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립간시기(5~6세기)에 조성된 경주 도심 고분에서는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는 금은 장신구와 함께 서역과의 교류관계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 유리그릇이나 유리잔 등은 비단길 또는 바닷길을 통해 서아시아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에서 만들어진 이런 유물들을 통해 신라가 서역과 직접 교류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불교의 전파와 함께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뿔잔, 6세기, 경북 포항 냉수리.
뿔잔은 서역과의 문화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 등 다양한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뿔잔과 잔받침대, 5~6세기, 미추왕릉 C지구 7호 무덤
뿔잔과 잔받침대
리톤(Rhyton)으로 불리는 쇠뿔 형태의 뿔잔(각배)은 멀리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미추왕릉C지구 7호 무덤 출토 뿔잔은 받침대 형태가 당시 유행하던 굽다리접시와 동일합니다. 뿔잔이 신라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은잔, 보물, 5세기, 황남대총 북분
은잔 바닥에 새겨진 동물들.
안쪽 바닥 중앙에는 여섯 잎의 꽃 안에 다리 2개와 긴 꼬리를 지닌 짐승을 새겼습니다. 표면에는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2줄로 연속 배치하고, 그 안에 사람 머리를 지닌 새, 용, 노루, 말 등의 다양한 동물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늬 표현은 5세기 중엽 이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중국 북위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상감유리구슬, 5~6세기, 황남대총 외
봉수형 유리병, 국보 193호, 5~6세기, 황남대총.
로마를 비롯하여 지중해 문화권이나 페르시아 등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이 병의 원형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오이노코에(Oinochoe)로서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주로 만들어졌고,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는 금속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봉황 머리를 닮았다 하여 ‘봉수병’으로 불렸습니다. 부러진 파란색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 수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유리병을 매우 귀중히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유리잔, 5세기, 서봉총, 금관총
유리잔, 보물, 5세기, 황남대총 북분
유리 바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유리 잔, 5세기, 안계리 4호 무덤
백자 항아리, 중국 당, 7세기, 황룡사터 출토
황룡사터 구층목탑의 심초석 아래에서 나왔습니다. 당의 백자호를 수입하여 사리장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안에 들어있던 가루 형태의 물질을 인골로 보고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으나, 성분분석 결과 뼈의 주성분인 인(P)이 확인되지 않아서 인골로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1970년대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마립간기의 각종 금제품 또는 돌무지덧널무덤의 연원을 북방 초원지대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아울러 당, 중앙아시아, 인도에까지 구법승이 오갔던 신라 통일기의 국제적 성격 등도 거론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라문화 연구의 다각화와 함께 그 범위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중앙아시아 출토 소장품을 본격적으로 전시하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관련 학회도 결성되어 신라문화의 국제적 성격을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였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국제적 인물로서 중국 당에서 활약했던 승려 혜초(704~787년)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학술적 연구와 함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도 제작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원본이 전시되는 등 신라와 실크로드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거시적 관점에서 신라인과 신라 문화의 국제성 또는 대외교류에 주목하는 일련의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계림로 보검, 보물,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5세기
1973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한 계림로 14호 무덤은 비교적 작은 규모이나, 출토품은 왕릉급으로 화려합니다. 이 보검은 발견당시 피장자의 허리 아래쪽에 가로로 놓여 있었습니다. 목제 칼집은 썩어 없어졌고 철제 단검과 금제 칼집 장식이 남아 있습니다. 금알갱이를 붙인 금판의 내부에 붉은 석류석과 유리를 넣었습니다. 오른쪽 측면 2개의 반원형 돌출부는 칼을 허리띠에 매달기 위한 장치입니다. 제작지는 중앙아시아, 흑해 연안, 또는 이란 지역 가운데 한곳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신발, 경주 식리총, 신라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바닥면
바닥면에 서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동물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장식의 구성이나 형태에서도 섬세하면서도 이국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신발의 바닥판입니다. 육각형의 거북등무늬 안에 괴수, 쌍조(雙鳥), 새, 사람 얼굴을 지닌 새, 기린,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의 다양하고 이국적인 무늬를 대칭으로 나타냈습니다. 이 거북등 무늬는 5~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하여 중국 북위(386~534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 신발은 신라인들의 우주관과 내세관이 담긴 것으로 장송의례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신라에서 발견된 이국적 문물
경주의 4~6세기 돌무지덧널무덤 출토품 중에는 신라가 활발히 국제 교류를 펼쳤던 사실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국적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외국 제품을 수입한 것도 있고, 외래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자체 생산한 것도 있습니다. 지중해 연안이나 중앙아시아 등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방의 눔물이 어떤 연유와 경로로 신라까지 전해져 무덤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그 경로는 초원의 길(스텝루트)뿐만 아니라, 지중해에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대륙을 거치는 비단길(실크로드), 그리고 서아시아에서 인도, 동남아, 중국 남해로 이어지는 남해로 등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신라아 이러한 경로들을 거쳐 머나먼 지역과 직접 교류하며 가져왔을 수도 있지만, 오호십육국 때 선비족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삼연(三燕, 전연, 후연, 북연)이나 남북조시대의 북위(北魏) 등 중국의 왕조를 거쳐 간접적으로 교류하거나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삼국 통일 이후 7~10세기의 동아시아는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강력한 당왕조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이면서 개방적 성격이 강했던 시기이다. 통일신라는 주로 바닷길을 이용하여 중국, 서역, 일본과 교류하였느데, 당으로는 견당사와 구법승, 숙위학생을 파견하고, 신라방을 설치하는 등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당삼채를 비롯한 당나라에서 수입한 유물들과 원성왕릉(괘릉) 무인석 등에서 표현되는 서역인의 얼굴, 사천왕사지 전돌 등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인 조각수법 등은 통일신라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서리 기둥돌, 경주 구정동 방형분, 신라 8~9세기.
기둥돌에 새겨진 인물상.
괘릉에서 볼 수 있는 서역인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옆쪽에 새겨진 사자상.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는 표현이 돋보인다. 서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정동 방형분의 모서리에 세웠던 기둥돌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깥쪽 두 면에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처럼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서역풍의 호인(胡人)이 사자와 함께 얕게 새겨져 있습니다. 머리에 띠를 매었고, 장화같은 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폴로의 스틱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있습니다. 이 계통의 인물을 아랍인, 이란인, 소그드인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 구정동 방형분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이름 그대로 정사각형으로 생긴 고분으로 신라에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후대 고려전기에 이런 형태의 무덤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삼채 뼈항아리, 경주 조양동, 당(唐) 8세기.
당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 형태이다.
1973년 경주 조양동에 위치한 성덕왕릉 남쪽 200m 지점의 야산 기슭에서 석함 속에 든 채 발견되었습니다. 삼채는 중국 당 7~8세기에 제작된 저화도 연유 도자기로서 표면에 녹, 황, 백색 또는 노, 황, 남색의 세가지 빛깔을 입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삼채항아리는 신라 통일기에 당에서 수입한 것입니다. 은제 접시를 뚜껑을 이용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석조 무인상, 신라 9세기, 경주고등학교
가슴 윗부분만 남아 있과 표면의 마모가 심하나, 부릅뜬 눈, 머리에 두른 띠와 매듭에서 신라 통일기 왕릉의 진입부 양쪽에 세웠던 호인(胡人)형의 무인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보아 바깥에서 봤을 때 진입부 왼쪽에 놓여있던 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경주 북천 상류에 위치한, 헌덕왕릉으로 전하는 능묘에 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원성왕릉(괘릉) 앞에 도열해 있는 무인상.
덥수룩한 수염, 깊은 눈, 높은 코 등 서역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석상이다.
남자상, 8세기, 용강동 돌방무덤
남자 문관상, 8세기, 용강동 돌방무덤
남자문관상, 8세기, 용강동 돌방무덤
남자 문관상.
여자상, 8세기, 용강동 돌방무덤
남자 문관상은 머리에 복두를 썼고 손에는 홀을 들었습니다. 깊은 눈과 높은 코, 덥수룩한 턱수염은 서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 소그드계 인물의 특징입니다. 턱수염이 난 또 다른 남자 인물상도 비슷한 계통으로 추정됩니다. 여자상들의 틀어 올린 머리 형태와 풍만한 신체 표현은 중국 당삼채나 채색 소조상에 보이는 귀부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용강동 고분
용강동 고분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인 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구조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신을 함께 묻을 수 있어서 가족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5세기 후반 지방에서 먼저 등장하고 경주로 전해져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남녀 인물상, 8세기 황성동 돌방무덤
남자는 손에 홀을 들었던 문관상으로 추정됩니다. 매부리코가 이국적인 인상을 줍니다. 여자는 소매가 긴 포(袍)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었습니다. 머리는 앞쪽 가운데에서 가르마를 타고 뒤쪽에서 묶었습니다. 오른손은 내려 병을 쥐었고, 왼손은 올려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신라 통일기 초 여성의 복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
신라 통일기 문화의 국제성
신라는 당(617~907년)에 총 120여 회의 사신을 보내어 친선 관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민간에서도 승려, 유학생, 상인 등이 왕래하며 다방면에서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당의 수도 장안은 국제도시로 번성하였고, 신라는 이러한 당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더욱 국제적인 성격을 드러내었습니다. 신라 통일기에는 다른 나라의 외국인들도 직접 내방하고 교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랍의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베(Ibn Khurdadhibah, 820~912년)는 『도로와 왕국 총람』이란 책에서, 신라는 산과 들이 많고 금이 풍부하며 무슬림들이 일단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한다고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 검, 사향(麝香), 침향(沈香), 말안장 등의 물건을 가져갔습니다.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알마수다(al-Masoudi:?~965년)는 자신의 책 『황금초원과 보석광』에서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으며 기름진 땅과 풍부한 자원으로 인해 그곳에 간 이라크인(아랍인)이나 외국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떠나지 않았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괘릉의 무인상을 비롯하여 신라 통일기에 보이는 이국적 용모의 조각들은 당을 거쳐 들어온 외국인의 이미지를 참고하여 만들었거나, 그들과 직접 교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였을 것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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