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황룡면 장성리에 있는 황룡전적(사적)이다. 이곳은 구한말인 1894년 대규모 농민봉기이자 미완의 혁명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로 장성군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필암서원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전투가 있었던 장소처럼 황룡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조형물 외에는 특별히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지만 동학혁명이라는 구한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는 곳이다. 1994년에 세워진 기념탑은 동학혁명을 상징하는 높이 30m의 죽창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앞에는 당시 혁명군이 사용하였던 총알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장태를 굴리는 모습을 형상을 하고 있는 조형물이 기념탑 위에 올려져 있다.
<장성 황룡전적(사적)>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장성으로 진격하여 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장소이다. 기념조형물 외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중요한 장소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황룡면 일대>
<황용전적 기념형물>
농민군이 무기이자 상징인 죽창을 형상화하였다.
<기념 조형물>
조형물 아래에는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을 무찌리기 위해 동학군이 고한안 장태를 굴리는 모습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장태는 대나무를 원형으로 길게 만들어 짚을 넣을 굴리면서 총알을 피할 수 있도록 했던 무기이다.
<전투장면을 묘사한 부조상>
황룡전투는 동학농민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던 전투로, 1894년 봉기한 농민군이 고부군 관아를 점령하고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정읍, 함평을 장악한뒤 장성으로 진군하여 관군의 예봉을 꺾기 위해 벌인 전투다.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은 관군 선봉대와 결전을 벌여 관군대장 이학승이 전사하고, 화포와 양총 100여점을 탈취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학군은 감영이 있는 전주로 진군하여 전라감사와 전주확약을 맺게 되었다.
<황룡전적지 부근 마을>
<필암서원(사적)>
전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필암서원(사적)이 자리잡고 있다.
<황룡리마을 주변 들판>
장성 황룡전적, 사적,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이곳 장성 황룡전적은 고종 31년(1894) 반봉건.반외세의 정신으로 일어선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정부에서 파견된 경군에 승리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이다. 황룡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라도의 수도이자 이씨왕조의 태생지인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과 일대접전을 벌였던 전투이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정부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의미있는 전투로, 동학군에게는 사기와 자신감을 경군에게는 낭패와 당혹감을 주어 경군의 행동반경을 위축시킨 계기가 되었다. 황룡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양총 1백여정 등 많은 무기를 빼앗아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하게 되었으며 몇차례 공방전을 벌인 후 동학군의 요구를 수용했던 전주화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황룡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신식무기를 갖춘 경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무기로 장태(닭의 둥지라는 뜻)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길게 만들어 짚을 넣어 굴리면서 총알을 피했던 무기이다. 현재 이곳에는 동학사상을 일깨우고 후세들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1997년에 동학혁명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 1기, 파고라 2동, 잔디광장, 경군대장 이학승 순의비 등이 세워져 있다. 장성 황룡전적은 역사적인 고증를 거쳐 1998년 4월 10일 국가지정 사적 40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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