 뛰어난 걸작이다. 삼국시대 후반기인 7세기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았다. 청동을 덧대어 수리한 부분이 일부 있는데 그 솜씨 또한 아주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1962-2)>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상의 협시보살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단독 불상의 형태로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5세기말 운강지역에서 미륵불과 삼존상의 협시보살이 형태로 나타나며, 6세기 북제(北齊)에서 크게 성행했다. 한반도에서는 서산 용현리마애삼존여래상(국보)에서 왼쪽 협시불로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본 모습>

얼굴을 곡선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원형에 가까운 계란형을 하고 있으며, 목에는 두줄의 목걸이를 걸고 있다. 산모양의 둥근 관을 쓰고 있아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이라고도 부른다.

<얼굴 부분>

하반신을 덮은 치맛자락을 얇고 표현하여 신체 굴곡이 잘 드러나 있으며, 연꽃모양 대좌를 덮고 있는 옷자락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랫 부분>

머리에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미륵보살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머리 뒤쪽에 긴촉이 달려 있어 광배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에게 구입하였다. 출토 위치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지만, 경주 오릉 부근의 절터, 경주 남산 서쪽 선방사터 부근으로 추정한 의견이 있다.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인 모양을 한 보살의 보관 형태는 옛 신라지역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이는 것이며, 치장하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서 중국 북제 불상의 양식이 엿보기이 때문에 7세기 전반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원통형 의자의 바닥 두 곳과 연꽃을 밟고 있는 왼발 앞부분에는 별도의 청동을 덧대어 수리하였다. 수리 부위가 넓은데도 불구하고 솜씨좋게 처리하여 수리된 부분을 쉽게 알아볼 수 없다. 이 반가사유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실패를 모르는 기술력이 아니라 문제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이라 할 만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이 반가사유상과 거의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복제)이다. 백제 또는 신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류지는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사찰이며 불상을 새긴 목재는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붉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세련된 조각솜씨로 볼 때 백제불상이라는 견해도 많다.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복제)>

신라를 대표하는 걸작인 2점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교대로 전시되어 왔었는데 ‘사유의 방’을 조성하면서 큰 방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962-2)’,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