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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러시아공사관(사적), 정동길 언덕에 남아 있는 아관파천의 현장

서울 중구 정동길 덕수궁 뒷편 높은 언덕 있는 구러시아공사관이다.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고종이 잠시 피신을 했던 곳으로 역사적인 사건인 아관파천의 현장으로 구한말의 힘겨운 역사를 말해주는 건물이다. 이 기간동안 친일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냉전체제하에서는 비어 있었던 건물터로서 90년대 초 한.러 수교시 러시아에서 돌려달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다.(?) 현재 러시아대사관은 배재고등학교가 이전한 자리 일부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구한말 고종의 후원하에 활약했던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로 1890년(고종27)에 지어졌다. 건물온 H자형 본관, 호위대 막사 등이 있었는데 본관은 르네상스풍의 2층벽돌건물로 지어졌다. 본관 한쪽에는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현재는 전망탑과 일부 기초, 지하통로 등 남아있다.

<구러시아 공사관(사적)>

서울성곽 돈의문(서대문)과 서소문 사이 성곽을 헐고 조성된 정동지역에서 제일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구러시아공사관. 현재는 공사관건물 모퉁이에 있던 망루만이 남아 있다.

<구 러시아공사관 건물배치>

<1899년에 찍은 정동 일대 사진>

돈의문(서대문)과 서소문 사이는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안쪽에 각국 대사관, 교회, 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진 건물이 러시아공사관이다. <사진출처:이화여고박물관>

<3층으로 이루어진 탑>

1층은 정면과 양쪽에 아치형 출입문을 두고 있으며, 3층에 주위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이다. 사방에 창을 2개씩 두고 있다.

<1층 출입문>

<3층 망루>

<옆에서 본 모습>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터>

<2010년 모습>

<현 러시아대사관 부근>

냉전시대 러시아공사관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1990년대 한러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러시아에 반환되지 않았다. 현재 러시아대사관은 정동교회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정동수녀원이 있던 자리>

러시아대사관 앞에는 한국카톨릭의 첫번째 수도원인 정동수녀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새문안길로 연결되는 길>

러시아공사관 뒷편으로는 경희궁과 돈의문(서대문)에서 광화문 큰길로 연결되는 새문안길이 지나간다.

<정동길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오르는 길>

이화학당(현 이화여고)와 연결된다.

<구러시아공사관과 공원>

<일제강점기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공사관과 주변 사진>

구러시아공사관, 사적, 서울시 중구 정동길
이 건물은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I.Seredin Sabatine)의 설계로 1890년(고종27)에 준공된 르네상스풍의 벽돌조 건물이다. 러시아공사관 본관으로 사용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3층 전망탑과 일부 기초 유구, 지하통로 등이 남아 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경운궁과 서양 각국 공관, 교회, 학교 등이 집중한 정동의 제일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았으며 본관과 호위대 막사 등이 있었다. 본관은 H자형 평면을 하였고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가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각각의 면에 출입문이 나 있고, 북동 측 끝 모서리에 탑이 위치하고 있었다.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개방된 개선문 형식의 정문이 있었다. 러시아공사관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6년 2월부터 1년간 고종이 세자(순종)과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이 기간동안 친일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고종은 독립문 건설, 각종 도시 개조사업, 파고다공원 등 근대국가 건설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출처:문화재청>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