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서울성곽 바깥쪽 언덕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

서울 종로구 홍파동 서울 성곽 바깥쪽에 남아 있는 홍난파 가옥이다.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살았던 집이다. 원래는 1930년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주택이나 홍난파가 이곳에 말년을 보내면서 ‘홍난파 가옥’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서울성곽 바깥쪽 언덕에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지하1층, 지상1층의 단독주택으로 외관상 2층주택처럼 보인다.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편이며, 마당도 비교적 좁지만 언덕에 위치하고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진 크지 않은 규모의 서양식 주택이다. 인왕산 능선을 따라 연결된 서울 성곽이 돈의문(서대문)과 만나는 경희궁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근처에 독일영사관이 자리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앞에서 본 모습>

건물은 경사진 언덕에 세워졌는데 지하1층, 지상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이다. 서쪽편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계단이 있고 왼쪽에 지하1층 방이 보인다.

<계단>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1층처럼 보이게 지은 지하1층>

<1층 현관 출입문>

<오른쪽 침실>

1층 동쪽에는 침실2개를 두고 있었는데 지금은 공간을 터서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왼쪽 거실>

1층 서쪽편에는 거실을 두고 있다. 남쪽과 서쪽에 창문을 두고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거실 서쪽 창문>

<뒤에서 본 모습>

<마당에 세워진 홍난파 흉상>

봉숭아을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백곡을 남기신 난파 홍영후(1898~1941)선생은 우리나라 맨처음 바이얼리니스트로 1936년에는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창설하여 지휘하신 방송음악의 선구자이시다. 난파를 기리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그 모습을 새겨 여기 세우니 과연 인생을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2014년 봄>

<서울성곽>

홍난파 가옥은 돈의문(서대문) 부근 경교장이 있는 강북삼성병원 골목을 따라서 올라가면 된다. 원래 이 길은 서울성곽이 돈의문까지 연결되어 있던 길로 최근에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복원된 서울성곽 안쪽에 조성된 공원>

서울 교남동 골목길로 알려진 경희동 서쪽편 인왕산 자락은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산이 가깝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근처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독일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교남동 일대가 재개발로 주택들이 대부분 허물어지고 언덕에 홍난파 가옥을 비롯하여 일부만 남아 있다.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하우스콘서트와 동요교실 등 의미있는 공연과 문화행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으며, 인왕산 성곽 탐방길에서 중요한 명소로 바뀌었다. 도성바깥 안산자락을 따라 형성된 주택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기념 조형물>

공원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대표작 <고향의 봄> 악보가 새겨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옛 교남동 골목길>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과 골목이 많이 남아 있던 전형적이 서울의 동네골목길을 보여주던 교남동 일대는 최근에 재개발로 허물러졌다. (2013년 모습)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1930년대, 서울 종로구 홍파동
이 집은 지하1층 지상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변의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 특히 이 집은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6년간 지내면서 말년을 보냈는데 이 때문에 ‘홍난파 가옥’이라 부르고 있다. 홍난파는 이 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서쪽길에서 대문을 통하여 마당안으로 들어서면 계단을 따라 현관에 이르게 된다. 이 집의 지붕은 다른 서양 선교사 집과 달리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다. 남쪽에 있는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로 서쪽에 거실, 동쪽에 침실을 두었다. 이 집은 가파른 경사대지를 활용하여 북서쪽에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1930년대 서양인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층 동쪽에 있던 두개의 침실은 홍난파 기념관의 전시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벽을 터 버림으로써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출처:문화재청>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