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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거대한 능묘의 발굴

신라는 삼국시대 진한 12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여 고려에 의해 멸망한 935년까지 천년 가까이 존속했던 나라이다. 신라의 고분은 초기 신라식 덧널무덤에서 통일신라의 굴방무덤까지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존재한다. 그 중 마립간 시기(5~6세기)에 경주 도심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덤의 형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덧널 위에 강돌을 높이 쌓아서 작은 동산을 만들었던 도굴이 어렵기때문에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스키타이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몽골 등에서 볼 수 있는 무덤의 형식으로 함께 묻은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들로 함께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며,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금관총>

경주 도심에 위치한 고분들은 일제강점기 도심 주택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금관으로 인해 화려한 황금문화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봉황대라 불렸던 노동리, 노서리 고분들은 일제강점기에 상당수 발굴이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고구려로부터 받은 호우(壺杅)라는 글자가 적힌 청동그릇이 발견된 호우총이 처음으로 발굴.조사되었다. 이후 70년대 경주고도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찬란한 신라의 황금문화가 다시 한번 조명받게 되었다.

호우총(140호분)

호우총은 노서리 고분군 중 그 규모는 작고 봉분도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경주 고분 발굴.조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고분이다. 이 호우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정식 발굴.조사한 첫 고분으로 광개토대왕 이름이 적혀진 청동그릇이 발견되어 대릉원 일대 고분의 시기적은 특성 등을 증명해주고 있다. 호우총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관식, 장신구,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다른 무덤에 비해서 규모가 작고 순금보다는 금동으로 만든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마총 발굴 당시(1973년) 사진.

천마총은 대릉원 내에서도 크기가 비교적 작은 봉분으로 큰 고분인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연습차원에서 발굴.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천마도, 금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천마총

내부를 공개해 신라 고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천마총 이후 발굴.조사된 대표적인 고분인 황남대총.

금관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남대총(북분) 발굴 당시(1974년) 모습.

거대한 능묘의 발굴
1973년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이루어진 천마총 발굴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가 파악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금관과 관장식, 금제허리띠,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길이 120m의 거대한 쌍분인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되었습니다.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많은 부장품이 확인되었습니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 당시 언론이 연일 그 내용을 속보와 특종으로 보도하면서 신라 왕릉은 국민들의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무덤에 묻히 이가 누구이며, 돌무지덧널무덤의 유래가 어디인가 등에 대한 활발한 논의로 이어졌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들.


금목걸이(국보).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곱은옥모양의 금 구슬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의 금 구슬을 연결하였다. 간결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인다. 푸른색의 곱은옥을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곱은옥 모양을 만든것이 특이한 유물이다.

금목걸이, 국보, 5세기, 황남대총 남분
피장자의 목 부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사슬 사이사이에 6개의 속이 빈 금구슬을 달았습니다. 아래쪽에는 금제 곱은옥을 매달았습니다.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큰칼 (황남대총 출토).

환두대도라고도 불리는 허리띠에 매달고 다닐 수 있는 고리가 달린 칼이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칼의 형태이다.

큰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큰칼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큰칼은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된 듯하며, 소유한 사람의 지위를 드러내는 무기로서 장식대도(葬式大刀)라고도 부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봉황장식 큰칼(보물)과 큰칼(6세기, 천마총).

봉황장식 큰칼, 보물, 6세기, 천마총
칼자루 끝의 둥근고리 안에 봉황 머리를 장식하였습니다. 표면에 동일한 형태의 새끼칼이 붙어 있습니다. 실제 무기로 사용했다기보다는 소유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위세품으로 여겨집니다. 큰 칼이 출토되는 무덤의 피장자는 남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은제팔뚝가리개(보물)

은제팔뚝가리개, 보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전투시 팔뚝을 보호하는 팔뚝가리개입니다. 팔목을 끼우는 부분에 경첩을 아래 위로 달아, 탈착이 쉽도록 하였습니다. 금관총과 천마총에서는 금동제 팔뚝가리개가 출토되었으나, 은으로 만든 예는 황남대총의 것이 유일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금동신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신라 무덤에서 나온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바닥판, 발등을 감싸는 부분, 발뒷축을 감싸는 부분 등 3매의 금동판을 접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옆면뿐만 아니라 바닥면까지 둥근 달개를 매단 부장용입니다. 안쪽 바닥면에 직물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천마총 출토 금제관모(국보).

고깔모양의 금으로 만든 관모이다. 신라인의 관식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로 상당히 화려하다.

금제관모, 국보, 6세기, 천마총
금제 관식과 한 세트를 이루는 고깔 형태의 관모로서, 비단 등의 유기물로 만든 고깔에 씌웠던 것입니다. 앞쪽에 새날개 모양의 금제관식을 꽂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앞 시기에 제작된 금관총 출토 관식보다 화려하며 금색도 뛰어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은으로 만들 관모.

은제관모, 5세기, 황남대총
황남대총 남분의 부장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앞쪽에는 금동제 맞새김판을 덧댄 오각형의 은판을 붙였는데, 간략화된 용무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제관식(보물).

관모 앞부분에 꽂아서 장식하는 관식으로 신라인의 관모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금제관식, 보물, 6세기, 천마총
천마총에서는 새날개 모양 관식 2점이 덧널 안 부장품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관식은 가운데 아래쪽을 관모 앞부분에 꽂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앞 시기의 금관총 출토품과 형태 및 제작방식이 유사하나, 날개의 곡선은 더욱 가늘고 길어 유려한 느낌을 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새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금제관식(보물)

금제관식, 보물, 6세기, 천마총
나비 모양과 새날개 모양을 합친 듯한 독특한 모습으로, 한 장의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습니다. 앞면에는 금실로 150여 개의 둥근 달개를 매달았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은제장식, 5기, 황남대총 남분

금.은제 바리, 5세기, 황남대총

은제합, 5세기, 황남대총

은제합, 5세기, 황남대총

은제합, 5세기, 황남대총

은제 장식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은제 장식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금제 굽다리접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은제국자, 5세기, 황남대총 남분

은제 대롱이 달린 작은 단지, 5세기, 황남대총 남분

금동합, 6세기, 천마총

금.은제 굽다리접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능묘
1945년 광복 이후 신라능묘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국립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946년 5월에 발굴된 경우 호우총(壺杅塚)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쳐 휴전 이후에는 경주 시내 도로가 개발되면서 상당수가 긴급조사로 진행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문화재관리국과 대학박물관도 발굴조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신라능묘의 발굴조사는 197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사관(史觀)을 바탕으로, 민족사의 재발견과 민족중흥이란 대의명제 아래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집중 조명되었습니다. 1973년부터 시작된 폐고분에 대한 정비, 미추왕릉지구 고분공원(대릉원) 조성과 도로(계림로) 개설 등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입안된 경주고도개발사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때에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경주 시내의 대형 무덤들이 발굴되었습니다. 두 무덤에 대한 발굴은 신라 문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발굴의 성과는 1974년 10월 대릉원의 개장과 1975년 7월 지금의 자리에 신축 개관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공개되어, 신라 왕릉의 존재와 의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