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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불교미술] 신라의 불교 사원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그 중 불국사는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칠처가람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에 큰 사찰들이 들어서게 된다. 동쪽편 분황사와 황룡사, 남쪽편 낭산 끝자락에 세워진 사천왕사, 서쪽편 오릉 주변의 영흥사, 영묘사, 담엄사, 흥륜사가 있다. 삼국 통일 이후 국가에 주관하는 성전사원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세워졌던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경주 지역에는 약 300곳이 사칠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중 문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100곳 정도이며, 탑이나 불상 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그 실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약 50곳 정도이다.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과 주춧돌, 축대 등으로 가람의 배치나 건물의 규모등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절터에서 출토되는 기와 등에서 당시 건축기술의 수준을 가름해 볼 수 있다. 

<치미, 신라, 경주 황룡사터>
<앞에서 본 모습>

치미는 목조건축 지붕의 용마루 양 끝을 잡아주고 보호하는 기와이다. 화재를 막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 기능과 함꼐 지붕을 장식하여 건물의 위엄을 높이는 역할도 하였다. 황룡사 치미는 높이 182cm로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 있는 치미 중 가장 크다. 위와 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였으며, 위.아래 잘린 면에는 각각 ‘ㄱ’과 ‘ㄴ’ 모양으로 홈을 만들어 결합할 때 고정되도록 하였다. 치미의 머리 부분은 수키와와 연결할 수 있도록 반원 모양으로 돌출되었다,. 용마루와 연결되는 옆부분은 ‘ㄱ’자 모양으로 하고, 치미 뒷면 아랫부분을 삼각 모양으로 한 것이 특징적이다. 양 옆면과 뒷면에 연꽃무늬, 얼굴무늬로 장식하였는데, 특히 얼굴무늬 중 남자의 얼굴은 수염까지 표현하며 신라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지역에 있었던 주요 사찰>

별처럼 많은 절과 기러기처럼 늘어선 탑
신라 왕경에 들어선 수많은 절의 모습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라는 서정적 구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흥륜사가 서천 주변 천경림에 처음 세워진 이후, 6세기 중엽에는 월성 주변에, 7세기 후반에는 남산과 낭산 일원에, 8세기 이후에는 토함산과 경주시 외곽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사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경주 지역 사원은 약 300곳이 알려져 있고, 이 중 문헌과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100곳 정도이다. 탑, 불상 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곳은 약 50곳이고, 발굴하여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은 약 30곳이다. 여러 유적에서 사원 이름이 적힌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보면 사원의 성격과 위치 등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영묘사(靈廟寺)는 신라 칠처가람 중 사천미(沙川尾)에 세워진 사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 이절에서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유명한 예술가인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묘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흥륜사지(사적)는 경주 오릉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추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법흥왕 때(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면서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때(533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흥륜사는 이차돈 순교 이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대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이 말년이 스스로 주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사찰이다.

<경주 흥륜사지(사적)>
<흥륜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흥륜사 터>

황룡사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신라인이 신성시여겼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궁궐이었더 동궁(임해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21세가 되던해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지을려고 하다고 사찰로 고쳐지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진평왕대에 금당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과 금당에 모셔진 삼륙존상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여왕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9층목탑을 세웠으며, 이후에 종루와 경루가 세워졌다고 한다. 

<경주 황룡사지 (사적)>
<황룡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황룡사 터>
<황룡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구황동.인왕동 절터>
<사천왕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사천왕사 터>
<사천왕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창림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창림사 터.천관사 터>
<보문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석불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석굴암>
<삼랑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안계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안계사터>
<원원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천주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갑산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갑산사 터>
<갑산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 고려, 경주 갑산사 터>
<동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굴불사 터><부석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영주 부석사 터>
<백률사 이름을 새긴 기와, 고려, 경주 황룡사 서편 절터><도중사 이름을 새긴 기와, 통일신라, 경주 인왕동 절터>
<인정지사 이름을 새긴 수막새, 고려, 출토지 모름><정만지사 이름을 새긴 수막새, 고려, 경주 구황동
<사제사 이름을 새긴 막새 기와, 고려, 경주>

불교사원의 기와와 전돌
고대 사회에서 기와는 선진 기술력과 생산 체계로 만드는 건축 재료로서 불교사원과 같은 권위 있고 중요한 건물에만 쓰였다. 기와는 쓰임새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는데, 그중 수막새는 시간과 계통에 따른 기와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신라 수막새는 백제, 고구려, 당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했다. 연꽃무늬는 수막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무늬인데, 단판에서 장식성이 강조된 중판으로 변화했다. 이 외에 상상의 꽃을 표현한 보상화무늬, 덩굴무늬, 인동무늬와 함께 좋은 운을 불러오는 동물과 불상도 새겼다. 전돌은 바닥전과 벽전으로 구분된다. 바닥전은 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했는데, 위계가 높은 절에서는 기와와 함께 전돌도 녹유로 장식하여 썼다. 벽전은 탑과 같은 건물 벽을 장식하는 데 썼는데, 사천왕사 목탑의 녹유신장상벽전이 유명하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집무늬 벽돌, 통일신라, 출토지 모름>
<집무늬 벽돌, 통일신라, 출토지 모름>
<집무늬 벽돌, 통일신라, 울산 중산리>
<집모양 토기 지붕편, 통일신라, 경주 사천왕사 터>

신라의 목조 건축물
일제강점기 울주군 중산리 절터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용무늬 벽돌과 누각무늬 벽돌이다. 용무늬 벽돌에는 용머리의 옆면과 함께 절반 정도 가려진 건물이 표현되어 있다. 건물 모양은 누각무늬 벽돌을 보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벽돌의 한쪽 옆면에는 높은 축대 위에 놓인 건물 두 채가 구름을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면 세 칸의 건물은 창살과 문, 기둥 위와 처마 끝으 구조물 등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처마 끝은 하늘을 향해 위로 뻗어 있으며, 지붕 끝의 장식 기와는 안쪽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용무늬 벽돌과 누각무늬 벽돌은 목조 건축물이 표현된 희귀한 벽돌로서 감은사 터에서 출토된 가옥형 토기 조각과 함께 고대 신라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칠처가람은 삼국시대 경주에 신라 불국토설의 일환으로 신성시 여기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사찰들을 말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는 경주에 전불시대(석가모니를 포함한 과거칠불) 7곳의 절터가 있으니 불교를 전파하라는 당부를 받는다. 그곳에 세워진 칠처가람으로는 경주 동쪽 분황사와 황룡사, 남쪽 낭산 사천왕사, 서쪽 오릉 주변 영흥사, 영묘사, 담엄사, 흥륜사가 있다.

<흥륜사 터 출토 기와>
<흥륜사 터 출토 기와>
<흥륜사 터 출토 기와>
<흥륜사 터 출토 기와>
<흥륜사 터 출토 기와>

흥륜사는 칠처가람 중 하나인 천경림에 세워진 신라 최초의 절이다. 진흥왕 5년(544)에 고쳐 짓고 ‘대왕 흥륜사’로 불렀다. 절 안에는 승려 각덕이 중국 남조 양에서 가져온 불사리와 보현보살상이 그려진 벽화, 선덕여왕 대에 봉안한 삼존불상, 금당에 봉안한 십성의 소조상이 있었다. 현재 신라 최대 규모의 석조 등이 남아 있다. 흥륜사에서 썼던 기와는 백제 기와 제작 기술과 관련이 깊다. 신라 황룡사와 백제 미륵사 목탑을 만들 때 두 나라가 서로 장인을 보냈다는 기록과 함께 흥륜사의 기와는 양국의 문화 교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황룡사 터 출토 기와>
<황룡사 터 출토 기와>
<황룡사 터 출토 기와>
<황룡사 터 출토 기와>
<보상화무늬 벽톨,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터>
<보상화 용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터>
<보상화 용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터>
<보상화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터>
<분황사 터 출토 기와>
<분황사 터 출토 기와>
<이형기와, 통일신라, 경주 분황사>
<이형기와, 통일신라, 경주 분황사>
<바둑판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부 분황사>
<연꽃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분황사>
<무늬없는 벽돌, 통일신라, 경주 분황사>

성전은 통일신라 때 왕실을 후원을 받았던 사찰에 설치된 관청이다. 칠처가람이었던 사천왕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와 봉은사, 봉덕사, 봉성사, 감은사, 영창궁이 성전이 설치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각 사찰에 성전이 설치되었던 내력과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녹유 벽돌, 통일신라, 경주 사천왕사 터>
<녹유 물결모양 벽돌, 통일신라, 경주 사천왕사 터>

사천왕사 전용와와 물결모양 전돌
사천왕사는 성전사원 중 하나로서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전용 기와 가마를 운영했다. 이곳에서는 무늬가 화려한 막새기와 뿐만 아니라 수면기와, 마름모무늬 벽돌, 부연기와, 연목기와 등의 여러 기와와 녹유 소자상 등을 만들었다. 수리할 때 필요한 전용 기와도 꾸준히 만들었다. 한편, 사천왕사 목탑터 바닥에서는 정사각형의 보상화무늬 벽돌 둘레에 물결모양 전돌을 한 줄로 나란히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불교의 이상세계인 정토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천왕사 터 출토 기와>
<사천왕사 터 출토 기와>
<사천왕사 터 출토 기와>
<사천왕사 터 출토 기와>
<보상화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사천왕사 터>

신라 사원의 기와 수급
절이 세워진 이후에도 절을 꾸준히 보수하거나 고쳐지어야 했기 때문에 기와가 계속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특정 절에만 쓰는 전용 기와를 만들어 유통했는데, 황룡사, 영묘사, 사천왕사, 불국사와 같은 큰 절에서 주로 썼다. 큰 절에는 규모가 큰 건물이 여러 채 있어서 기와가 한꺼번에 많이 필요했고, 절에서 직접 운영하는 가마나 국가에서 운영하는 가마에서 기와를 만들어 공급했다. 한편, 황룡사처럼 수십 년 동안 지은 큰 절에서는 전용 기와 가마 이외에도 여러 곳의 가마에서 만든 기와를 다양하게 썼으나, 사천왕사처럼 전용 기와를 주로 써서 다른 절에 비해 기와의 무늬와 종류가 다양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큰 절의 전용 기와는 주변의 여러 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로써 자체 기와 공급이 어려운 작은 절에서는 주변에 있는 큰 절에서 기와를 가져다 썼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감은사 터 출토 기와>
<감은사, 석불사, 불국사, 선방사 터 출토>
<보문사, 황복사, 인왕동절터, 천룡사, 창림사 출토 기와>
<천관사, 천군동절터 출토>
<선방사, 천관사 출토>
<천주사 굴불사, 승복사 출토>
<삼랑사, 영묘사 칠불암 출토>
<탑 불상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석장사 터>
<탑 불상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삼랑사 터>

감은사지 절터(사적)는 문무왕 무덤인 대왕암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왜(倭)의 침입을 막고자 감은사를 창건했으며, 그의 아들 신문왕 때(682년) 완성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와 함께 문무왕을 명복을 빌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願刹)의 성격을 갖고 있다. 

<경주 감은사지 (사적)>
<녹유 물결모양 벽돌, 통일신라, 경주 감은사 터>

불교사원의 가람배치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상가람마’를 한자로 옮긴 ‘승가람마’의 준말이다. 원래 인도 수행자들이 수행할 때 오래 머물렀던 ‘숲이 있는 동산’을 뜻했으나, 후대에 건물로 이루어진 승려들의 공간을 뜻하게 되었다. 가람배치에 따라 절의 성격, 위계, 계통, 시대성 등이 구분되기 때문에 가람배치는 고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초기 가람배치는 중문, 탑, 3금당, 강당이 일직선을 이루는 ‘1탑 3금당식'(황룡사, 분황사)이었다. 이후에 ‘쌍탑 1금당식'(사천왕사, 감은사, 불국사)이 유행했다. 그밖에 ‘1탑 1금당식'(고선사) 등의 다양한 형식이 나타났다. 각 가람배치의 기원과 계보, 변화 모습이 다양하여 신라가 불교문화권의 여러 나라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변화.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무늬없는 벽돌, 통일신라, 경주 감은사 터>
<보상화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고선사 터>
<무늬없는 벽돌, 통일신라, 경주 고선사 터>
<보상화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서편 절터>
<연꽃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구황동 원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특수문양 기와>
<연꽃무늬 사래기와, 통일신라, 경주 황룡사 터>
<봉황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인왕동 절터>
<보상화무늬 벽돌, 통일신라, 경주 인왕동 절터>
<녹유 벽돌, 통일신라, 포항 법광사 터>

신라 기와 가마터
월성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천북면과 내남면 일대는 신라 토기 대단위 생산지로 유명하다. 천북면 물천리. 내남면 화곡리 가마터의 토기 공인은 신라에ㅐ서 가장 먼저 기와를 만들었다. 이 기와는 백제 대통사 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비슷하여 신라 기와가 6세기 전반 무렵에 백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만든 명문 기와에는 ‘습부’와 ‘한지벌’ 등의 글자가 적혀 있어, 신라 6부 가운데 습부와 한지벌부에서 만든 토기 및 기와가 왕궁에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에는 천북면 동산리. 내남면 망성. 남산 장창곡 가마터에서 만든 기와가 왕경과 초기 사원에서 주로 쓰였다. 더불어 많은 와공 집단이 기와이 제작돠 사용에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기와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흐름은 7세기 후반에 통일신라식 기와가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천왕사는 경주에서 7곳의 신선한 숲 중 하나인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은 경주에서 울산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동해안에 조성된 문무왕 수중릉과 함께 삼국통일 후 일본을 경계했던 문무왕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천왕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의 목탑이 조성된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감은사,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조성되었던 쌍탑식 가람배치를 처음 시도했다고 한다. 뒷편에는 제단이 있던 건물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주 사천왕사 절터(사적)>

삼국통일(676) 후 신라와 당이 여전히 긴장 관계에 있던 문무왕 19년(679)에 경주 낭산에 세워진 절이다. 절이 세워진 신유림은 고대 토속신앙에서 신성하게 여겼던 장소로 사천왕사가 들어서면서 호국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성전사원 중 위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최초의 쌍탑 1금당식 절이며, 이후에 세운 감은사, 망덕사를 비롯하여 8세기 불국사, 천군동 절터, 인왕동 절터 등의 가람배치에 영향을 주었다. 동.서탑 터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사각형 구조로 중앙에는 네모난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이 있다. 기단 지대석 중간마다 일정 간격으로 기둥을 두고, 그 사이에 넝쿨무늬 벽돌을 쌓아 올려 구분한 공간 안에 녹유신장상벽전을 배치했다. 조각승 양지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녹유신장상벽전은 중대 신라 불교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천왕사 절터의 동서 쌍탑 주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악귀를 깔고 앉은 신장상이 표현되어 있다. 전의 크기는 높이 90cm, 폭 70cm 정도이다. 여러 벌의 틀로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구웠다. 전들은 3종류이다. 탑의 기단부 바깥쪽 네 면에 각 6개씩 총 24개를 설치되었다. 

<녹유신장상벽전, 통일신라 679년, 경주 사천왕사터>
<녹유신장상벽전, 통일신라 679년, 경주 사천왕사터>
<녹유신장상벽전, 통일신라 679년, 경주 사천왕사터>

사천왕사는 삼국 통일 후 679년 경주 낭산에 세운 절이다. 사천왕사는 1금당 동서 쌍탑이 가람배치인 것이 발굴로 확인되었다. 녹유신장상벽전은 사천왕사 동서 목탑 기단부 4면을 장식한 것으로, 일정한간격으로 기둥을 두고 그 사이에 넝쿨무늬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기단에 배치되었다. 세기지 도상으로 이루어진 신장상 벽전은 탑 기단부 4면에 각 6개씩 총 24개가 설치되었다. 조각에 능통한 신라의 승려 양지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중을 제작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양지가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의 불교사원
5세기에 묵호자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법흥왕 때에 공인되었다. 6세기 전반에 흥륜사를 시작으로 큰 절이 수도 왕경에 세워졌고, 7세기 후반부터는 왕경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절이 많이 세워졌다. 신라에서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염원하며 절을 세웠다. 왕실은 성전사원을 두어 절을 수리하거나 감독하게 하고 국가 의례를 맡겼다. 통일 이후에 불교가 더욱 대중화되고 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왕실, 귀족 이외에 지방 호족, 일반인도 절을 세우는데 참여했다. 8세기 이후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중시되어 탑 조성과 신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 불교사원은 정치, 종교, 문화, 예술의 힘이 집중된 곳이었다. 절의 건축물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발굴된 출토품을 보면 당시 절의 규모, 장식하는 법, 신앙 활동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