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는 17세기초 당시 유럽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의 진원지로 인구의 1/3이 감소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30년 전쟁 기간 동안 중세에 쌓은 성곽들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새로운 신무기에 대포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강이 있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이탈리식 축성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이후에 전쟁에서 성곽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에는 황제의 요새 기능 포기 명령과 도심의 개발로 중세에 쌓았던 성곽들의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지만, 이때 비셰흐라드와 시타델라 성채,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들 중 일부분이 보존되어 남아 있다.
프라하시 구획 및 방어시설 도면, 채색 그림, 1830년 경
안쪽에서 본 브루스카 대문, 그림엽서(채색된 사진 복사), 1900년 경
비셰흐라드 성의 레오폴드 대문 설계도, 마년필 채색 그림, 1700년경
기마병 갑옷(앞뒤 흉갑, 대퇴갑, 경갑, 투구), 금속, 가죽, 16세기 말 ~17세기 초
결투용 권총, 놋쇠, 호두나마, 1730~40년대
총검이 부착된 보병총, 부싯돌식 격발장치, 강철, 호두나무, 18세기 말~19세기 초
기마병용 권총, 강철, 린덴나무, 17세기 중반
기마병용 검과 검집, 강철, 놋쇠, 나무, 17세기 말 ~18세기 초
오스트리아 장교 흉갑, 강철, 놋쇠, 벨벳, 17세기 중반
총탄 흔적 흉갑, 강철, 18세기 말
팔목가리개.
말머리가리개, 강철,놋쇠,17세기초
장교 투구, 강철, 가죽, 17세기 중반
말이라는 뜻의 콘스카 대문, 현 국립박물관 위채(채색 사진, 1900년 경),
프라하 레트나에 위치한 제19번 보루 후방에 있는 반란 진압용 건물모습(현재 국무총리 관저가 들어선 자리), 사진(1880년대)
신시가, 비세흐라드 및 우예즈드 대문 주변의 프라하 바스티오식 방어시설 일부의 도면, 마르틴 요한 폰 에크(Martin Jahann von Eck)가 그린 그림, 채색 그림, 1741년 경.
서쪽에서 본 1741~1742년 전투 때의 프라하 전경, 18세기 후반의 동판 인쇄 채색 복사본, 19세기 말 복사.
마트하우스 메리안(Mathause Marian)에 의한 프라하 조감도, 채색된 동판 인쇄, 18세기
1694년에 세워진 지트나 대문 정면 모습, 사진, 1870년대.
1866년 대 우예즈드 대문 정면, 사진, 19세기 말.
페트르진 언덕 위에 설치된 중세 성곽 및 바스티온 방어선 일부 개관, 사진, 1930년대.
흙으로 구운 벽돌,
바스티온 방어시설은 기후와 포격에 잘 견디는 벽돌로만 축조되었다. 바스티온 축성 초기에는 여러 가지 크기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18세기부터 일정한 크기의 ‘성벽돌’이 표준화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사암블록.
건축물은 이회암 외에 강도가 다른 여러가지 사암으로 축조되었다. 방어시설에는 주로 바스티온 모서리나 도시 대문 외벽 축조에 이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회암 벽돌.
중세 프라하 방어시설의 대부분은 이회암 벽돌로 축조되었다. 이회암은 가공하기가 쉬우나 오랫동안 천천히 건조해야 된다. 충분히 건조되지 않으면 겨울에 얼어서 부서져 버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미장흙손, 가문비나무, 20세기 초.
벽돌 흙손 (복제품), 철, 나무, 14세기
다림추, 강철, 19세기
프라하 요새 기능의 폐기
황제 프란츠 요세프 1세가 1866년에 프라하시의 요새 기능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70년대 후반부터 도시권 개발의 필요에 따라 중세 성곽이 헐려지면서 점차적으로 바스티온 방어선도 철거되기 시작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스라호프 대문 주변 바스티온 방어시설 철거 작업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중세 대문이 발굴되었다. 사진 20세기 초
신대문 주변 바스티온 성곽 철거 작업, 사진, 1875년
소지구 남쪽 변두리에 임대 주택 공사 중 까렐 황제 때 중세 성곽 철거 작업, 사진, 1930년대.
대포를 보여주는 삽화, 윗줄 대포, 이래즐 구포(臼砲)색채 드로잉, 18세기
제19호 성 마리나 막달레나 보루에 위치한 신호 대포, 1880년대 사진
구형 포탄, 강철, 18세기 전반.
대포 포탄, 강철, 18세기말 ~19세기 초.
근대유적지 중 남아 있는 곳. 바로크 양식의 방어선 중 비셰흐라드와 시타델라 성채, 도시 성곽 북부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바스티온 방어선은 현재 7.75km 보존되어 있다.
3.레오폴드 대문(1670년), 9.제36호 보루
14. 성채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돌출되어 있는 2개의 보루로 구성된 네모난 성곽(1639년 또는 1652년), 15.누셀스케 골짜기를 가로질러 수문이 설치된 중세 개조 성곽은 제32호 능보로 표시되기도 하였다.(14세기 중반), 16. 제31호 보루
18.계단식 보루 제3호. 38. 보존된 제11호 보루
42. 참호가 일부 보존된 제16호 보루의 오른쪽 잔재, 47. 참호가 일부 보존된 제19호 보루.
초기 근대 방어시설, 기초개념 및 구축, 전투 방어, 요새 기능 축소
비교적 평온한 16세기가 지나고 17세기 초의 냉혹한 전란 현실이 몰아 닥쳤다. 왕국은 30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다. 전쟁 개시부터 중세 성곽은 대포 시대에 거의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에 보다 개선된 방어시설이 필요했다. 먼저 기존의 석성 앞에 흙으로 된 바스티온, 즉 성곽 돌출부를 축조한 뒤 토성으로 보강하고 다시 벽돌과 돌로 감쌌다. 중세 성곽은 구축될 당시 최신의 유럽 군사 건축의 모델이었지만 새로 축조된 바스티온 시스템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탈리아식 기술을 도입하였다. 예외적으로 도시형 시타델리 성채로 개조된 비셰흐라드(Vysehrad)성은 최후의 보루로 병영시설 및 창고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강가의 바스티온 방어선은 프라하가 1648년에 스웨덴군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을 때 제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바이에른, 프러시아군대가 차례로 프라하를 공격해 왔을 때 방어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특히 1741년 프랑스 연합군의 프라하 점령은 비셰흐라드성과 시타델라 성채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모든 방어시설이 급격히 노후되어 1848년 봉기때만 사용되었다. 반란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제국 행정부가 성채 일부를 반역자를 막을 수 있는 시설로 변경했다. 결국 그 후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 당시 방어시설 건축가들은 바스티온 성채의 간단한 모델을 썼다. 먼저 평면도를 구획한 다음 그 주위에 참호를 파서 파낸 흙으로 오각형의 언덕, 즉 바스티온을 쌓고 그 위에 포를 설치할 포대를 만들었다. 각각의 바스티온을 토성으로 연결시키고 전체 구조물을 벽돌벽으로 보완했는데 대문, 창턱, 모퉁이 등은 모나게 깎은 사암으로 지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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