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구황동 낭산 북쪽 끝자락에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국보)이다. 높이 7.3m로 이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돌 밑면에 5단의 받침을 새겨놓고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세워진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서 그 규모가 작아지고, 형태도 단순해졌다. 전체적인 조형미나 조각수법 등의 우수하며,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으로 가는 전환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기단부는 1층은 낮고 2층은 높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기단부 2층 각면에 기둥모양을 새겨놓고 있다.
<기단부>
탑신부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는 달리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지붕돌 아래에는 5단의 받침을 새겨놓고 있다.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네귀퉁이를 살짝 들어올려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신부>
<1층 몸돌>
몸돌은 네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은 것 외 특별한 장식을 하고 있지 않다.>
황복사는 신라에서 신성시 여기던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북쪽 끝자락 동쪽편에 있던 사찰로 경주에 있었던 많은 사찰 중에서도 큰 규모의 사찰에 속했던 사찰이었다. 황복사 옛절터에는 효소왕이 그의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석탑으로 효소왕의 아들 성덕왕이 다시 사리와 불상을 넣으면서 두왕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탑의 해체복원 과정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사리함 뚜껑에는 탑이 건립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들의 성격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남쪽에서 본 삼층석탑>
<북쪽에서 본 모습>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뚜껑에는 성덕왕이 부왕인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 2구를 비롯하여 사리 등을 넣었다는 조성내력을기록해 두고 있다.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뚜껑>
<사리함 외함>
<금제여래좌상(국보 ), 금제여래입상(국보)>
황복사(皇福寺)로 전해오는 절터의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사리함 뚜껑에 새긴 글에 따르면 신문왕(神文王)이 세상을 떠나자 692년 아들인 효소왕(孝昭王)이 어머니 신목태후와 함께 석탑을 세웠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聖德王)이 금제 아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에 안치하였다. 불입상은 얼굴 이목구비의 경계와 윤곽이 부드럽고, 두툼한 옷주름에 가려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 등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 남아 있어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얇은 옷주름으로 강조된 불좌상의 풍만한 신체는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706년에 봉인한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내함과 목걸이>
<목걸이>
<굽다리접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경북 경주시 구황동
이 석탑은 높이 7.3m인데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올린 통일신라시대 전형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43년 이 탑을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 여래입상과 금동사리함이 나왔다. 여래좌상의 높이는 12.2cm로 국보 제79호이며, 여래입상은 높이 14cm로 국보 80호이다. 이 두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리함 뚜껑의 안쪽면에 있는 장문의 명문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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