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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지리산 쌍계사(雙磎寺), 우리나라 불교음악을 이끌어 온 사찰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쌍계사(雙磎寺)이다. 쌍계사는 통일신라 때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화상과 대비(大悲)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삼법은 의상대사의 제자로 당나라에서 혜능대사의 머리를 모셔다가 지금의 금당자리에 모시고 절을 세우면서 옥천사(玉泉寺)라 이름 지었다. 통일신라 말 진감(眞鑑)선사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지리산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 자리잡았다.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차를 들여와 절 주위에 심었으며, 당나라에서 불교음악인 범패를 가려쳤다고 한다. 이후 정강왕 때 두개의 계곡이 만나는 자리라 하여 쌍계사(雙磎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리산 일대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참전했던 까닭에 쌍계사 또한 화재로 전각들이 불타버렸던 것을 화엄사을 중건한 벽암(碧巖)대사가 사찰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동 쌍계사>

지리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 사찰로 자연지형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산지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쌍계사 들어가는 길

쌍계사는 우리나라에 불교 음악을 도입한 진감선사와 조선후기 벽암대사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쌍계사는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 사찰로 전각의 규모는 크거나 많지는 않은 편이며, 경내에는 큰 석탑은 없고 중앙에 국보로 지정된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또다른 특징입니다. 지리산 계곡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잘 활용하여 불전과 요사채들을 배치하여 정원같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특히,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의 3개의 출입문과 그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과 2개의 돌다리가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섬진강변 화개장터에서 시작하여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벚꽃나무길은 계곡과 함께 명성만큼이나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화개천>

쌍계사는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화개천과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2개의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다하여 쌍계사(雙磎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화개천>

<쌍계사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

<쌍계사 앞 마을>

<쌍계사 일주문>

최근에 중수된 것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벽암대사가 쌍계사를 중건할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사찰 일주문 중에는 비교적 내력이 있는 일주문이다.

경내에는 쌍계사를 크게 중창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진감선사 탑비(국보)가 세워져 있다. 진감선사 혜소는 당나라서 출가하여 공부하다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상주와 지리산 등지에서 남종선(南宗禪)과 범패음악을 널리 전하였다. 880년(문성왕 12)에 쌍계사에 입적하였는데 그의 승탑은 원래 제작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탑비는 그의 죽은지 37년이 지난 887년에 지역문인들이 그를 기억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때 왕이 시호를 내렸으며, 그가 수행했던 옥천사’도 ‘쌍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동 쌍계사 일주문
일주문은 속세를 벗어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뜻으로 세운 문이다. 이 문은 1641년(인조 19)에 벽암스님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쌍계사 일주문은 겹처마로 이루어진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처마를 받쳐주는 기둥머리의 장식은 역삼각형의 거대한 모습을 하면서도, 출목의 간격이 넓고 가늘어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넓은 지붕을 가졌음에도 받침기둥을 하지 않고, 대신 기둥 전후에 보조기둥을 설치함으로써 지붕의 안전성을 유지하였다. 일주문으로서는 드물게 팔작지붕인데다 기둥머리 장식의 부재가 가늘고 섬세하여 장식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양식보다는 근대적 성격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천왕문 앞을 지나 금강문과 일주문 오른쪽을 흐르는 개울>

<일주문 오른쪽에 있는 비석군>

<금강문>

하동 쌍계사 금강문
금강문은 일주문을 지나 두번째로 통과하는 문이다.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금강역사가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840년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1641년에 벽암스님에 의해,그리고 1979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각각 중수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기둥의 장식들을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기둥이 높고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의 양 측면에는 비바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풍판을 달았다. 3칸의 중앙을 통로로 개방하였으며, 좌우 측면의 바닥에는 지면에서 약 45 cm 가량 높여서 마루를 깔았다. 좌측에는 언제나 부처님에게 바짝 붙어, 그를 보호하면서 비밀스런내용을 들으려 하였다는 밀적금강을 모시고 있고, 우측에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신을 뜻하는 나라연금강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벽암스님의 글씨이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천왕문>

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 앞을 흐르는 개울과 다리, 천왕문이 보인다. 주위 지형을 잘 활용하여 계단을 통해 단계적으로 오르는 산지사찰의 특징을 잘 구현하고 있다.

<들어가는 길>

개울과 주변 경치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있다.

하동 쌍계사 천왕문
천왕문은 일주문과 금강문 다음으로 통과하는 세번째 문으로, 사천왕상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부처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사방의 수호신으로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쌍계사 천왕문은 1740년에 백봉스님이 창건하였고, 1825년과 1978년에 다시 중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공포를 간략하게 처리하여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한편 천왕문 사천왕상은 목조로 조성 기법이 뛰어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쌍계사 중심영역

쌍계사 천왕문을 지나면 주불전인 대웅전이 있는 중심영역이 배치되어 있고, 개울 건너 왼쪽 언덕에 팔상전과 금당이 있는 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금당이 있는 영역은 쌍계사가 처음 창건되었던 곳으로 보이며, 대웅전이 있는 중심영역은 진감선사가 이 사찰을 크게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을 비롯한 불전을 높은 곳에 두고 승려들이 수행하는 요사채와 진감선사탑비를 낮은 곳에 배치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작은 탑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중요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는 언덕에 자리한 산지사찰로 일주문에서부터 대웅전까지 여러개의 계단과 통로를 통해서 들어가며 높은 곳에 주불전인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어 웅장한 모습을 더해주고 있다.

<구층석탑>

천왕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보이는 장면이다. 월정사 구층석탑을 모방해서 최근에 조성한 탑이다.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하동 쌍계사 구층석탑.
이 탑은 고산 스님이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삼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이과와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를 모셨다. 이 탑은 국보 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유사한 형식으로 1987년에 시공하여 1990년에 완공하였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쌍계사 강당인 팔영루>

높은 지형에 세운 2층 건물로 앞면 5칸 규모이다. 화엄사 강당과 마찬가지로 주불전을 가리지 않도록 상대적을 낮게 지었으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조선후기에 중건되었지만, 진감선사가 이곳에서 불교음악인 범패를 가르친 장소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장소이다.

하동 쌍계사 팔영루(八詠樓)
팔영루는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서 「어산(漁山)」이란 불교 음악을 작곡한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팔영루는 통일신라 840년에 진감선사가 세웠고, 1509년(중종 4) 중섬선사가 팔영루를 중수하고, 어득강에게 글을 부탁하니 서문과 팔영을 찬양하는 8수의 한시를 지어 놓았다. 이후 1641년(인조 19) 벽암 각성선사에 의해 쌍계사가 중창될 때 쌍계사 대웅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1979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새로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 2층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부처나 보살을 봉안하지 않은 곳이어서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민도리양식이다. 겹처마로 구성되었으며, 단청은 화려하다. 팔영루는 통일신라시대에 진감선사가 처음 세운 뒤 우리 민족에 맞는 불교음악(범패)을 배출한 교육 장소로서 의미가 크다. 또 범패의 명인을 교육시켰던 교육장이었다고도 전한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강당 옆을 돌아서 경내로 들어서면 진감선사를 기리는 탑비(국보)와 주불전인 대웅전이 보인다. 화엄사와 마찬가지로 불전들은 높은 곳에,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수행하는 요사채를 낮은 곳에 두어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통일신라 말 승려였던 진감선사의 탑비로 진성여왕 때(887)에 세워졌다.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거북받침돌이나 이수에서 보여주는 조형미나 조각수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문인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남아 있어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 국보,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신라말의 명승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이다. 선사의 속성은 최씨로 804년(애장왕 5)에 당으로 들어가 신감대사(神鑑大師) 아래에서 계를 받았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신라로 돌아와 역대의 왕에게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옥천사(玉泉寺)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은 885년에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라 추시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고, 정강왕은 옥천사를 쌍계사(雙磎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비석은 887년(진성여왕 1)에 건립되었다.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는데 그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꼽힌다. 전체 높이는 363 cm, 비신의 높이는 213 cm, 너비는 약 1 m, 두께는 22.5 cm이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탑비 왼쪽편에 있는 요사채인 적묵당>

하동 쌍계사 적묵당(寂默堂)
이 건물은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하는 요사채이다. 진감선사가 대웅전과 함께 이 건물을 처음 세운 것은 840년(문성왕 2)이며, 이후 1641년에 중창된 것을 1978년에 다시 중수하여 지금에 전하고 있다. 본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3칸에 들보 5량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거할 수 있게 바닥은 온돌로 되어 있지만 남측 2칸은 대청을 깔아서 2층 구조로 만들었다. 그 아래 부분에는 아궁이가 있고 땔나무를 저장하였으며, 위 우물마루의 대청은 초심자 스님에게 강의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앞 뒤에 툇마루를 두었고, 뒤 툇마루 상부는 특이하게 반자로 천장을 만들었다. 좌우 툇간을 팔작집처럼 대들보 위에 층보를 걸쳐 조성한 것도 흔치 않은 것이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탑비 오른쪽에 있는 요사채인 설선당>

하동 쌍계사 설선당.
이 건물은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하는 요사채이다. 진감선사가 대웅전과 함께 이 건물을 처음 세운 것은 840년(문성왕 2)이며, 이후 1641년과 1801년에 중건, 중수된 것을 1974년에 다시 중수하여 지금에 전하고 있다. 건물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에 들보 5량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설선당은 스님들의 강의를 듣는 공간과 바루 공양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쌍계사 주불전인 대웅전(보물)>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벽암대사가 인조 때 중건하였다.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기둥을 높게 만들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3개소의 불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삼세불이 모셔진 주불단에는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중건한 불전건물로 당시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보물,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772년에 신라의 대비화상과 삼법화상이 옥천사를 세운 것이 기원이다. 정강왕(886~887)이 두 계곡이 만나는 절의 지형을 보고 이름을 쌍계사로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32년에 벽암대사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부처를 모신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다포 양식으로 가운데 세 칸에는 두 개의 공간포를, 좌우 끝 칸에는 한 개의 공간포를 올려 놓았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우물 ‘井’자 모양으로 천장 안쪽을 가닐 우물천장으로 꾸며 놓았다. 쌍계사 대웅전 내부에는 3개소의 불단이 마련되었는데, 삼세불좌상과 사보살입상을 봉안한 주불단과 영가단, 신중단으로 나뉜다. 주불단 상부에는 닫집이 구성되었는데, 짧은 기둥 사이에 창방을 두르고 평방을 얹은 후 다포계의 공포대를 형성하였고, 추녀 및 사래를 걸아 겹처마를 구성하였다. 이 대웅전은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에는 3곳에 불단이 조성되어 있으며, 중심이 되는 가운데 불단에 삼세불좌상과 보살입상(보물)이 모셔져 있다. 뒷편에는 삼세불탱(보물)이 있다.

<쌍계사 주불전인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

진감선사가 쌍계사를 중창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은 남아 있지 않다.

하동 쌍계사 석등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은 절 안의 어둠을 밝힐 뿐만 아니라,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춤으로써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쌍계사 석등은 등불을 놓는 화사석이나 지붕돌과 같은 중요한 부분이 없어서 원형을 알기 어렵다. 위 받침돌은 여덟 폭의 연꽃부리가 위를 향하도록 조각하였으나, 아래 받침돌은 반대로 꽃부리를 아래로 향하여 서로 대칭을 이루게 하였다. 받침돌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된 반면, 석등의 중앙부 기둥은 가늘고 길며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원래의 형태는 알기 어렵지만, 받침돌에 새겨진 치밀한 연꽃무늬와 중앙 기둥의 단조로운 처리 등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쌍계사 대웅전 앞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석탑이다.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명부전>

<명부전 옆에 있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마애불상>

<대웅전 왼쪽에 있는 나한전>

하동 쌍계사 나한전
나한전은 인간 세계의 온갖 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의 경지에 이른 16나한을 봉안하는 곳이다. 나한전은 명부전과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쌍계사 나한전에는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하고 그 좌우에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이 전각은 840년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1641년에 벽암선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규모가 작고 사용된 목재의 치수도 작으며 장식도 생략되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건물의 기단을 화강암으로 높게 쌓음으로써 주변의 대웅전 및 명부전과 균형을 맞추고 있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대웅전 뒷편 금강계단>

통도사 금강계단과 비슷하게 조성해 놓았다.

<금강계단 뒷편 마애불상>

<금강계단 왼쪽편에 있는 화엄전>

쌍계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경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해인사 장경판전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쌍계사 불경 목판,
화엄전은 쌍계사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전각이다. 불경 목판은 1603년에서 1903년까지 여러 차례 제작된 것이다. 수량은 불경과 불교 관련 서적 등으로 총 36종 1743매이다. 우리나라에서 쌍계사는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쌍계사의 말사인 능인암에서 간행하여 쌍계사로 옮겨온 것이며, 나머지는 쌍계사 본사와 국사암, 칠불암 등에서 간행한 것이다. 능인암판은 대부분 1603~1604년에, 국사암판은 1903년에 간행되었으며, 그 나머지의 것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간행되었다. 쌍계사 화엄전에 보관된 불경 목판은 쌍계사의 오랜 역사와 함께하며 400여년에 걸친 목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한판, 국보 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가 훼손되어있지만, 1726년(영조2) 간행된 목판이 있음으로 그 내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쌍계사 불경 목판을 통해 각 시기 많이 읽힌 불경의 종류와 당대를 살았던 고승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해준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사찰 제일 뒷편에 위치한 삼성각>

금당과 팔상전이 있는 영역

오른쪽 개울 건너편 언덕에는 쌍계사를 처음 창건할 때 모셔왔다는 당나라  혜능선사의 머리를 모신 금당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쌍계사를 처음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석가모니의 행적을 그린 영산회상도를 비롯한 팔상도를 모신 팔상전,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 수행공간인 요사채와 강당 등을 고루 갖추고 있어 부속암자처럼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신도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중심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공간이다.

<대웅전 왼쪽으로 흐르고 있는 개울>

<금당과 팔상전이 있는 영역으로 올라가는 계단>

<출입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쌍계사>

<팔상전으로 오르는 길>

<강당 건물인 청학루>

팔영루보다는 작지만 강당건물로서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이곳에 처음 출가한 스님들이 공부했다고 한다.

하동 쌍계사 청학루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건물은 1930년에 쌍계사 주지 손민선사가 중수하였고, 1985년에 지붕을 한차례 고쳤다. 청학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거대한 자연석 주춧돌에 둥글고 굵은 기둥을 세워 마루를 얹고, 옆모양이 ‘ㅅ’자 같은 맞배지붕을 얹었다. 이 누각은 쌍계사에서 처음 스님이 되시는 분들의 수도장소로 사용되었다 한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석가모니의 행적을 그린 팔상도(보물)와 영산회상도(보물)가 모셔진 팔상전>

하동 쌍계사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8개 장면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을 모셔두는 건물이다. 이 전각은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진정국사가 창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1978년에 다시 한번 중수되었다. 팔상전은 쌍계사 대웅전의 영역이 아닌 육조정상탑전 영역에 속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조선후기 다포계 팔작집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둥이 높고 사이의 간격이 넓어 대웅전과 같은 웅장함을 보여준다. 내부의 기둥머리에 장식을 많이 하고, 그것이 사면에서 안으로 피어오르도록 구성함으로써 내부 공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천장은 중앙을 향해 차차 올라가는 층단을 둔 우물천장으로, 내부 공간의 시야를 넓게 터 준다. 불단 위에 걸린 그림은 보물 925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이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영산전 내부>

지금은 다른 그림이 모셔져 있다. 뒷편에 석가모니의 중요한 행적을 그린 팔상도(보물)가 있다.


<팔상전에 모셔졌던 원래의 영산회상도(보물)>.

하동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 보물
바탕 재질은 비단이며 크기는 세로 410 cm, 가로 273 cm이다. 화면 구성은 한가운데 본존인 석가여래가 결가부좌하였고 그 양 옆에 사천왕, 네구의 보살, 여섯 제자 그리고 네 구의 분신불과 팔부중 등이 좌우 동수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본존의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를 들어 낸 우견편단이며 광배는 ‘키’형이다. 각 존상의 형상에 이지러짐이 없고 문양 등 세부묘사가 치밀하며 색감도 붉은색계와 녹색계가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우수한 그림이다. 그림에 쓰여 있는 화기에 의하면 1687년에 제작되었으며, 국내에 현존하는 17세기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불화이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뒷편에 있는 팔상도>

영산회상도처럼 모사본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

<팔상도>

<영모전>

진감선사를 비롯해서 쌍계사에서 수행했던 고승들의 초상을 모신 전각인 영모전.

하동 쌍계사 영모전
영모전은 쌍계사의 창건주인 진감선사의 초상을 비롯하여 지눌대사의 초상, 사명.부휴.벽송.소요.호원대사 등의 초상을 모신 곳으로 인조 19년(1641)에 벽암스님이 중창하고 1978년 고산스님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모전은 불교의 진리와 중생에게 생명의 감로수를 내린다는 뜻을 길이 숭모한다는 뜻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단층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포작을 짜지 않은 간결한 도리집으로 정면에는 모두 2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팔상전 앞 봉래당>

<봉래당 맞은편 요사채인 영주당>

<금당>

팔상전 뒷편 높은 곳에는 쌍계사를 창건할 때 당나라 고승 혜능의 머리를 모셨다는 금당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한다.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전
쌍계사의 창건설화와 관계가 있는 전각으로 중국 불교 선종의 제6대조인 혜능선사의 머리를 모셨다고 전한다. 처음 신라 민애왕 연간에 진감선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이라 한다. 일명 금당이라고도 한다. 전각 안에 있는 육조정상탑은 7층으로 용담선사가 조성했다고도 하며, 주변 목암사터에서 옮겨왔다고도 한다. 육조정상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받침이 없이 툇마루를 두어 지면과 분리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기둥의 간격은 매우 좁고 높이는 낮으며, 작은 규모의 건물임에도 기둥머리를 많이 장식하여 화려함과 품위를 유지하였다. 또한 건물의 규모에 비해 다소 크게 구성된 장식으로 인해 건물이 장중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천장은 낮지만 기둥의 장식들이 중앙으로 피어오르도록 형상화하고, 탑의 상부에는 작은집(닫집)을 마련함으로써 장엄한 느낌을 준다. 쌍게사 건물 중 가장 균형미를 갖춘 건물이라 하겠다. 전각의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9년 중수한 것이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요사채인 동방장>

<맞은 편 서방장>

<쌍계사 뒷편 능선에 위치한 진감선사 승탑(보물)>

삼신산 쌍계사,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는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 불리는 지리산의 남록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쌍계사는 서기 723년(신라 성덕왕 22)에 삼법, 대비 두 스님이 당나라 6조 혜능(慧能)대사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꿈의 계시대로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정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은 것이 처음이다. 서기 830년 진감혜소(774~850)국사꼐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삼법, 대비스님의 옛 절터에다 육조 영당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라 하시고 이곳에서 선(禪)과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를 가리치다 77세로 입적하셨다. 그 후 정강왕은 이웃 고을에 옥천사가 있고 산문밖에는 두 시내가 만단다 하여 쌍계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리셨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 혜수스님에 의해 복원, 중수 중창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의 사격을 갖추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국사암과 불일암이 있고 문화재로는 국보1점, 보물9점,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13점, 기념물 1점, 문화재자료 5점을 보유하고 있다. (안내문, 쌍계사, 2016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