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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백탑파와 규장각

규장각은 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던 하던 건물이었다. 정조대에 규장각은 기존의 어재.어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정리하게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을 당시 규장각에는 국내서적 약 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고, 부속으로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보관하는 봉모당, 국내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서적을 보관하는 열고관 등을 두었다.

노론 집안 출신인 박지원, 홍대용과 함께 백탑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박제가, 이덕무 등 서얼 출신 인물들은 그들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는 그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선발하였다. 이들은 규장각 주도하에 이루어진 다양한 편찬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규장각에서의 날들
영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정조는 노론 우위의 정국을 타개하고 남인 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성장하는 중간계층을 국왕과 직접 연결시켜 재편성함으로써 편파적 상황의 탕평을 완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백탑파는 뛰어난 학문 실력으로 새로운 힘이 되어 줄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이들을 평소 눈여겨 보던 정조는 마침내 그의 측근 관료로 살게 될 삶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바쁜 공무를 보냈고, 또 다른 이들은 정쟁의 폐해를 피해 한양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탑 인근에서의 모임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고, 그때를 그리워하며 한숨짓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 수교주련(受敎柱聯), 조선후기, 관원들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적었다.

非先生勿入(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見來客不起(손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

정조와 규장각
정조는 훌륭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1776년 즉위한 그해 9월, 창덕궁 영화당 옆 언덕에 규장각을 설립했습니다. ‘규장(奎章)’은 제왕의 글과 글씨를 이르는 말로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는 기능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의 준론 탕평의 이념적 기반 마련과 개혁을 뒷받침한는 기관으로 확대하기 위해, 이곳에서 활발한 학문연구와 함께 도서 편찬 작업을 펼쳤으며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당색에 물들지 않은 신하들을 길러 내려 했습니다. 규장각에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습니다. 관원들의 사무실 겸 숙직 장소인 이문원(摛文院)을 두었고, 선왕의 유품인 어제, 어화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 국내서적을 보관한 서고(書庫)와 중국에서 들여온 도서와 문적을 보관한 열고관(閱古館), 이후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했으며, 서적의 부식이나 훼손을 막기 위해 보존처리작업을 진행하는 곳인 서향각(書香閣), 휴식공간으로는 부용정이 있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대저 임금이 인재를 씀에는 아무리 작은 국량의 재능이라도 원래부터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한 자가 썩고 한 치가 좋은 재질이라도 오히려
모두 거두어들여서 인재를 포횽하고 도야하는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법이다.
그러한 즉 어떤 사람인들 버리겠으며, 어떤 인재인들 쓸 수 없겠는가…
– 『홍재전서』 권133-

나는 물이 세상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자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 『홍재전서』 권10 –

‘만천명월주인옹자서’, 1798년.

정조가 자신의 호를 ‘萬千明月主人翁’이라 정하고 그 내력을 서문 형식으로 쓴 현판이다. 정조는 달을 자신으로, 모든 시냇물을 신하와 백성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임을 밝히고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정조의 시문.윤음.교지 및 기타 저술을 모아 엮은 문집이다. 전시된 것은 1787년 1차로 간행된 60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문체반정
1792년 정조는 기존의 문풍(文風)이 청의 패관소설이나 형식으로 변질됨을 우려하여, 당대 유행하는 문체를 비판하고 바로잡아 역대 고문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배경에는 문체를 구실로 노론에게 일정한 압박을 가해 수세로 몰린 남인을 보호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깔려 있기도 했습니다. 박지원은 정조가 지목한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의 대표자였습니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연암체’라 불릴 정도로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제어하기 위해 박지원에게 자송문을 요구한 것입니다. 또한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남공철, 김조순 등 규장각에 소속된 여러 학자들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정도의 의도를 간파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왕의 요구에 맞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문체반정에 회의적이던 박지원과 이서구는 끝내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정조 역시 더는 글을 써내라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모두 박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 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 박지원, 『연암집』「연상각선본」 –

정조어필, 18세기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글을 쓰는데 혼신을 다하여 상고시처럼 꾸밈없고 담백한 글을 쓰도록 권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1856년.

정조가 당대를 혼란기로 규정하고 선현의 가르침을 얻고자 편찬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두율분운(杜律分韻), 1798년, 두보

사대부들이 과체시(科體詩, 과거시험에 채용되는 시)에만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자, 두보의 시풍을 배우게 하기 위해 정조가 이 책의 편찬을 지시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삼국지통속연의, 19세기, 나관중

정조는 『삼국지』『수호전』 등의 소설류를 패관소품으로 규정하고 금기시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상기(西廂記), 19세기, 왕실보

정조대 금서로 지정된 원나라 희곡으로,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학사지서(奎章閣學士之署),

규장각 이문원의 중앙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규장각 학사의 관서’라는 의미이다. 좌측 하단에 낙관을 통해 규장각 제학 김중서가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예도보통지
정조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실력 있는 군사들을 선출하였습니다. 이는 군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정조는 1789년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란 명을 내립니다.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는 문헌 고증을, 박제가는 고증과 목판 대본의 글씨 쓰는 일을, 무관 백동수는 무예를 실기(實技)’로 고증하는 일과 편찬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백탑에서 맺어진 인연이 다시 모여 그들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790년 음력 4월29일, 4권1책으로 된 『무예도보통지』와 24개의 기예를 한글로 풀이하여 만든 1권1책의 『무예도보통지 언해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에게 명하여 장용영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란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 초관 백동수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정조실록』14년, 4월29일 –

무예도보통지, 1790년

무예와 전투기술을 표준화하고자 한 정조의 명으로 백동수.이덕무.박제가 등이 만든 무예서다. 총24개이 전투기술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예제보번역속집, 1610년, 최기남

『무예제보(武藝諸譜)』에 빠진 내용과, 『일본고(日本考)』에 나오는 일본의 무예를 덧붙여 다양한 무예 실기를 수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병학통(兵學通), 1785년

조선후기 군사 교련서다. 중앙 군영과 지방 진영의 군사 훈련 질서를 통일하기 위해 만든 책으로, 훈련도감의 규정을 기준으로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기효신서(紀效新書), 조선후기, 척계광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지은 병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전술.무기.무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검서관으로 등용된 백탑파
1779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모두 서얼 출신으로, 재능있는 서얼을 옆에 두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문예부흥과 학술진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조가 규장각을 확대해 갈수록 이들의 역할도 많아졌습니다. 방대하고 끝없는 편찬사업이 이어졌고, 수많은 서적의 오,탈락 교정과 내용 검증, 규장각 내 도서목록작성, 새로 수입되는 서적의 분류, 새로운 서적 발간, 중요 서적과 문서 필사 등으로 규장각의 등불은 새벽녘이 되도록 꺼질 줄 몰랐습니다. 때문에 일주일에 3~4회는 숙직을 서야 했고, 예전과 달리 자신들의 연구 시간과 여유를 즐길 수 없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정조가 검서관이 쓴 시문을 가져와 살펴보게 하고 검서관을 모두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검서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앞으로 나오니 상이 차례로 돌아가며 집안과 나이를 물었다. 왕이 교서를 써서 내리기를 시작 일등은 검서관 부사용 이덕무다. 다음은 부사용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이다. – 『승정원일기』 1779년 7월13일 –

편찬사업 및 저서
규장각은 서고의 특성상 수집 역할에 충실을 기하고자 기존의 소장 자료 뿐 아니라 연행을 가는 사신을 통해서 다량의 중국 서적을 구입하거나 기증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 문화의 발전을 위한 대규모 서적편찬 사업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규장각지』『대전통편』『전운옥편』『동문비고』『오륜행실도』 등 많은 책을 편찬하고 간행했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편찬되기까지 그 안에서 책과 씨름하며 고증과 교열작업을 펼친 검서관들의 노력과 수고는 정조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함께 계속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 총목(奎章閣 總目)』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평소 경적(經籍)을 숭상하여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유편(遺編)을 널리 구매하여 존현각의 옆을 확장하여 그곳에다 저장하여 두고서.. 그 규모를 점점 넓혀 병신년 첫 해에 맨 먼저 『도서지성(圖書集成)』 5천여 권을 북경의 책방에서 구입하였고, 또 홍문관의 소장본과 강화부 행궁에 저장되어 있던 명나라에서 내려준 여러 가지 책들을 옮겨다 보태었다.. 비밀스럽고 희귀한 책들로서 옛날에 없던 것으로 지금 구비되어 있는 것이 무려 수천.수백가지 종류나 되었다. – 『정조실록』 5년, 6월29일 –

규장전운(奎章全韻), 18세기

조선후기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이 편찬한 한자 운서(韻書)다. 조선의 한자음과 중국 본토 자음을 함께 표기하였고, 한글로 글자의 음을 달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어정규장전운, 1880년경

정조가 명하여 1792년 이덕무가 완성하고 규장각 관원들의 교정을 거쳐 4년 뒤 간행된 운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지(奎章閣志), 1784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규장각의 연혁.제도.기능.의식.보관서적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어정제권(御定諸圈), 1798년

정조가 1798년 9월25일부터 한달간 신하들과 강연한 내용을 적은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국조보감(國朝寶鑑), 1782년

조선 역대 국왕의 업적을 모아 편년체로 기술한 사서다. 채제공이 편집을 맡아 간행하였으며, 내사본(內賜本,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책)으로 규장각에서 편찬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1873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수정한 것으로 1797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921년

정조는 무장들의 전기를 발간함으로써 유비무환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유득공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사기영선(史記英選),

정조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 뛰어난 작품을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

오경백편(五經百篇), 1798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중국 고전에서 백성과 선비의 교육에 관련된 내용을 정조가 직접 선정하여 교정.간행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송(雅頌), 1799년

주희의 시를 보급하여 문풍을 이끌겠다는 목적으로 정조가 주희의 시문을 뽑아 간행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고문진보(古文眞寶), 1874년경, 전 황견

주나라부터 송나라까지의 시문을 엮은 책으로 고시(古詩)와 고문(古文)의 교과서로 평가받으며 문장 학습용 교재로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