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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사굴산 굴산사지(사적), 통일신라 구산선문 사찰이었던 절터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옛 절터인 굴산사지(사적)이다. 굴산사(掘山寺)는 통일신라 후기(851년)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선종을 크게 전파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굴산문의 중심 사찰이다. 범일국사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동안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고 전파하였다. 구산선문은 기존 교종의 교리 중심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주는 본래 의미를 전한다는 선종의 성격을 갖고 있다. 통일신라말기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유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의상대사의 화엄십찰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불교의 경향을 보여주는 사찰들이다. 굴산사는 후삼국시대 세력균형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던 강릉지역 호족들의 지원을 받았던 사찰로,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 또한 이 지역 호족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굴산사는 고려시대 호족의 지원을 받아 크게 번창했으나, 조선초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강릉 굴산사지(사적)>

통일신라 후기 선종을 이끌었던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을 이끌었던 굴산사 절터(사적)이다. 강릉지방 호족들의 지원으로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으나, 폐사되었다. 절터는 농경지로 사용되었다가 1949년 대홍수로 주춧돌 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굴산사 절터였음이 확인되었다. 절터에는 굴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범일국사 사리를 모신 승탑과 당간지주, 석조불상 등이 남아 있다.

<2012년 발굴.조사 중인 모습>

법당, 승방, 회랑, 탑이 있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굴산사는 사굴산문(闍掘山門)의 중심 사찰로 전성기 사찰영역의 반경 300m에 이를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옛 건물터로 보이는 부분>

<건물터 발굴.조사 모습>

<굴산사지 승탑(보물)>

이 승탑은 통일신라 진성여왕대에 활동했으며 굴산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추정되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나 조각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 한쪽편에 남아 있는 작은 샘인 석천>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스님의 탄생설화가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범일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공부한 후 귀국하였으며, 당나라에서 만난 이지역 출신 승려의 간청으로 이곳에 굴산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범일은 강릉 지역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되고 있다고 한다.

<당간지주(보물)>

굴산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보물)이다.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가장 큰 규모로 전반적으로 조각수법 등이 단순하고 소박하나 웅장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당간지주가 있는 이곳은 건물터가 있는 곳과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옛 굴산사가 상당힌 큰 규모의 사찰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보물,
신라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귀가 멀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절에 행사가 있사찰을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 앞에 세워지며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 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뽀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안내문, 강릉시청, 2012년)

대관령 남쪽 사굴산 자락에 창건된 굴산사는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산중 사찰은 아니고, 동해안에서도 가장 넓은 평야지대가 있는 강릉 지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굴산사 절터 대부분은 지금은 농지로 사용되고 있기때문에 정확한 사찰규모와 영역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최근에 발생한 수해로 절터의 일부분이 발굴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굴산사 절터임을 알 수 있는 유물로는 사찰입구에 세워졌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보물)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보물)와 석조불상 등이 남아 있다.

<굴산사 뒷편으로 보이는 백두대간>

평창과 연결되는 대관령, 정선과 연결되는 삽당령 길에서 멀지 않은 교통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지역>

굴산사지 주변은 영동지방에서 농지가 넓고 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호족의 지원을 받아  구산선문의 중심을 큰 사찰이 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번창했기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견제를 받아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 굴산사지, 사적,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이 곳은 신라 선종 9산 중 사굴산파가 시작된 절인 굴산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굴산사는 신라후기 범일 스님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범일스님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을 보내는 동안 신라의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3대 임금으로부터 국사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불법을 공부하고 전파하는데 힘썼다. 굴산사가 언제 창건되고 폐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절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절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변에 위치한 유적과 유물을 볼 때, 그 범위가 매우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와 범일스님의 사리탑이라 전해지는 부도, 돌부처상 3구 및 많은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다. 또한 범일스님이 태어났을 때의 전설이 깃든 석천과 학바위가 있다. 굴산사지는 강원도 영동지방의 옛 불교 신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안내문, 강릉시청, 2012년)

<석조불상이 있는 보호각>

굴산사지에서 멀지 않은 농가 부근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이다. 원래 3구의 석불좌상이 있었다고 하며, 2구는 인근 암자에 있고, 1구만이 이 곳에 모셔져 있다.

<석조불상>

통일신라 불상의 화려한 조각수법은 보이지 않고, 둥글고 긴 얼굴, 평면적인 신체, 투박한 조각 수법 등으로 볼 때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머리에 지붕돌을 얹고 있으며, 얼굴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각수법이 투박한 느낌을 주면서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불상으로 당시 이 지역 불상 조각의 경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불상 손갖춤>

불상은 비로자나불의 손갖춤을 하고 있다. 나머지 2구의 불상과 함께 비로자나불 삼존불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굴산사지 석불좌상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 절터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이곳에 있는 3구의 석불 가운데 완전한 2구는 근처의 작은 암자에 있고, 머리부분이 없어진 1개는 우물가에서 발견되어 이곳에 모셨다. 이는 비로자나불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비로자나불 삼존불을 모신것으로 생각된다. 얼굴은 둥글고 긴 타원형이며, 어깨는 움츠린 듯하다. 옷의 표현이 두꺼워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으며, 가슴 부근에 있는 손의 모습은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이 불상은 둥글고 긴 얼굴과 평판적인 신체에 곡선적인 조각 등 고려 전기에 유행한 자연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역적 특색을 담고 있다.  (안내문, 강릉시청, 2012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강릉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