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국왕이 곳이자 국왕과 신하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의 중심이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천도를 결정하면서 새로운 수도와 궁궐터를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이 궁궐을 짓고 수도를 건설하는데에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중국 주나라《주례》의 「고공기>를 기본으로 하여, 풍수지리사상과 군사,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태조 4년(1395)에 종묘.사직과 함께 수도 한양에서 제일 먼저 건설되었다. 도시의 설계에 있어서 궁궐을 중앙에 두고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두기는 했지만, 「고공기」에 정의된 궁궐 뒷편에 시장을 비롯한 주거지를 둔다는 개념은 지켜지지 않고 궁궐 앞 육조거리 동쪽에 세워지는 등 풍수지리사상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

국왕의 공간, 궁궐
궁궐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국왕을 비롯한 왕실 구성원들의 생활공간이다. 조선왕조는 국가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풍수지리에 따라 수도를 옮기고 새로운 터에 궁궐을 건립했다. 북쪽의 백악산을 주산(主山)으로 남쪽의 목멱산(남산), 동쪽의 타락산(낙산)과 서쪽의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이 수도로 정해졌으며 백악산을 뒤로하여 법궁인 경복궁을 세웠다. 이후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모든 궁궐은 성리학적 이상을 바탕으로 효와 예, 왕도정치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 이상사회 구현의 철학을 담아 조성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용은 왕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물을 다스리는 동물로 여겨졌다. 조선 왕실에서는 물의 기운을 가진 용을 궁궐에 장식해 불의 기운을 눌러 화재가 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건물에 따라 취두(驚頭)를 장식하는 자리에 용두를 대신 장식하기도 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잡상(雜像)은 궁궐 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나란히 놓인 작은 흙인형들이다. 궁궐 건물에서 가장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지붕 모서리(추녀마루)에 신령스러운 인형들을 세워 살(煞)을 막고 화재를 예방하고자 했다. 잡상의 모델은 《서유기》 주인공인 당나라 삼장법사 일행이다. 이는 중국 자금성 추녀마루에 있는 잡상들과 동일하다.







궁궐 지붕에 올린 장식기와, 雜像
잡상은 기와지붕 위 추녀마루에 흙으로 빚어 올린 장식기와다. 궁궐의 재앙을 막아주기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과 토신土神들을 형상화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액운을 막아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전각의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잡상의 수를 달리하여 5개부터 최대 11개까지 올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청기와는 점토 기와에 염초 유약을 발라 푸른빛으로 구운 고급 기와로, 조선 초기에는 궁궐 주요 전각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사치 억제와 비용 문제로 사용이 줄었으며, 현재는 창덕궁 선정전의 청기와 지붕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자미당지에서 출토된 청기와는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 사용된 고급 기와의 실물을 보여주는 유물로, 점토에 염초 유약을 발라 구워낸 푸른빛이 특징이다.







창덕궁 선정전은 궁궐 건물 중 청기와 지붕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전각이다. 1647년 창덕궁 중건 시, 인경궁 전각을 옮겨오면서 청기와가 함께 사용되었다.

청색 기와, 조선
청기와는 표면에 녹색, 청색 등의 반짝이는 유약이 시유된 기와이다. 지금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지만 《조선왕조실록》등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편전인 사정전처럼 위계가 높은 건물에 청기와를 사용해 국왕의 위엄을 높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경복궁 자미당지(紫薇堂址)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청기와가 다량 확인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석수(石獸, 돌짐승)는 잡상과 마찬가지로 벽사(나쁜 기운을 물리침)를 가지고 있다. 석수는 땅과 물의 경계에서 궁궐의 안녕을 지키는 존재이다. 궁궐 입구 금천교 위에 해치와 천록이 있으며, 정전 월대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四神)과 십이지신이 세워져 있다.




상서로운 동물형상의 석수
조선 궁궐에는 정전과 같은 중요한 건물 곳곳에 상서로운 동물 형상의 석수가 배치되어 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월대에는 석수로 동서남북을 다스리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즉, 사방신(四方神), 12방위에 따른 동물 신 십이지, 하늘의 별을 28개 구획으로 구분한 별자리 이십팔수(二十八宿)를조화롭게 배치해 국왕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신하와 백성이 자연히 모여드는 조화로운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밖에도 액을 물리치고 좋은 기운을 불러 온다 여겨진 상상의 동물인 해태, 사자 등의 석수를 두어 왕이 있는 공간에 위엄을 더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시대 궁궐 기록인 <궁궐지>는 숙종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지금은 헌종 대 증보판과 순종 대 편찬본이 전한다. 헌종 대 증보판은 기존 내용에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추가하여 전각의 위치와 주요 사건을 기록했고, 순종 대 편찬본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건물 규모와 구조를 상세히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 궁궐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숙종의 명으로 처음 편찬되어 현재는 헌종 대 증보본과 순종 대 편찬본이 전한다. 헌종 대 증보본은 숙종 대 편찬본 이후 세운 전각들을 추가하고 《국조보감》 다른 문헌을 더 참고하여 관련 자료를 모아 편찬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용그림 부적과 ‘수(水)’자 부적은 건물의 보이지 않는 곳(천장이나 기둥 사이)에 숨겨둔 장치이다. 조선시대 궁궐은 대형 목조 건물로 화재에 취약해 이를 방지하고자 하는 바램이 담겨 있다. 경복궁 경회로 연못에는 실제 청동으로 만든 용을 두마리 집어넣기도 했다.

화재가 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붉은색 종이에 용을 그린 부적이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지녔다고 여겨져 화재를 예방하는 의미로 사용 되었다. 2001년 근정전 중수 공사 때 ‘수水’자 부적과 함께 발견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화재가 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수水’자를 1,000여 자의 작은 ‘용龍’자로 채워 만든 부적이다. 2001년 근정전 중수 공사 중 발견됐는데 《경복궁 영건일기 景福宮營建日記》의 ‘수’자 부적 2점을 근정전 상량식 때 봉안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화재가 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물을 의미하는 ‘수水’자를 새겨 만든 은판 부적이다. 육각형 은판을 서로 붙이면 모서리에 새겨진 ‘수’자가 3개 모여 끝없는 물을 뜻하는 ‘묘淼’자가 되어 화재 예방의 의미를 강화한다. 용 그림 부적, ‘수水’자 부적과 함께 근정전에서 발견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도중에 청동용이 출토되었다. 경회루의 건축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경회루전도>에 의하면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주역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연못에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용 두마리를 넣었다고 한다.


1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서 발견된 청동용이다. 1865~1868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남긴 기록인 《경복궁 영건일기 景福宮營建日記》에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경회루에 청동으로 만든 용 한 쌍을 가라앉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발견된 것이다. 물을 다스린다고 여겨진 용으로 불의 기운을 눌러 화재를 예방하고 궁 궐을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궁궐은 왕실 생활과 국정 운영의 중심지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내병조 지휘 아래 여러 군영이 궁궐 안팎과 문을 3중으로 경비하였다. 특히 정전과 편전은 별도의 군관이 호위했으며, 출입 시에는 신부·한부 등의 표식이나 명패 등 신분과 상황에 따른 절차가 필요했다.

야간 통행 허가 증표이다. 조선 시대에는 야간에 궁궐을 출입하거나 도성을 통행하는 일이 금지되었으나 이 증표를 지니고 있으면 통행할 수 있었다. ‘통부通符’라고 새기고 그 위에 다시 같은 글자의 낙인을 찍어 위조를 방지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궁궐 내부 경비를 담당한 위장소의 인장, 衛將所印, 조선
궁궐 내부 경비를 담당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위장이 숙직하던 위장소에서 사용한 인장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경비를 위해 동, 서, 남, 북 사소(四所)가 설치되었다. 사소에는 위장소와 부장소가 설치되었는데 위장과 부장이 1명씩 입직하고 맡은 구역을 시간별로 나누어 순찰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궁궐 호위를 담당한 호위청의 인장, 扈衛廳印, 조선
조선 후기 궁궐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된 병조 소속 관청인 호위청(扈衛廳)의 인장이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이후 궁궐의 야간 경비를 위해 1623년에 만들어졌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조선 시대 궁궐 및 도성의 야간 순찰을 책임졌던 순장(巡將)의 신분증이다. 한 면에는 ‘순패巡牌’가, 다른 면에는 ‘신信’자가 찍혀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왕의 호위병인 금군이 야간에 도성의 정문을 통과할 때 사용한 출입 허가 증표이다. 이 증표에는 각각 해당하는 문과 시간대가 적혀 있다. 둘로 갈라서 한 쪽은 각 문의 수직소(守直所)에서 보관하고 다른 한 쪽은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숙직하는 금군에게 배부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출처>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3.25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3월 25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