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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박물관] 통일신라, 새로운 행정 체제로 정비된 강원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현을 두는 주군현 체제를 완성했다. 또한 5소경을 설치하여 지방 지배를 강화했다. 강원지역에는 삭주가 영서지방에, 명주가 영동지방에서 철치되었다. 당나라에서 유학한 도의선사가 설악산 진진사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선종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제자 염거화상과 체징의 가지산문을 통해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월 흥녕선원의 사자산문과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이 강원도에서 출발한 선종 종파이다.

<홍각선사 탑비 조각, 양양 선림원 터, 통일신라 886년>

홍각선사 이관은 국왕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습니다. 17세에 출가하여 해인사, 영암사, 억성사 등을 거치며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억성사는 지금의 선림원으로 추정되는데, 홍각선사는 이곳을 선종 사원으로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홍각선사를 기리는 비문은 왕의 명에 따라 김원이 짓고 승려 운철이 당시 유행하던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염거화상 탑에서 나온 글을 새긴 동판, 원주 흥법사 터, 통일신라 855년, 보물>

일제강점기 원주 흥법사 터에서 서울로 옮겨온 염거화상 탑에서 나온 것입니다. 동판 표면을 연마한 후 정으로 외곽선을 긋고, 회창 4년(844) 염거화상의 입적과 탑을 세운 연대를 쌍구체로 음각하였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화창 4년 4월 갑자해(844년) 9월 29일에 돌아가신 염거화상의 탑으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지 1804년이 지나서인데, 이나라 경응대왕(문성왕) 때이다.

<원주 흥법사지>

지방문화의 산실, 선문禪門 개창
선종은 경전이나 문자가 아니라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새로운 이념을 표방했습니다. 821년 도의선사는 중국에서 배워 온 선종을 신라 땅에 뿌리내리려 하였으나 “마귀의 언어”라는 비방을 받자, 경주를 떠나 설악산 진전사에 은둔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 염거화상을 거쳐, 3대 제자 체징 때 가지산문에서 활짝 꽃피었습니다. 영월 흥녕선원의 사자산문과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도 강원지역에서 개창한 것으로, 강원은 신라 선종의 산실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탑과 탑지 제작 연대
탑지에는 탑을 만든 연대가 불멸 연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석가가 열반한 해(불멸 기년)는 법림이 확정한 기원전 949년 설을 따랐습니다. 신라도 이를 따랐는데, 장흥 보림사와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조상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탑지에서 불멸 후 1804년이 지나 탑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탑과 탑지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새로운 행정 체제로 정비된 강원
676년, 마침내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전국의 행정 체제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합니다. 강원의 영동과 영서 지방은 명주와 삭주로, 원주에는 광역시에 해당하는 북원소경이 설치되어 북방행정을 담당하게 됩니다. 문수와 관음, 담무갈보살이 항상 머문다고 하는 성스러운 땅 명주에는 낙산사, 정암사와 같은 명찰이 번성하였습니다. 삭주의 발달된 물길을 따라서는 홍천 물걸리 절터의 흔적이 보여주듯 거대 사찰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토대 아래 9세기 강원에서는 선종이라는 새로운 불교문화가 양양 진전사를 중심으로 태동하였습니다.

강원도는 백두대간의 이름난 명산들이 많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발원하는 고장으로 이름난 사찰들이 많은 편이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명산에는 선종을 중심으로 수행을 중시하는 사찰들이 많이 세워졌고, 한강수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원주 부근에는 고려시대 큰 사찰들이 들어섰다.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비롯하여 금강산의 고찰들은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관련되어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양양의 진전사와 선림원, 강릉의 굴산사와 한송사, 원주의 법천사, 흥법사 등 많은 사찰들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 사회적 요인 등으로 폐사되어 오늘날 그 절터만 남아 있다

<강릉 굴산사 터 출토품, 고려, 1, 2 ‘굴산사’ 명문기와 3,7 ‘오대산’ 명문기와 4 ‘오대산 금강사’ 명문기와, 5 ‘중일’ 명문 기와, 6 얼굴무늬 사래기와>
<강릉 굴산사지>

사굴산문의 통합 문화
통효대사 범일은 846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강릉에서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파를 열었습니다. 범일의 사굴산문은 실천적인 서 사상과 교종인 화엄종을 아우르는 통합사상도 성립시켰는데, 이 법맥은 보조국사 지눌의 조계종 사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중을 중심으로 교종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은 고려 말 사굴산문의 나옹과 가지산문의 태고 보우로 이어져 오늘날 조계종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양양 진전사 터 출토품, 통일신라, 1 연꽃무늬 수막새>
<2 부처>
<3 암막새>
<4 연꽃무늬 수막새>
<양양 진전사지>

선종의 계보
유고 혜능 -> 종조 도의(가지산문) -> 중흥조 보조지눌(사굴산문) -> 태고 보우(가지산문) ->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

인도의 달마가 중국에 禪을 전했고, 중국 선종의 6대조인 혜능이 남종선을 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도의선사가 양양 진전사를 중심으로 선종을 신라 땅에 전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수막새, 양양 선림원 터>
<암막새, 양양 선림원 터>
<작은탑, 양양 선림원터>
<작은탑, 양양 선림원터>

선림원 삼층석탑에서 나온 소탑
통일신라 사람들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좋아하여 탑을 만들 때 부처의 사리와 함께 작은 탑 77개 혹은 99개를 만들어 봉안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 경전대로 탑을 만들면 수명이 연장되고 극락왕생하여 백 천 겁 복락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작은 탑이지만 기단과 탑신 오묘한 문양 등을 정성껏 새겼고 그 안에는 새로운 주문인 다라니늘 적어 넣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부처, 양양 선림원터><풍탁, 양양 선림원터>
<손잡이, 양양 선림원터>
<양양 선림원지>
<수막새, 통해 지가동 절터>
<수막새, 통해 지가동 절터>
<암막새, 동해 지가동 절터>
<수막새, 태백 본적사터>
<수막새, 태백 본적사터><암막새, 태백 본적사터><숫돌, 태백 본적사터>
<기와, 양양 선림원 터>
<기와, 양양 선림원 터>
<기와, 양양 선림원 터>
<비석, 삼척 흥전리 절터>
<비석, 삼척 흥전리 절터>

비석 조각, 삼천 흥전리 절터, 통일신라
삼척 도계읍 흥전리 절터에서 발견된 비석 편으로, 비석의 주인공은 김씨 성을 가진 지방 호족 출신의 선종 스님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대장경” “국통” 등의 글씨가 새겨진 다수의 비석 편들과 정병이 발견되었다. 흥전리 절터는 인근 지명인 ‘돈각’으로 미루어, 산청 지곡사 진관선사 석초 스님의 비문에 나오는 각돈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에 <척주지>에 보이는 돈각사로 절 이름이 바꾸었을 것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명주의 명산과 이름난 사찰
백두대간으로 뻗어 간 명주(영동 지역)의 명산은 불보살들이 머무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대산은 자장이 중국 문수신앙을 신라에 소개하여 문수신앙의 성지로 받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대산에서 자장이 잠시 머물렀던 곳은 후에 월정사로 중장되어 문수도량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설악산은 석가모니가 수행하던 설산으로 일걸어졌고 선림원은 염거화상과 홍각선사가 머물면서 선종 사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사다리꼴 기와, 홍천 물걸리 절터>
<암막새, 치미 조각, 홍천 물걸리 절터>
<부처, 홍천 물걸리 절터>
<부처, 홍천 물걸리 절터, 원주 법천리>
<풍탁, 홍천 물걸리 절터>
<보살, 원주 거돈사터>
<암막새, 홍천 물걸리 절터>
<철불, 홍천 물걸리 절터>
<벽돌, 홍천 물걸리 절터>
<‘王’자 글자를 새긴 기와, 홍천 물걸리 절터>
<‘回’자 글자를 새긴 기와, 홍천 물걸리 절터>
<‘幸’자, ‘京’자, ‘田’자 글자를 새긴 기와, 홍천 물걸리 절터>
<수막새, 홍천 물걸리 절터>
<수막새, 홍천 물걸리 절터>
<홍천 물걸리사지>

홍천 물걸리 절터 기와
절터에서 나온 8세기 중엽의 보상화문 수막새는 신라 왕경의 동궁과 월지 수막새 문양과 흡사합니다. 오리를 표현한 암막새 역시 신라의 쌍조문 전통을 이은 모습입니다. ‘王’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는 기법상 고려시대 초로 추정됩니다. 통일신라 군사조직인 벌력천정이 주둔했던 군사 요충지이다, 홍천강을 따라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에 묽걸리 절터와 같은 대형 사찰이 들어섰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수막새, , 원주 법천사 터>
<원주 법천사지>
<암막새, 원주 거돈사 터>
<원주 거돈사지>
<수막새, 원주 안창리 절터, 원주 거돈사 터>

삭주의 물길과 거대 사찰
수운이 편리한 곳에 사찰이 세워져 문물을 교류하는 장소의 역할도 겸하였습니다. 홍천 물걸리 절터는 홍천강과 내촌면이 합류하여 동해안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 됩니다. 원주 법천사와 거돈사 인근은 배들이 선단을 이루어 지나다니던 남한강의 주요 뱃길로 인파가 모이고 물자가 집중되는 곳이었습니다. 수로와 육로가 이어지는 곳에는 이처럼 거대 사찰이 들어서는 한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나루를 중심으로 도진촌이 발달하였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1948년 월정사에 보관중인 선림원 종>
<선림원 종 조각, 양양 선림원 터, 통일신라 804년>
<재현한 모습>

전쟁의 아픔이 남겨진 선림원 종
1948년 양양 선림원터에서 아름다운 종 하나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범종은 통일신라 804년에 제작된 것으로 평창 상원사 범봉, 경주 성덕대왕 신종에 이어 세번째로 오래된 종입니다. 이듬해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져 보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되어 현재는 종의 일부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이두로 쓴 종을 만든 내력>

종 조각에는 이두로 쓴 명문이 남아 있는데, 충북 옥천의 관리 부부가 모든 이들이 성불하기를 바라며 시주한 종과 원래 있던 종을 함께 녹여 804년에 만들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선림원은 당시 화엄종 승려들이 선종으로 옮겨간 사실을 보여 줍니다. 종 명문에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 등이 절의 창건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 있어 본래 화엄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종을 거는 고리, 양양 선림원 터, 통일신라 804년>

종고리는 자체 중량의 백 배 이상을 견딜 정도로 강도가 높아야 하므로 망치로 여러 번 때려 압축시키는 단조 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예로, 출토 당시 종에 함께 걸려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성스러운 땅
신라 사람들은 신라가 부처와 인연이 있는 나라이며, 이 땅에는 늘 부처와 보살이 머문다고 믿어 왔습니다. 자장은 중국의 문수신앙을 신라에 가져와 오대산 신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의상은 동해 바닷가 낙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으며, 중국에서 만난 정취보살을 낙산사로 모셨다는 범일의 설화도 전합니다. 또 의상과 그의 제자 표훈은 담무갈보살이 금강산에서 1만2천 권속을 거느리며 살고 있다고 믿고 이들에게 귀의하여 지혜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경포대와 한송정은 신라 화랑이 차를 끓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유서깊은 곳입니다. 신라 화항 사선이 노닐던 곳은 관동팔경으로 정착되어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인 묵객들이 남긴 수많은 문학과 예술의 자취가 전해 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명주溟州는 신라 9주 5소경 중 한 주州이다. 강릉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동 지방과 경북 동해안 일대를 포함한다. 통일신라 선덕왕 사후 원성왕에게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김주원이 도피하여 강릉지역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 후 반독립국 상태가 이어졌다. 강원도 강릉시, 영월군, 삼척시, 고성군, 통천군, 경상북도 울진군, 영덕군 영해면, 안동시 임하면 등이 포함된다. 조선시대 관동팔경과 그 범위가 비슷하다.

<‘명주성’을 찍은 수막새, 강릉 명주산성, 강릉 굴산사터>
<도끼, 투겁창, 살포, 손칼><손칼, 고성 초도리><도끼, 양양 임천리><투겁창, 양양 임천리><살포, 영월 삼옥리>
<긴목 병과 뚜껑, 강릉 방내리, 삼척 궁촌리><녹유를 바른 대좌, 평창 대상리>
<나발, 인제 한계사 터>
>부처와 나발, 인제 한계사 터>
<허리띠 장식, 삼척 궁촌리, 동해 지흥동>
<목걸이, 삼척 성북리>
<재갈, 삼척 성북리>

명주로 가는 길, 북해통
성덕대왕 때 강릉 태수로 임명된 순정공과 그의 부인 수로가 북해통을 이용하여 부임지로 가는 길에 겪은 일을 노래한 것입니다. 북해통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명칭으로 왕경에서 동해안을 따라 명주로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경주로 간 고성 젓갈, 안압지 출토 목간><월성 해자 출토 목간>

경주로 간 고성 젓갈, 안압지 출토 목간
고구려 때 명칭은 달홀이었는데, 경덕왕 때 고성으로 바뀌었습니다. 긴급히 사신 편에 가져왔다는 것은 오늘날의 택배나 특급우편에 해당될 것입니다. 세택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과 관련된 관청이며, 신번은 번지수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월성 해자 출토 목간
강원도 영월을 가리키는 내생성이라는 명칭이 보입니다. ‘受’라는 글자는 세금이나 징발 등과 같은 공납 용어이므로, 신라의 행정력이 이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동이>
<굽다리접시>
<뚜껑>
<굽다리 바리>
<굽다리 긴목 항아리>
<각진병><긴목병>

신라의 이상향, 명주
신라의 명주(강릉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일대) 지역 진출은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뻗어 나가고자 하는 신라 사람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북쪽을 뜻하는 명주라는 이름이 처음 붙여진 것은 767년이었고 원성왕 때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강릉으로 낙향한 김주원은 명주군왕으로 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삭주朔州는 신라 9주 5소경 중 한 주州이다. 춘천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서지방바 함경남도 남단 지역을 포함한다. 강원도 춘천시, 원주시, 양구군, 화천군, 금강군, 김화군, 창도군, 회양군, 안변군, 원산시, 충북 제천시, 경북 영주시, 경기도 가평군 등을 포함한다. 삭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의 변방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집게모양 철기, 홍천 역내리><귀걸이, 홍천 역내리>
<허리띠 꾸미개, 홍천 역내리, 홍천 성산리>
<벼루 춘천 근화동>
<발걸이, 춘천 소양로 1가>

호등
발걸이는 말을 타고 내리거나 달릴 때 발을 딛는 말갖춤으로, 그 가운데 주머니 모양인 것을 ‘호등’이라고 합니다. 삭주 행정의 중심이었던 춘천 소양로에서 발견된 이 호등은 은입사로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사다리꼴 기와, 춘천 소양로 1가>

사다리꼴 기와
지붕마루 밑의 기왓골을 막는 수키와를 말합니다. 이 기와는 위계가 높은 관아나 사찰 건축에 쓰이는 기와로 통일신라 때 근화동에 삭주의 관아가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수막새, 춘천 소양로 1가>
<오목한 모양 철기, 홍천 동막리, 홍천 성산리>
<삼지창, 홍천 성산리><화살촉, 홍천 성산리, 홍천 역내리>
<손칼, 홍천 역내리, 홍천 성산리>
<발걸이, 춘천 근화동><재갈, 춘천 근화동>
<낫, 춘천 근화동, 홍천 성산리, 홍천 역내리><호미, 홍천 성산리>
<살포, 홍천 성산리><원형 철기, 홍천 성산리>

영서의 옛 이름, 삭주
신라는 진흥왕 때 소백산맥을 넘어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637년 춘천에 우수주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두었습니다. 673년에는 수약주로 바뀌었다가, 삼국 통일 후인 757년 영서 지역을 삭주라 하였습니다. 주는 오늘날 도에 해당하는 큰 행정단위로, 춘천 봉의산성과 근화동 유적은 관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통일신라 때는 중국 도자기의 인화무늬 등에서 유래된 도장무늬토기가 유행하였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와 불교의 영향으로 뼈항아리와 병 등과 함께 연유를 사용한 토기가 만들어졌다. 통일신라 말이 되면 도장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고, 입큰병 등 청자와 비슷한 고려토기로 바뀌게 된다.

<긴목 항아리, 홍천 역내리, 춘천 희망동 석화산, 춘천 옥천동 봉의산>
<병, 홍천 역내리, 춘천 옥천동 봉의산>
<긴목 병, 홍천 역내리, 횡성 춘당2리>
<주름무늬 병, 춘천 우두동, 홍천 성산리, 춘천 근화동>
<굽다리접시, 홍천 역내리, 춘천 옥천동 봉의산, 춘천 근화동, 춘천 발산리>

통일신라 삭주의 중심 치소로 추정되는 근화동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통일신라 토기는 굽다리접시의 경우 다리가 짧아지고 뚜껑이 없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표면에는 도장무늬가 베풀어져 있는데, 기하무늬 외에도 구름이나 새 모양의 무늬를 찍어서 장식 효과를 내었다. 주름무늬 병은 주로 9세기 전후로 유행하였는데, 병 가장자리에 가는 점토띠를 덧붙여서 주름처럼 보이게 하였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굽다리접시,춘천 옥천동 봉의산, 춘천 근화동><굽다리그릇, 홍천 역내리>
<바리, 춘천 옥천동 봉의산><굽다리 바리, 춘천 근화동>
<뚜껑, 춘천 옥천동 봉의산, 홍천 역내리>
<녹유를 바른 굽다리 그릇, 홍천 역내리, 통일신라>

녹유 토기는 저화도 산화염으로 구워야 되서 회색이나 적갈색의 연질 토기에 유약을 발라 만들었다. 주로 뼈 항아리나 기와류 등에서 녹유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청색, 녹색, 황색을 동시에 띠는 삼채 토기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강원지역에서 유일하게 완형으로 출토된 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합, 춘천 송암동, 통일신라>

통일신라 집터에서 출토된 뚜껑이 있는 합으로, 몸통의 1/2은 복원하였다. 뚜껑 꼭지는 보주 모양이며, 내면에는 회전시켜서 깎아낸 흔적이 보인다. 부처의 사리기와 비슷한 그릇 형태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잔, 춘천 발산리>
<굽다리 바리, 춘천 근화동>

통일신라 토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굽다리 접시의 다리가 매우 짧아지고 뚜껑 없는 굽다리 접시가 유행합니다. 이후 녹유를 바르거나, 도장무늬로 장식한 토기와 주름무늬 병 등이 널리 만들어 졌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솥, 춘천 근화동>

<출처>

  1.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