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서예가 오래 전부터 발달했다. 아름다운 글씨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고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 글씨를 열씸히 써야 할 뿐만 아니라 학문을 깊이 공부하고 인격을 닦아서 고결한 정신을 갖추어여 한다고 생각했다. 명필가의 글씨는 서예를 연마하는데 좋은 교본이 된다. 사람들은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첩으로 엮거나 비석을 세웠다. 금석에 옛 글씨는 시대별 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시대를 대표하는 명필들의 글씨들이 남아 탁본, 법첩 등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청시대 대학자인 주이준과 모기령이 항주에서 노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후세에 모사한 작품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유교의 경전을 교정하고, 표준 텍스트로서 돌에 새겨, 후한의 수도 낙양의 태학(최고 학부)에 세운 <구평석경>의 잔석의 탁본. 후한의 공식 서체이 팔분이라는 예서입니다. 원석은 건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란으로 손상되었고 청말 이후 잔석이 출토될 때까지 시대와 함께 거의 볼 수 없게 되어 탁본으로만 볼 수 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0















요원지는 금석학에 정통한 서화가로 저명한 인물입니다. 식물의 화려한 색채와 고대 청동기의 고담한 먹색의 대조가 훌륭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문인과 탁본
탁본은 금석문이나 육필을 대신해 선인이 기록한 것으로 필자의 글씨, 문장, 나아가서 사회와 문화를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후세의 문인들은 이들 비탁법첩에서 유학이나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적 가치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글자 모습이나 서법에 마음을 기울여 수집·감상. 연구 대상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법첩法帖이란 옛 명필의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이나 탑본榻本 등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10세기 중엽 중국 남당(南唐)에서 처음 법첩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유명하면서 오래된 것은 송나라때 왕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순화각첩淳化閣帖>이다. 이는 역대 제왕과 명신, 진나라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왕희지의 글씨를 감상하고 익히는 서예 교본이었다. 법첩은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품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법첩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문체계로 발전했으며, 이런 분위기는 명.청대까지 이어졌다. 청나라때에는 법첩이 오랜 세월 동안 글씨가 모각을 되풀이하면서 원형에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원본에 가까운 고대 중국 비석을 연구하는 비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더이상 전통적인 법첩은 제작되지 않고 있지만, 서예를 익히는데는 아직까지 많이 활용하고 있다.








왕희지의 난정 계사모임은 시와 문학 그리고 그림으로 끊임없이 표현되어 온 주제였다.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던 모습을 담고 있다.



왕희지의 편지 29통을 모은 것으로 왕희지 초서의 대표작입니다. 대다수의 편지는 촉나라에 거주했던 주무에게 보낸 것입니다. ‘십칠첩’은 첫번째 편지 서두의 문구 ‘십칠일선서’에서 따온 명칭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순화각첩은 북송 순화 연간에 역대 글씨를 정리한 법첩이다. 황실 수장품을 진본 중심으로 모각을 한 뒤, 탑본하여 만들었다. 절반 이상이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쟁좌위고爭坐位稿는 안진경이 환관들의 횡포와 아첨하는 조정대신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쓴 서간의 초고이다. 단슴에 자유자재로 휘두른 필획에서 풍부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중후함과 격조가 느껴진다.










<논어집해>는 삼국시대 위나라 사상가 하안이 제작한 <논어>의 주역서로, 이를 쇼헤이 19년(1364)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간행한 것을 ‘쇼헤이판’이라고 합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초팽령이라는 인물이 소장했던 <구성구예천명> 탁본에서 100자를 선정하여 옮긴 모본입니다. 옹방강은 글자의 윤곽선을 옮기고 먹으로 채우는 치밀한 기법으로 비첩을 비교, 고증했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구영은 쑤저우를 대표하는 직업화가입니다.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가 특징입니다. 소식과 미불 등 북송시대 저명한 문인들의 모임을 그렸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문인이란 예술을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중국에서는 관료들 마저도 문인이 될 것을 요구받을 만큼 중국인의 이상적 모습의 하나였습니다. 문인은 한위육조 시대(기원전 3 ~기원후 6세기) 경에는 이미 존재하였으며 송시대가 되면서 건보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보다 높은 정신성의 표현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문인의 글씨와 그림은 훗날의 중국 예술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명시대 이후 문인문화는 부요한 상인계층에도 널리 받아들여져 붓.먹.벼루.종이 등 문방구는 물론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는 공간 자체에 대해서도 세련된 취향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중국의 서화 예술이 탄생된 문인의 서재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청아한 공간 안에서 문인들은 그 인생을 보다 풍요로운 것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죽림칠현은 위진시대에 세속을 피해 대나무 숲에 모여 자연과 풍류를 즐겼던 7명의 선비를 뜻합니다. 암석과 인물의 표현이 명시대 후기 절파의 작품을 연상시킵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유용은 청시대의 고관으로 짙은 먹의 중후하고 고아한 표현을 확립한 법학파의 대가입니다. 이 작품은 소나무와 매화, 대나무의 무늬가 있는 바탕에 왕희지부터 양응식까지의 글씨를 옮긴 것입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구성궁예천명은 구양순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쓴 비문이다. 당의 해서를 대표하는 글씨로 매우 단정하고 절제된 필법을 보이며 글자의 따임새가 긴밀하다.

중국의 글씨
이 코너에서는 중국의 글씨를 소개합니다. 한자는 각 시대의 다양한 요구, 얼마나 읽기 쉬운가, 쓰기 쉬운가, 아름다운가 등 각종 요소를 갖춘 이상적인 모습이 모색되어 왔습니다. 기원전에 고안된 회화적 요소가 강한 전서는 나중에 예서, 초서, 행서가 되고, 당시대에 해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전서.예서.초서.행서.해서 등 5글꼴 모두 사람들의 예지의 결정이며 문자 구조뿐만 아니라 심미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고려된 것들입니다. 또한 붓.먹.벼루.종이의 발전을 통해 서예는 표현의 폭도 넓혔습니다. 그중에서도 4세기에 활약한 왕희자는 서예의 예술성을 단번에 높이고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조의 교체와 민족의 흥망을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맥맥이 계승되어 온 서예의 진수를 감상하십시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5년)
<출처>
-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