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며, 부처가 깃든 성스러운 곳으로 예배와 수행의 대상이다. 탑을 세우는 것은 부처의 진리를 널리 세상에 보이는 과정이기에 불교의 융성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불교미술 조형품의 백미로 자리잡았다. 특히, 통일신라 때 조성된 많은 석탑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불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탑 내부에 많이 모셔졌으며, 이들 사리갖춤들은 오늘날까지 석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경주박물관에서는 황룡사 목탑터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을 비롯하여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ㄱ’자 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사방에서 맞추어 만든 석탑 1층 몸돌이다. 두 개의 돌이 맞닿은 면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이 있고, 문 양쪽에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신을 하나씩 새겼다. 상투를 튼 신상은 팔이 네 개로, 윗옷은 벗은 채 짧은 치마를 입고 악귀나 바위 위에 서 있다. 송곳니를 드러내거나 삼지창, 금강저, 도끼, 긴 칼 등을 지닌 상도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석탑 몸돌 4면에 문 모양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 문에는 각각 문고리를 달았는데,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아래에는 2단의 몸돌 받침이 있어 석탑의 1층 몸돌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석탑의 지붕돌 윗면에 얕은 단은 위층의 몸돌로 지붕돌과 같이 한 개의 돌로 만든 것이다. 지붕돌은 3단의 지붕 받침이 있으며, 낙수면은 완만하고 처마가 짧으며 곡선은 수평에 가깝다. 처마 끝에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지붕돌과 위층 몸돌을 한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 위에 한 단의 몸돌 받침이 있고, 받침 위 몸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이 얕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처마 곡선은 끝에서 살짝 반전되었으나, 낙수면은 두툼하고 지붕돌 받침은 3단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처마 끝 풍탁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석탑 몸돌 윗면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공을 둥글게 파놓았다. 각 모퉁이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건물의 기둥 모양을 탑에 표현한 것이다. 처음 석탑을 세울 때는 각 층마다 서로 다른 돌로 기둥과 벽면을 만들었지만, 점차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겨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 때 조성된 많은 석탑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통일신라 석탑에서는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사리갖춤에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이 포함되는데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탑을 발원한 사람의 바램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구성을 하고 있다.
알맞은 신체 비례와 균형 잡힌 몸매,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옷 주름은 통일신라 전성기 불사으이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불상 대좌는 2단의 팔각 받침 위에 귀쪽을 갖춘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되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 불상 대좌의 장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뒷면 몸통에 촉이 있는데,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불교 경전을 돌에 새긴 것으로, 경전은 필사본, 인쇄본과 더불어 돌에 새긴 형태로도 전한다. 석경은 오랫동안 보존된다는 의미가 있어 그 자체가 예배 대상이 되었다. 이 석경편은 <금강반야바라밀경>에 나오는 “온갖 상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는 구절의 일부를 담고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연기법송 중 한 구절인 ‘만물이 인연에서 생겨난다.’라는 구절을 새긴 두 장의 은판이다. 각 판의 글씨가 달라 서로 다른 사람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 연기법송은 불상이나 탑 안에 봉안하는 법사리로, 황룡사 찰주본기에 기록된 ‘872년 추가로 봉안한 법사리 2종’으로 추종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8세기 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전래된 이후, 경전을 근거로 사리장엄구에 99기 또는 77기의 소탑을 함께 봉안하였다. 소탑은 ‘무구정소탑’이라 부르며 신라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이 공양탑 역시 석탑 안에 넣은 것으로, 다양한 모양의 삼층석탑으로 표현하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황룡사 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이 보살상은 오른쪽 턱 밑에 손가락을 대었든 흔적인 작은 돌기가 남아 있어서 반가사유상의 얼굴로 추정된다. 아이 같은 인상을 주는 통통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같이 3면이 둥근 산 모양인 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앙의 대상
불교사원은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사회 통합을 꾀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지만 본래 기능은 신앙 활동이었다. 사원에 안치한 부처와 불법을 상징하는 성물 및 조형물은 종교의 힘을 지닌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부처의 모습을 나타낸 불상, 사리를 모시는 사리기와 탑, 부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 등은 값비싼 재료와 최고 기술을 동원하여 정교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떄로는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를 써서 소박한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다채로운 모습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 제일의 보물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유학한 자장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목탑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램으로 지었는데 9층은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적국을 상징하고 있다. 황룡사 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목탑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주도로 건축한 이 목탑은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현재 기준으로 30층 정도의 높이라 한다.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사리공 안쪽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사리공 안에는 사리 외함이 있었고 외함 안에 다시 내함(찰주본기)를 봉안하고 덮개돌을 놓았다. 덮개돌 가운데를 뚫어 둥근 손잡이를 연결하고 돌 아랫면에는 금동판을 붙였는데, 1964년 사리공 안에 있던 사리장엄구가 도굴될 때 덮개돌이 깨지면서 손잡이 등이 손상되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내함 (찰주본기)은 4개의 금동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결하여 상자를 만들었다. 1면에는 문고리는 문이며 다른 3면에는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사리공에는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사리 외함과 내함이 있었다. 모두 사각형 상자 모양으로, 네장의 금동 사각판을 세워 상자와 벽을 만들고 뚜껑을 덮었다. 사리 내함은 뚜껑 안쪽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리 내함 안팎 여섯면에는 목탑의 중심기둥인 찰주를 세우는 것과 관련한 유래가 담긴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겨져 있다. 찰주본기는 872년 목탑을 고칠 떄 넣은 것으로, 645년 목탑을 처음 세운 내력과 경문왕이 고치게 된 경위 및 과정, 사리장엄구 내용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리 내함 옆면 중 한칸은 좌우로 열리는 문 모양으로 만들었고 바깥 문 양쪽 면에는 금강역사, 안쪽 문 양쪽 면에는 천왕상을 새겼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황룡사 심초석 아래에는 목탑을 처음 세울 때 묻은 공양품과 이후 수리과정에서 다시 묻은 공양품들이 있다. 그 종류는 청동그릇, 침통, 칼, 가위, 청동거울,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 일상생활용품을 비롯하여 귀걸이, 팔찌, 허리띠 장식, 곱은옥 등 장신구, 금동관불 등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사리공은 872년 중수할 때 그 이력을 적은 ‘찰주본기’와 함께 묻은 것이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장엄구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절로 <<삼국유사>>에서 말한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두 가지인 장육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다. 553년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꾸어 절을 세우고 황룡사라 이름 붙였다. 진흥왕 대에 기초 공사를 하고 담장을 세웠으며 장육존상을 만들었다. 진편왕 대에 3금당을, 선덕여왕 때 구층목탑을 만들었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여 절이 다 타 버릴 때까지 구층목탑은 여러 번 기울거나 불이 났고, 여섯 번을 고쳐 세웠다. 탑을 여러 번 고쳐 세우면서 목탑 심초석 윗면에 사리를 넣는 사리공에는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넣었다. 사리장엄구 중에서 사리 내함에는 구층목탑을 세우고 872년에 수리한 내용을 담은 <황룡사찰주본기>가 안팎에 새겨져 있어서 주목을 끈다. 심초석 아래쪽에서 발견된 공양품은 탑을 세울 떄 넣은 것이다. 조개껍데기를 담은 백자 항아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그릇, 금속으로 만든 장식구,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분황사 모전석탑(국보)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아 모전석탑으로 삼국시대 선덕여왕대에 세워졌다.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원래 9층석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리를 하면서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수리과정에서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발견되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공양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바늘.가위.집게 등은 분황사 창건을 발원했던 선덕여왕과 관련을 짓기도 한다. 또한 석탑안에는 북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북송 동전인 송녕중보가 같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도 석탑을 해체.수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사리함으로, 1915년 분황사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몸체에 자연석 윗면을 다듬고 중앙에 네모난 공간을 만든 다음 사리기와 공양품을 넣었다. 바닥 한쪽에는 빗물이 들어갈 경우를 대비하여 배수구를 뚫어 두었다. 또한 뚜껑을 덮었을 때 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체 가장 자리에 돌기를 만들었다. 뚜껑은 몸체와 다르게 잘 다음어 만들었으며, 모서리를 깎아내고 윗면 중앙에는 둥근 돌기를 새겼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분황사 사리장엄구
선덕여왕 시기에 스무 개가 넘는 절이 세워졌는데, 분황사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절이다.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져 지장, 원효가 머물렀고, 솔거가 그린 천수 관음 벽화, 경덕왕 대에 만들어진 약사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은 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하는데, 분황사에는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 있다. 원래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탑의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함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사리기와 여러 공양품이 확인되었다. 은과 유리로 만든 사리기와 더불어 금동장신구, 구슬, 조개껍데기, 동전 등이 나왔다. 공양품 구성은 이전 시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한데, 탑을 부처의 무덤으로 인식해 껴묻거리처럼 사리 공양품을 넣었기 떄문으로 볼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국보)은 사천왕사 목탑과 함께 처음으로 2개의 탑을 세운 쌍탑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물인 목탑을 간략하게 구성한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의 시초가 되는 석탑이다. 서삼층석탑 3층 몸돌에서 발견된 사리엄장구(보물)는 1959년 해체.수리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가로 활동한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천왕상이 있는 외함,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기와 수정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은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682년경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감은사 터에는 같은 모양의 동서 삼층석탑이 있는데, 각 석탑에서 발견한 사리장엄구도 모양이 비슷하다. 1959년 서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3층 탑 몸돌 윗면에서 발견한 사리기는 수정 사리병- 사리 내함 – 사리 외함 3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정 사리병은 사리 내함인 전각 모양 사리기 중앙에 놓이며, 복발 모양 뚜껑을 덮었다. 전각 모양 사리기는 다시 상자 모양의 사리 외함 안에 넣는다. 전각 모양 사리기의 네 모서리에는 동발, 요고, 북, 횡적, 비파를 연주하는 천인상이 있다. 사리 외함의 4면에는 사천왕상을 부조로 만들어 붙였는데, 사천왕상의 셈세하게 표현한 조각 기법과 따로 만들어 붙인 다양한 장식 등은 신라의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갑산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발굴하면서 절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갑산사 터에서 발견된 전불은 건물 장식에 썼을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부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과 화불을 대칭으로 배치하여 네모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부처와 보살의 몸이 유난히 긴 것이 특징이며, 광배와 옷자락이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먹글씨가 쓰인 납석제 사리호, 청동 항아리, 탑지석 2매가 함께 발견되었다. 탑지석의 내용에서 828년에 건립한 탑을 846년에 옮겨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법광사를 후원했던 인물이 신문왕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어, 법광사가 통일신라 왕실의 후원 속에 번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탑지석은 1698년에 사찰의 중수했다는 내용과 1747년에 석탑을 수리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축서사에서 보관해 오던 사리장엄구로 1929년 일본인이 샀다가 다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판 것이다. 지금은 납석제 사리호, 경전을 넣었던 통, 흙으로 만든 작은 탑이 남아 있다. 사리호 바깥 면에는 탑과 사리를 봉안한 연대, 발원자, 발원 연유등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다. 명문 내용과 봉안된 공양탑, 경통으로 보아 이 사리장엄구는 당시 유행하던 무구정탑 신앙에 따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봉화 서동리 동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1층 석탑 몸돌 윗면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였다. 사리공 중앙에 유리사리병을 넣은 납석제 사리호가 놓여 있고 그 주위에는 흙으로 만든 작은 탑 99개가 세워져 있었다. 작은 탑 밑면에는 먹으로 쓴 다라니를 말아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으며, 일부 구멍에는 나무 마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창녕 술정리 삼층석탑(국보)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기단과 탑신 몸돌에 기둥모양을 장식한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탑을 이루는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절하며 세부적인 조각수법도 뛰어난 걸작이다.
사리장엄구인 청동 사리기, 유리 사리병, 구슬류 등은 1965년 석탑을 수리할 때 3층 탑 몸돌 윗면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청동 사리기는 입구가 벌어진 자나과 잔받침이 결합된 것 같은 독특한 형태이며, 청동 접시가 뚜껑처럼 덮여 있었다. 사리병은 목기 긴 모양의 작은 황색 유리병이다. 최근 조사에서 청동 사리기 뚜껑으로 사용된 청동 접시에서 명문이 확인되었다. ‘비자화처강’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앞의 ‘비자화’는 ‘비사벌’을 뜻하는 말로 창녕의 옛 이름이다. 나머지 두 글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팔각 건물 모양의 사리기에 작은 유리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육각이나 팔각의 건물 모양 사리기는 9섹; 중국에서 전래된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였다. 3단의 받침 위에 팔각형 몸체를 올리고 팔각지붕 모양의 뚜껑을 얹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함양 승안지시 삼층석탑(보물)은 고려 초에 조성된 석탑으로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 등의 모습을 새겨 놓고 있는데, 의미를 두고 질서있게 배치한 것 같지는 않다. 1층 탑신 몸돌에는 사천왕상을 새겨놓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받침과 복발, 연꽃모양장식이 남아 있다.
함양 승안사 터에 있던 삼층석탑을 인근으로 옮기는 도중 1층 석탑 몸돌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였다. 사리합 안에는 사리 1매가 든 녹색 유리 사리병과 유리구슬 한 줄, 은과 백동으로 만든 반지 일곱 개 등이 들어 있었다. 사리공 안에 있던 주머니에는 1494년에 탑을 고쳤다는 내용이 적힌 묵서중수기가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통일신라 후기의 사리기
8세기 이후에 왕경과 지방 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모두 간소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중 사리기는 외함, 사리병만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며 공양품의 종류와 수량도 줄었다 한편 8세기 초에 중국에서 전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이를 따른 사리장엄과 탑을 만드는 활동은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통일신라 후기에 더욱 보편화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는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를 넣은 작은 탑을 봉안하고 이로써 공덕을 쌓으라고 말한다. 신라 탑에는 <무구정광대다리니경>과 작은 탑을 함께 봉안하거나 그중에 하나만 봉안했으며, 소탑은 77기, 99기, 또는 이보다 적은 수를 넣은 사례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