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북구 충효동 마을 뒷동산에 위치한 작은 정자인 취가정(醉歌亭)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의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구한말에 세운 재실 성격의 정자이다. 마을을 대표하는 정자인 환벽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치가 좋은 증암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규모로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광주 취가정>
환벽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정자인 취가정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구한말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건물은 앞면 3칸 규모이며, 가운데 온돌방과 주위에 마루를 두고 있는 형태이다.
<앞에서 본 모습>
<취가정 현판>
<뒤에서 본 모습>
무등산 서쪽 자락에서 발원하여 영산강과 합류하는 증암천 주변에는 호남지방 가사문학의 산실로 소쇄원, 식영정을 비롯하여 이 지역 선비들이 세운 크고 작은 정자들 들어서 있다. 광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등산 계곡 역할을 했던 이 곳은 조선시대 창평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근처의 창평천 주변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들이 선호했던 세거지의 특징들을 잘 갖추고 있다. 가사문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이 지역은 다른 지역 양반들이 경치가 좋은 곳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을 많이 설립한 것과는 달리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고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한 정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취가정 뒷편>
취가정 뒷편으로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등이 있는 증암천이 내려다 보인다.
<취가정과 한벽당을 들어가는 길>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인 증암천>
김덕령(1567~1596년)은 충효마을 출신으로 환벽당을 세운 김윤제의 종손이다. 임진왜란 때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였다. 이후 반란과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취가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권필이 꿈에서 김덕령의 술에 취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래를 불렀다는데서 유래한다.
<충효당 마을에 있는 정려비각>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김덕령 형제를 배출하여 정조로부터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이다.
광주 취가정, 광주시 북구 충효동
취가정(醉歌亭)은 임진왜란 때 조선 의병의 총지휘관이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혼을 위로하고 충정을 기리려고 후손들이 세웠다. 정자의 이름인 취가정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죽임을 당한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1890년에 처음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 없어져 1955년에 다시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형태로 거실 한 칸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 안헤는 설주 송문회가 ‘취가정’이라고 쓴 현판과 송근수의 취가정기, 김만신, 최수하 등의 시가 걸려 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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