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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군기시(軍器寺) 터, 조선시대 무기제조 기관

서울시 청사 지하 공간에 남아 있는 군기시(軍器寺) 터이다. 군기시는 고려~조선시대에 무기 제조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고려와 조선초기에는 중국 북방민족이 세운 요, 금, 원 등이나 남방 왜구와의 갈등이 심했기때문에 국가적으로 무기의 개발과 제조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말 원으로부터 화약제조 기술이 전래되면서 만들어진 화약무기는 고려가 왜구를 제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기시에는 병조판서나 참판 중 1인, 무신 중 1인을 제조로 두어 감독하게 했으며, 600여 명에 이른 장인을 두어 무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세조 이후 대규모 분쟁이 없어지면서 그 기능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임진왜란 때까지 많은 무기들에 개발.제조하면서 그 기능이 유지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 서울시 청사>

2008년 부지 조성 공사중 조선시대 무기를 만들던 관청인 군기시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불랑기 자포(보물 861-2호)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양도성도- 군기시 세부사진>

군기시터 출토 유물들
군기시터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화약과 화약무기이다. 불랑기자포, 총통, 철촉 등이 출토되었는데, 불랑기자포와 승자총통에는 명문에 1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총통은 도기 안에 담겨서 출토되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 녹아내리거나 터진 상태 또는 부러져 있는 상태였는데, 아마도 재활용을 위해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수천점에 이르는 화살촉도 건물지에서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그밖에 자기, 기와, 목제품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군기시 건물터에서 출토된 유물들>

조선 중기인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다양한 화약무기류들이 출토되었다.

<불랑기자포, 1563년, 1호건물지 출토, 보물>

조선에서 불랑기자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발굴 직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군기시 보물, 불랑기자포
불랑기자포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시키는 화기로 조선시대 유일한 후장식(뒤에서 장전하는 방식) 화포이다. 자포에 실탄을 장전한 뒤 발사틀 구실을 하는 불랑기모포에 삽입해 발사한다. 불랑기자포는 1호 건물지 도기 안에서 여러 점의 총통과 함께 출토되었다. 자포 표면에는 글자가 적혀 있어 명종 18년(1563)에 75근 8량으로 김석년이라는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시청>

<불랑기포(모형)>

불랑기포의 도입시기와 관련하여 문헌상에는 임진왜란 때로 알려져 있으나 보물 861호 불랑기자포 3점(육군박물관 소장)이 이미 발굴되었고, 서울 신청사 부지에서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랑기자포가 발굴됨에 따라 불랑기의 도입시기를 임진왜란 이전으로 앞당길 수 있는 유물로서 문화재척 가치가 높다.<출처: 서울시청>

<대장군전(모형)>

대정군전은 조선시대, 천자총통의 탄환으로 사용되던 쇠로 만든 화살이다. 서울시청 신청사에서는 총통에서 발사하는 대형 화살의 철촉과 철우가 출토되었다.

<총통, 15~16세기, 10호 건물지 출토>

통신은 휘어져 있으며 1마디의 죽절이 남아 있다. 글자는 ‘大平’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

<영자총통, 16세기, 10호 건물지 출토>

병부와 약실 편만 남아 있으며 명문 ‘盈字’가 확인되어 영자총통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

<‘軍上’명 철기, 1546년, 13호 건물지 출토>

13호 건물지 내부에서 덩이쇠, 총통, 쇠사슬 등이 한 덩어리로 엉켜 출토되었다. 이 철기의 형태는 원통형이며 상단부에 명문이 확인된다. 명문내용이 남아 있어 명종 1년(1546) 17근9량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시청>

조선시대 무기제조기관, 군기시(軍器寺)
군기시는 고려~조선시대에 무기 제조 등을 관장하던 곳이다. 고려 목종 대에 군기감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어 고려 문종 대에 확충되었다. 충렬왕 34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대에 군기시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어 부활하게 된다. 이후 군기시는 고종21년(1884)에 근대적 무기제조관청인 기기국(機器局)이 설치될 때까지 중앙 무기제조소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군기시에 근무하는 장인만 600여명이며, 무기제조기술 또한 수준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불랑기자포, 총통 등의 무기들은 조선시대 우수한 무기제조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혼돈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국방체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최신 무기 제조 및 관리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군기시는 바로 이 역할을 담당했던 핵심 관청이었다. <출처: 서울시청>

2008년 서울시 청사를 새로 지을 때 부지조성 과정에서 옛 건물터와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있다. 건물터는 출토 유물과 여러 기록 등으로 볼 때 15~16세기 군기시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출토된 불랑기자포(보물)는 그 제조연대(1563년, 명종대)가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 전해졌다는 전래 연대보다 그 이전에 전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서울시 청사 지하에는 발굴.조사된 건물터와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시대 이 곳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 유구
조선시대 유구는 호안석축 1기, 건물지 21동 등이며 화약무기 등을 비롯하여 자기, 철기,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유구들은 유물의 제작 및 사용시기 등을 볼 때 15~16세기의 유구들이다. <출처: 서울시청>

<서울시 청사 부지 조성과정에서 확인인 건물터>

임진왜란 이전인 15~16세기 군기시 건물터 이다.

시간의 기록, 토층
군기시 유적의 토층은 자연 퇴적층-조선 전기 문화층 – 근.현대 문화층으로 나뉜다. 조선 전기 문화층에는 조선 건국 후 설치된 군기시와 관련된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문화층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일보사와 경성부청사가 건립되는 과정에서 파괴되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위로 숙위소(고종황제 호위담당 시설), 경성부청사가 건립되었던 근현대문화층이 퇴적되어 있다. <출처: 서울시청>

<1호 건물지>

1호 건물지는 ‘ㄷ’자형의 평면구조로, 남동향의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의 남서쪽에는 난방시설인 구들이 확인된 방과 부엌이, 건물의 중앙에는 대청마루와 그 마루를 앞으로 확장한 퇴(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는 불랑기자포, 열과 압력으로 녹이 엉켜 있는 총통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승자총통, 16세기, 1호 건물지 출토>

15점의 총통이 열과 압력으로 녹아 붙어 있다. 파손의 흔적이 있으며 명문으로 보아 대부분 승자총통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

<승자총통, 1호 건물지 출토>

장전과 휴대가 편리하도록 개량한 개인화기로 총통 여러 점이 녹아 붙어있던 총통류 중 보존처리과정에서 분리되었다. 통신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며 약실 부위에 다른 개체가 녹아 붙어 있다. 명문으로 보아 만력 o년 4월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

<2호 건물지>

2호 건물지는 ‘ㄷ’자형의 평면구조로, 남서향의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의 남동쪽에는 난방시설인 구들이 확인된 방과 부엌이, 건물의 중앙에는 대청마루와 그 마루를 앞으로 확장한 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기초부분에 나무말뚝을 박고 그 위에 기둥의 기초인 적심과 초석을 설치하였다. 초석 양쪽으로는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확인된다. <출처: 서울시청>

<총통, 15세기, 2호 건물지 출토>

원형의 철제총통이며 표면은 부식이 심하고 통신에 죽절이 없다. <출처: 서울시청>

<덩이쇠, 16세기, 2호 건물지 출토>

철제 무기를 만들기 위한 1차 가공품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

<3호, 3-1호 건물지>

3호 건물지: ‘-‘자형 평면구조로 추정되며, 집터를 잡고 그 터보다 높게 쌓아 조성하는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3-1호 건물지: 3-1호 건물지는 3호 건물지가 건축되기 이전 건물지이다. 3호 건물지의 30cm 아래에서 확인된 유구이다. ‘-‘자형 평면구조로 추정되며, 기둥기초인 적심과 초석 그리고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4호, 4-1호 건물지>

4호 건물지: ‘ㄱ’자형의 평면구조로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기단 일부만이 확인되었다. 4호 건물지 북동쪽 기단과 3호 건물지 남서쪽 가단 사이에 물이 흘렀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건물지 내부에서 황인된 격실은 4호 건물지 이전 건물지인 4-1호 건물지의 적심이다. 4-1호 건물지: ‘ㄷ’자형의 평면 구조의 건물지로, 기둥기초인 적심이 확인되었다. 4호 건물지 기단의 기초보다 더 낮은 면에서 적심들이 확인되 4호 건물지 자리의 선대 유구로 판단된다. <출처: 서울시청>

<5호, 5-1호 건물지>

5호건물지:’ㄱ’자형의 평면구조로 남서향의 건물로 보인다. 북쪽에 부엌이 있고 그 옆으로 안방이 있으며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넌방이 우치한다. 기둥기초인 적심과 초석 그리고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확인되었다. 5-1호 건물지: 5호 건물지 아래에서 확인된 건물지로 5호 건물지의 선대 건물지이다. 기둥 기초인 적심의 대부분이 5호 건물지의 적심으로 재사용되거나 동쪽의 6호 담장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화살촉더미, 16세기, 5-1호 건물지 출토>

활과 노(弩)에 사용된 철촉 수천점이 열과 압력으로 인해 엉켜 붙어 있으며 사두형, 추형, 역자형 철촉 등이 보이며 사두형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서울시청>

<6호, 6-1호 건물지>

6호 건물지” ‘-‘자형의 평면구조로 기둥기초인 초석과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확인되었다. 건물 내부에서 난방시설인 구들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 창고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6-1호 건물지: 6호 건물지 아래에서 확인된 건물지이다. ‘ㄱ’자형 평면구조로 남서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기초인 적심, 초석과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일부 확인되었고, 마루와 부엌사이의 방에서 난방시설인 구들 일북가 확인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11호, 11-1호 건물지>

11호 건물지: ‘ㄱ’자형의 평면구조로 남동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기초인 적심과 벽의 기초인 고맥이 그리고 대청마루와 부엌사이의 방에서 난방시설인 구들 일부가 확인되었다. 11-1호 건물지: ‘-‘자형의 평면구조로 서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기초인 초석과 적심 그리고 기와로 조성된 고맥이가 일부 확인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불랑기자포 및 총통, 11~15세기, 11호 건물지 출토>

불랑기 자포와 총통이 열과 압력으로 녹아 엉겨 붙어 있으며 새로 만들기 위해 열과 압력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

<12호 건물지>

‘ㄱ’자형의 평면구조로 남서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기초인 초석과 적심, 벽의 기초인 고맥이 확인되었고, 방에서는 난방시설인 구들의 ‘ㄱ’자형 고래둑이 확인된다. 부엌에서는 아궁이로 보이는 흔적이 확인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철환, 16세기, 1호 담장 출토, 12호 건물지 출토>

화포의 발사체로 둥근 모양이며 가운데 부분에 터져 깨진 부분이 있다. <출처: 서울시청>

<화약이 담긴 청동그릇, 16세기, 12호 건물지 출토>

내부에 흑색 화약이 담겨 있었으며 5점이 포개진 형태로 출토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장군전촉과 장군전 날개, 16세기, 12호 건물지 출토>

지자총통에서 발사하는 장군전의 전촉과 장군전의 날개이다. <출처: 서울시청>

<청계천 석축>

청계천 물길과 호안석축(護岸石築).
호안석축은 하천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를 말한다. 이것은 정릉동천의 호안석축으로 정릉동천은 정동에서 발원하여 덕수궁에서 천(川)을 형성한 후, 궁 밖으로 나와 대한문 앞 서울광장 및 서울시청을 거쳐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호안석축은 출토된 유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서울시청>

<2호 건물지 남동쪽 기초 단면>

지형에 맞는 건축기술
2호 건물지 남동쪽 기초 단면이며 당시의 지형에 맞는 건축기법 및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은 지대가 낮으며, 정릉동천이라는 하천이 인접한 곳으로 뻘 층이 있는 저습지였다. 이 때문에 건물기초는 약한 지반을 보강하여 건물침하를 막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나무말뚝 지정을 하였다. 뻘에서는 나무가 썪지 않기 때문에 나무말뚝이나 통나무를 깔아 기초를 하였다. 나무말뚝 지정을 한 뻘 위에 바로 모래와 진흙을 이용해 다졌다. 그 위에 3단의 적심석을 쌓고 그 사이는 모래로 채워 다진 후 방형 초석을 놓아 마무리하였다. <출처: 서울시청>

선조들의 삶, 그터

삶의 흔적
이곳에서는 자기류, 목기류 등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생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자기들은 조선청자, 조선백자, 분청사기, 중국백자 등으로 대부분 조선전기인 15~16세기의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조선청자는 고려청자의 양식이 남아 있는 화로, 화분 등이 출토되었다. 조선백자는 발, 접시, 병 등의 일상생활에서 쓰이던 그릇들이 대부분이며 이중 조선청화백자에는 묘지석, 장기알 등도 발견되었다. 분청사기도 일상 생활에 쓰이던 그릇이 대부분이며 건물기초에 묻어두는 진단구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밖에 나무로 만든 나막신, 망치, 그릇, 빗 등과 동전도 다수 출토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용도미상 목제품, 15~16세기, 13호 건물지 출토>

일부 결실된 부분이 있으며 걸개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V’자 형태로 양쪽 상단부는 끈을 묶어 고정시킬 수 있도록 단이 형성되어 있다. <출처: 서울시청>

<목제신발, 15~16세기, 5호 건물지 출토>

앞부분과 발뒤꿈치 부분이 분리되어 있으며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다. <출처: 서울시청>

<용도미상 목제품, 15~16세기, 12호 건물지 출토>

형태는 원통형이며 위에 부분은 여러 번에 걸쳐 깎아 아래 부분에 비해 폭이 좁다. <출처: 서울시청>

<목제도구, 15~16세기, 10호 건물지 출토, 망치로 추정된다.>

<월소, 15~16세기, 14호 건물지 출토>

머리빗으로 추정되며 남아 있는 빗살의 개수는 33개이다.

<목제시, 15~16세기, 2호 건물지 출토>

수저 및 주걱으로 추정된다.

<명문이 있는 분청사기, 15~16세기, 서울 신청사 출토>

<백자발, 15~16세기, 호안석축 상부 출토>

굽 안쪽에 ‘군(軍)’명이 있다. 군기시에서 사용했던 기물로 보인다.

<백자청화도화서명전접시, 16세기 전반, 6호 건물지 출토>

바닥에 짙은 발색의 청화로 ‘圖畵署’명이 시문되었다. 도화서는 조선시대 때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백자음각연화문편병, 15~16세기, 1호 건물지 출토, 백자병, 15~16세기, 3트렌치 상면 출토>

<백자잔대, 15~16세기, 4호 건물지 출토>

굽의 하부가 결실되었으며 전접시의 바닥 중앙에 구멍이 뚫려 원통형의 높은 굽이 달린 형태이다.

<청화백자(15~16세기, 2호 건물지 출토), 백자접시(1546년, 13호 건물지 출토)>

<백자발(15세기 후반, 호안석축 상부 출토), 백자발(16세기, 13호 건물지 출토)>

<장기알, 16세기, 12호 건물지 출토>

해서체로 ‘병(兵)’명을 청화기법으로 시문하였다.

<백자 장식구, 15~16세기, 5-1호 건물지 출토>

상형백자로 장식구로 추정된다.

<백자화분, 15~16세기, 5-1호 건물지 출토>

내저면 중앙에 5cm 구멍이 뚫려 있으며 동체 전면에 음각선으로 가로, 세로로 시문하여 구획을 나누고, 동체하부에 깊은 음각선으로 연판문(연꽃의 꽃잎을 펼쳐 놓은 모양을 연속무늬로 문양화한 것)을 시문하였다. <출처: 서울시청>

<청자반, 15세기, 1호 건물지 출토>

중국 용천계 청자로 추정되며, 동체 내외면에 가는 음각선으로 잎맥을 음각 시문하였다.

<청자화분받침, 15세기, 11호 건물지 출토>

귀면이 있는 하부 다리위에 난강형의 상부가 붙어 있는 형태로 부각, 상감, 첨소 등 다양한 장식기법이 사용되었다.

<청장상감화분, 15세기, 11호 건물지 출토>

바닥 중앙에 배수구멍이 있으며 동체 외면에 구획을 나눠 상감기법으로 운문, 국화문, 매화문, 비룡문 등을 시문하였다.

<분청사기 소호, 15세기, 9호 건물지 출토>

동체 견부에 가로줄과 꽃무늬가 상감 및 인화기법으로 시문되었다.

<분청사기상감와선문접시(15세기, 3-1호 건물지 출토), 분청사기상감운문전접시(15세기, 5-1호건물지 출토), 분청사기인화문접시(15세기, 10호 건물지 출토)>

 옛날,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는 현재 서울 도서관 자리에 경성부청사가 들어서 있었다. 이 건물은 광복 이후 서울시청으로 쓰이면서 6차례 증축되었다. 서울시청 신청사는 2008년 3월에 착공하였는데 부지조성 공사중에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구와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곳에서는 근대와 조선시대에 각각 조성된 호안석축, 건물지 등의 유구와 자기, 동전, 기와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보물로 지정된 불랑기자포를 비롯한 총통, 철환 등의 조선시대 무기류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옛 지도 등들 통해 확인해 본 결과 현재의 서울시청 신청사 인근에 조선시대 병기제조를 담당하던 관청인 군기시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결들을 종합해 볼 때, 지금의 서울시청 신청사 자리는 과거 군기시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