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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소쇄원(명승),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위치한 전통 정자인 소쇄원(瀟灑園, 명승).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소쇄 양산보가 1530년에 건립한 정자로,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자연계곡을 중심으로 애양단, 광풍각, 제월당, 고암정사 등 정자를 세우고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을 주위에 심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자연지형에 맞추어 정자를 세우고 수목을 심어 자연과 인공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창덕궁 후원이 자연환경에 적극 활용한 궁궐 정원을 대표한다면, 소쇄원은 당시 양반계층이 선호했던 계곡을 중심으로 조성한 대표적인 원림(園林)이다.

<담양 소쇄원(명승)>

계곡의 자연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건물을 세우고 수목을 심어 정원을 조성하였다. 원래 10여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 사랑채격인 광풍각이, 살림집인 제월당이, 작은 정자인 대봉대(待鳳臺)가 있다. 아랫쪽에 사랑채격인 광풍각이, 뒷쪽에 살림집격인 제월당이 보인다.

<소쇄원 입구 작은 연못.>

<대봉대>

연못 안쪽으로 소쇄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대봉대라 불리는 작은 정자를 세워놓고 있다.

<정자 내부>

원래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계곡을 중심으로 3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사랑채격인 광풍각(光風閣)은 계곡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마루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담양지역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광풍각 뒷편 제월당(霽月堂)은 ‘-‘형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대봉대는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남쪽편에 있는 초가지붕을 얹은 작은 정자이다. 광풍각 뒷편에는 양산보의 아들이자 필암서원에 배향된 대표적인 유학자인 양자징이 지은 고암정사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가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사랑채격 건물인 광풍각>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축대를 쌓고 세웠는데, 앞면 3칸, 옆면 3칸의 건물로 가운데 1칸짜리 온돌방을 두고 4면에 널찍한 마루를 두고 있다. 마루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 보면, 지역인사들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풍각 현판>

<광풍각 앞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

<계곡 담장과 오곡문>

계곡을 담장으로 막고 있다. 담장 아래로 계곡물이 흐르는 통로를 오곡문이라 한다.

<오곡문 뒷편>

소쇄원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창평천, 영산강 합류하는 증암천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정자는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동산이나 강,개천 등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소쇄원은 작은 계곡을 정원처럼 사용하고 있다.

<오곡문에서 내려다 본 소쇄원>

<오곡문 주변>

소쇄원을 세운 양산보는 창평(담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 서울로 상경하여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조광조가 죽은후 낙향하여 소쇄원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종사촌인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송순, 인종의 스승으로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평가받는 김인후 등과 소쇄원 등에서 교류하였다고 한다. 아들 양자징은 김인후의 사위로 그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적인 유학자로 김인후와 함께 필암서원에 모셔졌다. 양산보가 처음 소쇄원을 세웠을 때는 작은 정자만 있었는데,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여러 건물들이 세워졌다. 소쇄원 부근에는 김윤제가 세운 환벽당, 가사문학의 산실인 식영정, 증암천 상류에 조선초 전신민이 세운 독수정 등이 있다.

<제월당>

광풍각 뒷편으로 살림집이라 할 수 있는 제월당. 제월당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자형 집으로 온돌방 1칸과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내부>

대청마루에는 소쇄원을 찾은 유명인사들이 남겨 놓은 글들이 적혀 있는 현판들이 걸려 있다.

<제월당 마당에서 내려다 본 광풍각>

고암정사 
양자징은 48세가 되는 1570년까지 소쇄원에서 줄곧 생활하며, 학구당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차남인 그가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소쇄원은 적지 않은 제약이 뛰따랐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도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하였을 것 같다. 이를 위해 소쇄원 안에 건립한 것이 고암정사다. 고암정사가 언제 건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선조 7년(1574)에 고경명이 지어 양자징에게 준 시에 따르면, 양자징의 활동 공간인 부훤당이 고암정사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고암정사는 양자직이 관직에 나아가기 전인 1570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마 그 시기는 훨씬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제작된 ‘소쇄원도’를 보면, 고암정사는 팔작지붕 형태의 다른 건물과는 달리 맞배지붕을 한 3칸 건물이었다. 고암정사는 중간에 사라지고 현재는 대나무로 덮힌 터만 남아 있다. <출처:필암서원>

<소쇄원 대나무 숲>

무등산 서쪽 자락에서 발원하여 영산강과 합류하는 증암천 주변에는  호남지방 가사문학의 산실로 소쇄원, 식영정을 비롯하여 이 지역 선비들이 세운 크고 작은 정자들 들어서 있다. 광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등산 계곡 역할을 했던 이 곳은 조선시대 창평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근처의 창평천 주변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들이 선호했던 세거지의 특징들을 잘 갖추고 있다. 가사문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이 지역은 다른 지역 양반들이 경치가 좋은 곳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을 많이 설립한 것과는 달리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고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한 정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소쇄원 앞 들판>

아주 넓은 평야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소쇄원을 뒷받침할 정도의 충분한 농토가 있는 것 같다. 무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물이 풍부하여 옛날에 농사짓기에 편해 양반들이 선호했던 지역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들어가는 길>

담양 소쇄원, 명승,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으 주인집)과 광풍각(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출처:담양군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