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배반동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 사적 8호) 절터이다. 사천왕사는 경주에서 7곳의 신선한 숲 중 하나인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은 경주에서 울산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동해안에 조성된 문무왕 수중릉과 함께 삼국통일 후 일본을 경계했던 문무왕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다고 하며,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입구를 지키던 천왕들로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수미산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예언이 실현시켜준 사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사천왕사는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천왕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의 목탑이 조성된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감은사,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조성되었던 쌍탑식 가람배치를 처음 시도했다고 한다. 뒷편에는 제단이 있던 건물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천왕사 절터(사적)>
사천왕사가 완성되다 ( 679년 08월(음) ),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사천왕사 소상의 활줄이 끊어지다 ( 919년 (음) ), 3년(919)에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소상(塑像)이 들고 있는 활의 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소리를 냈는데 마치 짖는 것 같았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사천왕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처음 세운 사찰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려는 호국의 염원이 담긴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그 맥을 끊기 위해 낭산과 사천왕사 절터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였다고 한다.
<낭산 아래 사천왕사 절터를 지나가는 철로>
현재 사천왕사 절은 없어지고 남북 105m, 동서 73m의 절터만이 남아 있다. 사천왕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한 첫번째 사찰이다. 건물은 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중문지, 북쪽에는 강당지가 있고, 금당 앞에 목탑터 2곳이 남아 남아 있다. 절터 입구에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 2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위해 지었던 사찰로 볼 수 있으며, 이 사찰에 있던 문무왕 비(碑) 상단부가 최근에 경주의 주택 마당에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2011년 가을 발굴조사 당시의 모습>
사찰입구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조각수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사찰입구 당간지주>
금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이며, 계단은 앞쪽에 2개, 옆쪽에 1개씩 설치하였다.
<금당터>
<기둥을 올려놓은 주춧돌>
<금당터 대석>
금당터 가운데 놓여 있는 사각형의 대석이다. 거대한 불상을 올려 놓았을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주춧돌>
<작은 주춧돌>
<2012년 발굴조사 당시의 모습>
<치미>
사천왕사 절터에서 발견된 치미이다. 금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목탑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다. 금당과 마찬가지로 가구식기단을 사용했다고 한다.
<금당 앞 오른쪽 목탑터>
<목탑터 주춧돌>
<목탑 심초석>
사천왕사는 황룡사, 불국사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큰 사찰로 건물 지붕에 사용했던 치미를 비롯하여 기와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인상적인 것이 통일신라를 대표할 수 있는 천재 조각가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녹유사천왕상이 있다. 녹유사천왕상은 그 이전과 이후의 조각작품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의 간다라 미술품의 조각수법과 비슷하게 상당히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천왕사에 세워진 2개의 탑 또한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고 있던 녹유사천왕상>
<절터에서 출토된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기와.>
<글자가 새겨진 기와>
<절터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기와들>
<금당 앞 왼쪽 목탑터>
<가운데 심초석과 주춧돌>
금당 뒷편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터는 사천왕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금당 뒷편 오른쪽 건물터>.
<금당 뒷편 왼쪽편 건물터.>
<뒷편 강당이 있던 자리>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강당이 있던 자리를 지나는 철도>
<회랑이 있던 건물터>
<2011년 발굴조사 당시 모습>
<사천왕사 절터 앞쪽 중문이 있던 자리. (2012년 발굴조사 당시 모습)>
<2기의 비석받침돌이 남아 있는 사천왕사 절터 입구.>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비석받침돌>
<또다른 거북받침돌>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 비(碑) 하단부는 조선 정조 20년(1796)에 경주부윤 홍양호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상단부는 2009년 경주 민가에서 새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 비(碑)>.
문무왕 비(碑),
문무왕 비는 681년 혹은 682년에 사천왕사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던 문무왕 비를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던 홍양호가 재발견하고 경주 관아로 옮겼습니다. 이 때의 탑본이 ‘해동금석원’이라는 청나라 책에 실렸습니다. 이 비석은 또 다시 행방을 알 수 없다가, 1961년에 여기 전시된 비편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른 한 편이 200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비문의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와 신라 김씨의 내력 등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국학소경 김__이 썼으며, 구양순체의 해서는 단아하고 활달한 느낌을 주는데 대사 한눌유가 썼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2011년 발굴 조사 당시 모습>
<2012년 봄 발굴조사 당시 모습>
<2012년 발굴조사 당시 사천왕사 모습.>
낭산은 삼국시대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7곳의 신성한 숲 중 하나인 신유림이다. 사천왕사는 경주에서 7곳의 신선한 숲에 세운 사찰인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뒷편 낭산에는 선덕여왕릉이 있다.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
<낭산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사천왕사 맞은편에 위치한 망덕사지>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사적, 경주시 배반동 935-2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염원이 깃든 사찰로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발원하여 세웠다. 지금은 금당터, 목탑터, 회랑터, 익랑터 등과 당간지주, 머리 부분이 없어진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 2기 등이 남아 있으며 강당터 등 유적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철로를 내면서 파괴되었다.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루어졌으며, 신라 최고의 조각가 양지(良志)가 만든 힘차고 사실적인 소상(塑像)인 녹유사천왕상전이 출토되었다. 2006년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학술발굴조사가 7년 동안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녹유사천왕상전의 도상(圖像)이 완전하게 복원되었고 가람배치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또한 비각지, 석교, 비편 등이 추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 석교는 불국의 정토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미학적인 면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년
- 위키백과,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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