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초기에는 중국의 역법과 과학기술을 사용했으나, 세종대에 자주성과 왕실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이를 발전시켰다. 역법은 조선의 지리적 조건에 맞게 보정되었고 표준시계를 할 수 있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같은 시계가 제작되었다. 이후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다양한 해시계가 만들어졌다. 이외에 농업생산과 관련된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경제생활의 기본이 되는 도량형 표준이 되는 자나 저울추 등이 국가주도로 만들어졌다. 고궁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천문.과학과 관련된 유물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중요하며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조선시대의 측우기와 측우대는 높은 정밀도를 자랑하던 기상 관측 장비였다. 1441년 세종대왕 때 문종(당시 세자)의 아이디어로 제작되었다. 측우기는 측우대라는 돌받침대에 올려 고정시켰으며, 지면에서 튀어 오르는 빗물이 측우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오류를 차단했다. 측우기는 창덕궁 이문원과 팔도 감영과 개성부/강화부에 설치하여 그 기록을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고궁박물관에서는 창덕궁 이문원에 설치되었던 측우대를 볼 수 있다.

측우대에 새긴 글
“빗물의 양을 측정하는 전통은 세종 24년(1442) 제작한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의 구리 측우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운관과 각도의 군·현에서는 비가 올 때마다 빗물의 양을 측정하고 보고했습니다. 영조 46년(1770)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 경희궁 두 궁궐과 팔도, 양부(강화·개성)에 설치했습니다. 그 그릇은 비록 작으나 두 성군께서 홍수와 가뭄을 다스리고자 힘쓴 뜻이 담겨 있으니 어찌 소중치 아니합니까 …. 이 측우기는 임금과 백성의 걱정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으니 신들이 감히 공경히 지키고 부지런히 살피지 않겠습니까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비가 내린 양을 재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1441년(세종 23) 측우기와 측우대를 처음 만들고 전국에 설치하여 강수량 측정을 제도화했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 전란을 겪으며 중단되었다가 1770년(영조 46)에 재정비되었다. 이 측우대는 1782년(정조 6) 제작하여 창덕궁 이문원(擒文院, 규장각 부속건물) 앞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네 면에는 측우기를 세운 연원과 내력을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해시계(Sundial)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나는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하던 시계로 가장 원초적이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시계이다. 태양의 궤도를 투영한 평면 시반에는 절기선과 시각선이 그려져 있어 하루 동안 매 시간 그림자의 위치와 길이가 바뀌고, 계절에 따라 태양 남중고도의 변화로 그림자의 위치와 길이가 바뀌는 것을 이용하여 시각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보통의 해시계는 평평한 평면형 해시계이나 앙부일구처럼 오목형 해시계도 있다.

앙부일구를 올려놓았던 받침대이다. 상단 네 면에 홈을 파 앙부일구를 고정할 수 있게 하였다. 몸체에는 연잎, 구슬, 불수감 등 다양한 무늬를 새겨 넣어 장식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9년)

청동으로 만들고 은으로 글씨를 새겨 넣은 앙부일구다. 시각 눈금은 1654년(효종 5) 이후 사용한 12시 96각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한양 북극고도가 37도 20분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1713년(숙종 39) 실측한 값인 37도 39분 15초와 차이가 있어, 171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조선 후기에 제작된 앙부일구다. 1713년(숙종 39) 실측된 한양의 북극고도 값인 37도 39분 15초가 새겨 있어, 1713년 이후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을 음각으로 새겼고, 다리와 시계판을 연결하는 부위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1899년(광무 3) 제작된 앙부일구다. 뒷면에 새겨진 글씨를 통해 제작자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제작자 강건(1843~1909년)은 형 강윤(1830~1898년)과 함께 조선 말~대한제국 시기에 앙부일구를 여럿 제작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1881년(고종 18) 강윤이 만든 휴대용 앙부일구다. 위에는 나침반을 두어 방향을 맞출 수 있게 했고, 아래에는 영침 그림자가 가리키는 위치로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몸체 앞면에는 한양의 북극고도가, 뒷면에는 제작자와 제작 시기가 적혀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조선시대에는 하루를 12시(時)로 나누었으며, 각 시는 오늘날의 약 2시간에 해당한다. 12시는 십이지로 표시했으며, 세분화할 때는 각(刻)이나 점(點)을 사용했다. 물의 흐름을 이용한 자격루(물시계)가 표준 역할을 했으며, 해시계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밤에는 별자리 위치를 참고하였다.


조선시대 시간 체계
조선시대에는 현재와는 다른 시간 체계를 썼습니다. 하루를 24시 대신 12시로 나누고, 매시를 다시 둘로 나눠 초初와 정正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밤 11시에서 1시는 자시子時에 해당하는데, 자시는 다시 자초(子初), 자정(子正)으로 나뉩니다. 시보다 더 작은 시간 단위는 각刻입니다. 조선전기에는 12시를 100각으로 나누었고, 시헌력을 적용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는 96각으로 나누었습니다. 낮과 밤 시간을 균일하게 파악하는 현재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밤 시간을 파악하는 데 별도의 체계를 사용했습니다. 해가 질 때부터 다시 뜰 때까지의 밤 시간은 5경 5점으로 나누었는데, 계절마다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실제 밤의 길이를 반영해 경과 점의 길이가 절기마다 달라 졌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해시계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해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해시계는 해그림자로 해의 위치를 파악하고 운행 주기를 측정함으로써 시간을 알 수 있는 장치입니다. 앙부일구는 오목하게 생긴 해시계로, 1434년(세종 16)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 후기까지 가장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천문학이 전해지면서 다양한 작도법에 따라 편평한 모양의 평면 해시계도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천문 관측 기구로, 해와 별의 위치를 이용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이다. 해시계는 밤에 쓸 수 없고, 물시계는 겨울에 얼거나 관리가 까다로운 단점이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일성정시의는 고도의 기하학적 계산이 반영된 4개의 고리(환)로 구성되어 있다. 낮에는 조준 장치를 이용해 태양의 그림자를 일구륜에 투영싴고 그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을 읽어 현재 시각을 파악했다. 밤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별들의 움직임을 이용했다. 중국의 천문 기구를 참고했으나, 북극고도(위도)를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맞게 조정하였다. 일성정시의는 총 4개가 제작되어 궁궐과 전방 요충지에 배치되었다.

일성정시의는 고도의 기하학적 계산이 반영된 4개의 고리(환)로 구성되어 있다. 주천륜(周天輪)은 하늘의 회전 각도를 나타내는 가장 바깥쪽 고리이다. 일구륜(日晷輪)은 낮에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구륜(星晷輪)은 밤에 별의 위치를 맞추어 시간을 측정하는 고리이다. 정극환(定極環)은 북극성을 기준으로 기구의 수평과 방향을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출토된 부분은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이다.

1437년(세종 19) 세종의 명으로 제작한 시계이다.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측해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동안 일성정시의 형태와 구조는 문헌 자료를 통해 유추해 왔으나, 2021년 인사동에서 일부가 출토되어 처음으로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출토된 부분은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일부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일성정시의
낮에는 해의 움직임을 따라,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해 시간을 측정했던 기구입니다. 눈금이 표시된 고리가 세 개 있는데, 각각 시간 보정용, 해시계, 별시계에 해당합니다. 또 해와 별의 위치를 맞추는 데 사용하는 계형(界衡), 관측의 기준점을 잡는 데 사용하는 정극환(定極環) 등으로 구성됩니다. 낮에는 계형에 있는 두 가닥의 실로 해의 위치를 맞춘 후, 해시계 고리의 눈금을 읽으면 시간을 알 수 있고, 밤에는 정극환으로 북극을 맞춘 후 계형으로 제성(帝星, 작은곰자리 베타별)을 따라가면서 별시계 고리의 눈금을 읽으면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1437년 세종의 명으로 처음 만들어 경복궁과 서운관, 함경도와 평안도에 각각 1개씩 두었습니다. 이후 형태를 간소화해 각 지방 군영에서 사용할 수 있게 했고, 해시계 기능만 분리해 소일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소일영(小日影)은 조선 세종 시대에 제작된 휴대용 해시계이다. ‘앙부일구’가 주로 일정한 장소에 설치되어 사용되었다면, 소일영은 야외 활동이나 군사 작전, 이동 중에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소일영은 태양의 남중 고도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이용한다. 지침을 북극 방향으로 향하게 한 뒤, 태양 빛을 받아 반환(눈금판) 위에 생기는 그림자의 위치를 읽었다. 절기마다 달라지는 태양의 위치를 고려하여 정밀하게 보정된 눈금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차가 적었다.
백각환(百刻環)은 일성정시의를 구성하는 핵심 부품 중 하나로, 하루의 시간을 100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정밀한 눈금 고리이다.

해시계 소일영의 주요 부품인 백각환이다. 백각환에는 조선 전기 시각법인 12시 100각에 따라 100개의 눈금이 그어져 있다. 백각환에는 시계 바늘에 해당하는 계형이 부착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에는 소일영 전체 모습이 담겨있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계형 중앙에 원통형 기둥이 있고, 양방향으로 기둥과 계형 끝을 연결하는 실이 매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계형을 돌려가며 두 개의 실 그림자가 일직선이 되는 곳의 눈금을 읽으면 시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백각환 받침이다. 네 면 둘레를 따라 홈을 팠고, 한쪽 면 중앙에 홈과 연결된 둥근 못을 두었다. 홈과 못에는 물을 흐르게 하여 수평을 잡고 못에 지침을 띄워 정남 방향을 맞췄다. 못 반대편에는 사다리꼴 모양 백각환 꽃이가 있다. 가운데에는 영조가 1726년(영조 2)에 지은 시를 새겼다.

소일영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받침대이다. 상단 네 귀에 홈을 파 백각환 받침을 고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네 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숙종의 시로, 《궁궐지宮闕志》 1책 <제정각齊政閣>에도 실려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소일영
해시계의 한 종류로, 밤낮 모두 사용하는 시계인 일성정시의에서 해시계의 기능만 살려 만든 시계입니다. 백각환, 받침대, 일영대로 구성됩니다. 백각환은 시계 눈금판에 해당하며 가운데 끼운 두 가닥의 실이 걸려 있는 계형을 돌려 해의 위치를 맞춘 후 백각환의 눈금을 읽으면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백각환은 금속 받침대에 끼워 사용했고, 이를 다시 일영대에 올려 안정적이고 편리하게 관측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조선은 용도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평면해시계도 함께 사용하였다. 평면해시계는 평평한 판 위에 영침을 세우 단순한 구조로 평면 위에 드리운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로 시간을 판독했다. 앙부일구에 비해 제작과 설치가 쉬워 기초적인 시간 확인용으로 사용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들여온 이후 한양의 위치에 맞치 계절선과 시각선을 수정해 다시 만들었으며 해가 지나가는 길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을 적용하여 다양한 평면해시계를 만들었다.

지평일구 설계도이다. 청나라 수학서인 《어제수리정은(御製數理精蘊)》에 수록되어 있는 설계도를 참고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대 실측한 북극고도가 반영되어 있어 1713년(숙종 39) 이후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명나라 이천경 등이 제작한 ‘신법지평일구’를 들여와 한양 북극고도에 맞게 수정해 만든 것이다. 앙부일구의 시각선과 절기선을 평면 위에 펼친 모양이다. 상단에 ‘新法地平日晷신법지평일구’라고 시계 이름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두 종류 해시계를 돌 하나에 새겼다. 윗 쪽이 간평일구, 아래가 혼개일구이다. 해시계는 해 그림자로 해의 위치를 파악해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장치인데 간평일구와 혼개일구는 서로 다른 작도법을 사용해 해의 위치를 표시하도록 한 것이다. 한양의 북극고도가 새겨져 있어, 한양을 기준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강윤이 제작한 평면 해시계이다. 해 그림자를 받아 시각을 측정하는 시반면(時盤面)과 삼각형 모양의 영침(影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반면 상단에 동그란 홈이 나 있고 둘레에 24방위를 표기했다. 홈에는 물을 채우고 지침을 띄워 정남 방향을 맞췄다. 영침 그림자 끝이 가리키는 곳 눈금을 읽어 시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시각법인 12시 96각 체계를 따르고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평면 해시계
조선 후기에는 솥 모양의 앙부일구와 달리 해 그림자가 생기는 면이 편평한 평면 해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평면 해시계는 청나라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이 고안하고 이천경이 만든 것을 소현세자가 1645년에 조선에 처음 들여왔습니다. 이후 한양의 위치에 맞춰 계절선과 시각선을 수정해 다시 만들었습니다. 또한 해가 하늘에 지나가는 길을 평면에 표현하는 여러 방법을 적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평면 해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자격루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자동 물시계로,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라는 뜻을 가진다. 세종 때(1434년) 장영실이 완성하여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자격루는 인형이 종과 북을 쳐 시간을 알리면, 신호가 광화문을 거쳐 전달되어 도성에 시각이 공지되었다. 이에 따라 인정(통행금지 밤 시각)과 파루(통금해제 새벽시각)에 맞춰 궁궐과 도성문이 열리고 닫혔으며, 낮에는 오정, 밤에는 계절에 따라 1경부터 5경까지 시간을 알려 생활 리듬을 조절하는 표준시계 역할을 했다. 이후 자격루는 소실되어 1536년 다시 제작되었고, 그 일부인 물항아리(파수호, 수수호)가 남아 있다.

물시계
그릇에 일정한 속도로 흘러든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입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물시계로는 자격루가 있습니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장영실이 만들어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처음 설치 했습니다. ‘스스로 치는 시계’라는 뜻의 자격루는 물을 받는 항아리인 수수호의 물이 일정량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종, 북, 징을 쳐 시각을 알려주게 만들었습니다. 해시계나 별시계와 달리 밤과 낮, 맑은 날과 흐린 날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어서 표준 시계로 쓰였습니다. 일정한 시간마다 자격루에서 울리는 북과 종소리는 광화문을 거쳐 궁궐 밖 종루에 전달되어 도성 전체에 시간을 알렸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중종 대인 1536년에 제작된 자동 물시계 자격루의 일부이다. 물을 채워 흘려보내는 청동 항아리인 파수호 3점과 물을 받는 원통형 항아리인 수수호 2점이다. 크기가 가장 큰 파수호에 새겨진 ‘嘉靖丙申六月日造가정병신육월일조’를 통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수수호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상단에는 자격루 제작에 참여한 12명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자격루는 시각의 단위에 따라 서로 다른 악기를 울려 구분을 했다. 종(鐘)은 매 시(時)마다 울렸으며, 북은 밤시간인 경(更), 징은 세부 단위인 점(點)마다 울렸다. 격루의 종소리가 울리면 이를 들은 관리가 광화문과 종루(보신각)의 종을 이어 쳤다.


자격루에서 물을 받는 항아리인 수수호 내부 부속이다. 부표에는 눈금을 표시한 긴 막대를 고정시킨다. 수수호 속 물이 차오름에 따라 부표가 떠오르면 부표에 꽃힌 막대 끝이 구슬 방출 기구를 건드려 일정 시각마다 구슬을 떨어트린다. 떨어진 구슬은 종, 북, 징을 치는 인형을 작동하여 시각을 알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자격루에서 구슬을 방출하는 부속품으로 2021년 인사동에서 출토되었다. 주전은 구멍이 뚫린 동판에 구슬 방출 기구를 끼우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절기별로 밤의 길이가 다르므로, 주전의 동판은 철기마다 구멍 간격이 다른 것을 사용했다. 전시된 동판에는 ‘一箭’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밤 길이가 가장 긴 동지에 사용한 것이다. 원통 안에 구슬이 담겨져 있다가 부표 막대가 갈고리 모양을 건드리면 은행잎 모양 구슬막이가 열리면서 구슬이 빠져나오도록 만들어졌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시대 한양의 시보 체계
경복궁 자격루에서 종, 북, 징을 쳐 시간을 알리면 광화문, 의금부 및 한양 곳곳에 설치된 전루소(傅漏所)를 통해 신호를 전달했고, 보신각 종루에서 도성 전체에 시간을 알렸습니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시간 알림은 백성들의 통행과 관련된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였습니다. 인정은 초경 삼 점에 종을 28번 쳐 도성 문을 닫으며 밤의 시작을 알렸고, 파루는 오경 삼 점에 종을 33번 쳐 밤의 끝을 알리며 도성 문을 열었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의 과학
조선시대에 과학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보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국왕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천문, 농업, 의학, 무기제조 등 과학기술 연구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늘의 여러 현상을 살펴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는 천문학을 통해 백성이 때에 맞춰 농사를 짓고 생업에 힘쓰게 했으며, 국왕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국왕은 중국의 천문 과학기구와 역법을 연구하고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추어 쓸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앙부일구나 자격루 같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과학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과학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이어 갔습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출처>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4.04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4월 4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