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집권 후 당쟁을 해소할 것을 천명하고 각 당파의 화합을 주선하고, 각 정파의 온건론자를 중용하였다. 또한 주요 청요직에 각 정파의 인물들을 균형있게 등용하였다. 이런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되어 집권 17년차에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성균관 정문에 탕평비를 세웠다. 영조는 당파해소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으나, 노론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근본적인 약점때문에 적극적으로 당파를 제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소론과 가까웠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들었다.
탕평비에는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원문은 예기에 나오는 내용이며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라는 뜻이다. 영조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탕평의 의미를 널리 알리다
여덟 살인 사도세자가 조선 최고의 학교 성균관에 입학 했습니다. 세자의 입학 행사가 진행되기에 앞서 성균관 유생들 가운데 당색이 다른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조는 유생들을 불러 훈계한 뒤 직접 짓고 쓴 글을 내려 비석으로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황극탕평
영조와 정조는 여러 세력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 蕩平策을 실시했습니다. 두 임금의 탕평책은 임금이 치우침 없는 도리를 세워야 한다는 ‘황극皇極’의 이념을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임금의 역할은 북극성北極로에 비유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북극성 주위로 별이 회전하는 것처럼 임금이 인물을 고루 등용하면 나라가 자연스럽게 운영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16세기 무렵 생겨난 붕당黨은 조선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봉당의 세력은 점점 커져 임금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을 강조합니다. 탕평은 유교의 핵심 경전 <서경>에 있는 말입니다. 치우침이 없고 무리 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임금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면 임금의 도가 넓어지고 평탄해져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까지 이른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명의록明義錄은 조선 영조 때 간행된 문헌으로 왕조의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영조 즉위의 정통성, 선왕(숙종)의 뜻고 지명에 대한 해석, 왕도 정치 해설, 도덕적 정치와 인재 등용 강조, 탕평책의 이론적 근거 등이 있다. 내용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도 출간하였다. 주선후기 한글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언해본은 여자들(특히 궁중 여인들)에게 그 내용을 정확하게 전파하기 위해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정적 처벌의 정당성을 한글로 더 널리 알리다.
정조는 영조의 <천의소감>을 모범으로 삼아<명의록>을 편찬했습니다. <천의소감>을 출판할 때도 그러했듯 <명의록>도 한글로 풀어 쓴 언해본을 발간했습니다. 국왕의 정통성을 한글로 더 널리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 책은 목활자와 이를 번각한 목판본으로 인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감란록勘亂錄은 조선 영조 연간에 있었던 반란이나 역모 사건에 대해 국왕이 직접 개입해 신문하거나 지시한 내용을 정리한 문헌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인좌의 난, 사도세자 사건 등이 있다. 감란록에는 사건과 관련된 반역자 심문, 수사 과정, 관련자 질술, 영조의 하교 내용 등을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반란의 원인을 책으로 알리다
영조는 온건파 소론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던 중 급진파 소론이 일으킨 무신란(1728년)에 직면했습니다. 박문수 등 온건파 소론은 무신란을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와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밝혔습니다. 영조는 이 책에서 반란의 근본적 원인을 붕당으로 돌렸습니다. 책을 출판해 자신의 입지를 명확히 하는 방식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어제대훈御製大訓은 영조가 직접 지은 훈시訓示 또는 교훈서적이다. 왕이 신하들과 백성, 또는 후대 군주들에게 유교적 정치이념과 도덕적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지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자기수양의 중요성, 청렴한 정치, 신하와의 관계, 역사로부터의 교훈, 도덕과 정치 등이 있다.

왕위 계승의 정당함을 책으로 알리다
무신란이 끝난 후에도 일부 소론들은 여전히 영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가졌고, 노론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영조는 노론이 경종을 해치려한 혐의로 처벌된 ‘임인옥사壬寅獄事’가 거짓이라는 노론의 주장을 들어주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이 효종-현종-숙종의 삼종혈맥三宗血脈을 이었으며,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되었으므로 본인에게 정통성이 있음을 이 책에서 밝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천의소감闡義昭鑑은 영조가 친히 지은 정치철학적 저술로,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기 위한 정치 윤리의식과 왕도정치 이념을 집대성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의와 명분, 도덕 정치, 탕평의 원리, 경계의 정신, 군신관계 등이 있다. 널리 알리기 위해 한글 번역본도 출간되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밝히다
1755년 나주 객사에 영조를 비방하는 글이 걸렸습니다. 이 사건을 수습하던 중 소론 일부가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하자 영조는 소론을 대규모로 처형했습니다. 이를 ‘을해옥사乙亥獄事’라 합니다. 영조는 이 사건과 경종과 자신의 관계, 즉위 과정의 합법성에 대해 더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한글로 왕의 입장을 더 널리 알리다
영조는 <천의소감>을 활자로 간행해 주요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이듬해 이 책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자 목판으로 발간하고, 한글로 풀어 쓴 언해본도 만들었습니다. 목판으로 대량 인쇄가 가능하고, 언해본으로 독자층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이 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 이념을 백성에게 알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정적 처벌의 사유를 책으로 밝히다. 정조도 영조를 따라 책으로 입장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세손 시절 일기를 <명의록>에 수록했습니다. 홍인한과 정후겸이 자신의 대리청정을 방해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자세히 적은 일기입니다. 핍박받은 이미지를 내세워 즉위 후 그들을 벌한 처분을 정당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정적 처벌의 정당성을 한글로 더 널리 알리다
정조는 영조의 <천의소감>을 모범으로 삼아 <명의록>을 편찬했습니다. <천의소감>을 출판할 때도 그러했듯 <명의록>도 한글로 풀어 쓴 언해본을 발간했습니다. 국왕의 정통성을 한글로 더 널리 알 리고자 한 것 입니다. 이 책은 목활자와 이를 번각한 목판본으로 인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장주묘암도漳州茆庵圖는 1746년(영조 22년)에 어명으로 제작한 회화 작품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와 군주 수양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자가 지은 묘암茆庵과 그가 강조한 기수무우沂水舞雩의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수무우’는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춤을 추며 즐기는 장면으로, 유교적 이상 세계를 상징한다.



영조가 꿈꾼 탕평의 이상을 그리다
1746년 영조의 명으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그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중국 남송의 주희(1130-1200)가 푸젠성 장저우 지사로 있을 때 그 후원의 모습을 상상한 그림입니다. 영조는 이 그림을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공정함에 힘쓰는 뜻을 함께하고자 그렸다고 적었습니다. 묘암 창문에 그려진 태괘와 복괘는 소통과 부흥을 뜻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백성을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
각각의 바위 위 글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고, 왼쪽은 백성이 미미해 보이더라도 항상 두려워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년의 영조가 백성을 생각하며 그린 것입니다. 정조는 즉위 후 이 그림을 영조의 글과 함께 첩으로 제작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탕평의 길로 나아가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지향점이 같아도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아도 의견이 달라 분쟁이 생깁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189세기 초,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대립했습니다. 숙종의 맏아들 경종이 즉위한 뒤 노론의 후원으로 왕세제에 책봉된 영조는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영조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거진 정통성 문제나 붕당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높았습니다. 그는 치우치지 않고 여러 붕당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높았습니다. 그는 치우치지 않고 여러 붕당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붕당으로 혼돈된 상황을 정리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 책이나 탕평의 뜻을 담은 글과 그림으로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탕평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재들의 지혜를 모아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영조는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듣고 실질적인 방안을 찾았습니다. 영조를 계승한 정조도 탕평 정치를 이어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청계천 준천淸溪川 準川은 조선 후기 영조 대에 시행된 청계천 정비 사업, 즉 청계천 준설 및 개·보수 사업을 말한다.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 홍수 문제 해결과 도시 치수를 정비하기 위한 대공사였다. 영조의 민생 중시 정책과 실용주의 개혁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백성을 위한 준천 사업
수문 위 왕의 자리가 보입니다. 청계천 바닥 흙을 걷어내는 준천 작업을 영조가 직접 보고 있습니다. 청계천 물이 매년 넘쳐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영조는 준천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관련 글과 그림으로 화첩을 제작했습니다. 이처럼 왕이 자신의 업적을 그리게 한 일은 조선시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애민 정책을 알리는 글
영조가 여자 종의 공역을 줄이고 느낀 바를 표현한 시입니다. 영조는 여자 종이 납부하는 공물을 줄이라고 명했습니다.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한 것으로 몇 백 년 만에 폐단을 바로 잡게 되어 기쁘다”라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영조는 백성을 향한 자신의 의지와 정책을 윤음이라는 문서로 많이 내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탕평의 지향점은 애민愛民
영조가 붕당의 갈등을 잠재우고 탕평의 길로 나아가려 한 이유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인재들의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세금을 반으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하려면 줄어든 세수를 확보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영조는 노·소론 관리들과 상의하고 일반 백성들도 직접 만나 정책에 대한 의견을 들으며 균역법을 보완해 나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글과 그림으로 뜻을 전하는 영조의 전략
털이 복슬복슬한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습니다. 삽살개가 이토록 사납게 표현된 이유는 그림 위 영조가 직접 쓴 시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부룹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아무 때나 짖는 삽살개는 영조의 눈에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보였던 듯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