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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남산의 힘] 목멱, 한양의 안산

2015년 가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남산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남산은 서울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나즈막한 동산으로 서울시민들에게는 생활속에 함께하는 친근한 산으로 애국가 구절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중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에 해당하는 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통감부와 신사가 설치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여러 부정적인 의미를 갖기도 했다. 특별전에서는 조선시대 남산과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권위주의 정권하에 남산이 가졌던 여러 의미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인왕산 성곽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산.

도심 빌딩숲 중간에 나즈막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목멱, 한양의 안산
1392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래로 남산은 한민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산이었습니다. 남산은 풍수지리와 유교이념에 따라 건설된 수도 한양의 내사산(內四山)으로,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을 구하는 국가의 수호 산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건도 초기 남산은 백성의 출입을 제한하고 벌채를 금지하는 등 철저한 규제 아래 보호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조의 기틀이 점차 마련되면서 풍류를 즐기려는 백성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습니다. 계곡마다 흐르는 맑은 물과 도성과 한강이 굽어보이는 풍경, 사시사철 푸르는 남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흥취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문인 사대부들에게는 정자를 짓고 우정을 나누는 풍류의 공간이, 백성들에게는 씨름과 꽃구경을 하는 놀이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사산금표도, 1765년,

도성안과 성저십리 이내에서 소나무의 벌채를 금지하고 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표석을 세운 경계를 나타낸 지도이다.

한양의 안산(案山)
수도 한양을 감싸며 성곽으로 이어지는 네 곳의 산을 내사산이라 합니다. 주산(主山)은 백악산, 좌청룡은 낙산, 우백호는 인왕산 그리고 주작인 남산은 안산이었습니다. 안산은 주산에 대하여 “책상 혹은 안석과 같은 존재로, 나지막하고 단정하게 읍(揖)하는 형태가 길하다.”하였습니다. 즉 푸근하게 올라온 남산은 한양의 이상적인 안산이었습니다. 안산인 남산은 도성과 봉수, 각종 군사기관 등이 입지하여 한양의 요새 역할을 하였습니다. 천도 직후 1396년부터 조선은 국력을 기울여 18.6km에 달하는 장대한 도성을 축조함으로써 한양의 울타리를 완성하였습니다. 세종대에는 나라의 위험을 알리는 봉수를 전국적으로 설치하여 국가의 안위를 매일같이 점검하였습니다. 남산의 도성은 남쪽에서 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한양을 지키는 방패였으며, 남산의 봉수는 전국에서 보내오는 봉수의 신호를 마지막으로 집결하여 대궐에 전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매일 저녁 피어오르는 봉수의 횃불을 보고 안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목멱산은 ….. 흔히 일컬어 남산이라 하는데 마치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상이고 산마루에는 봉수대가 마련되어 있다. 남산의 서쪽 봉우리 중에 바위가 깎아지른 듯한 곳을 누에머리, 곧 잠두라고 한다. 여기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더욱 좋다.
– 『한경지략』 –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보물, 19세기 후반,

전국지도인 동여도 중 수도 한양을 그린 부분이다. 목멱산은 백악, 인왕, 타락산과 함께 한양을 둘러싼 내사산이었다.

대전통편,

1785년(정조9)에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그 뒤의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이다. 권4 병전(兵典)에서 봉수에 대해 다루었다.

경국대전, 조선후기,

경국대전에서는 도성 내에서 무단으로 벌목하거나 채석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남산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였고 갖가지 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농계선생유고, 조선후기,

이수언의 문집으로, 목멱산은 영험한 기운이 있기때문에 국난을 당하면 위기를 극복하고자 제사를 지내는 기도처임을 설명하였다.

한양의 수호산, 목멱산
1395년 백악산에 진국백(鎭國伯)을 봉하고, 남산에 목멱대왕을 모시는 국사당(國師堂, 목멱신사)이 건립됨으로써 남산는 국가으 제사공간으로 공인되었습니다. 목멱신사가 있다고 해서 목멱산이라 불린 남산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었으며, 동시에 굿과 개인의 참배가 매우 성행한 민간신앙의 터전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와 함께 유입된 관우 사당인 남관왕묘, 제갈량과 관우를 모신 와룡묘, 민간에서 세운 관성묘가 남산 기슭과 지금의 장충동 지역에 자리하였습니다. 또한 마을신을 모신 부군당들도 남산 자락 곳곳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신이 산으로 내려와 인간을 다스린다는 숭상(嵩山)관념과 산에 지맥과 기가 흐른다는 풍수지리 관념에 따라 남산은 국가의 안녕과 개인의 복을 구하는 신성한 산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목멱조돈, 복제, 1741년,

한강 명승지를 그린 『경교명승첩』 중 한폭으로, 양천현(현 가양동 부근)에서 아침해가 걸린 남산을 바라본 모습이다.

국조오례의, 1475년,

길례에 중춘(음력 2월) 및 중추(음력 8월) 상순에 목멱산에 제사를 지내는 절차가 실려 있어 국가의 안위를 남산에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산 정상 팔각정.

원래 이곳에는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인왕산으로 옮겨진 국사당.

농암집, 1754년,

김창협의 문집으로 겨울 가뭄이 해소되기를 남산에 기원한 시가 실려 있다. 국가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남산에 의탁하여 당면한 시련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산 밑에 있는 도성 조석으로 대하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구름이 피어나서
가뭄이 들 적에도 촉촉히 적셔줬네
다른산 어찌 없으랴만 가장 가까이 의지하여
재앙이 올때적마다 치성을 드렸다네
– 김창협, 『농암집』 –

남관왕묘비명, 1752년,

조선 최초 관왕묘인 남묘(南廟)의 무안왕묘비 탁본으로 사도세자가 세자 시절에 쓴 글이다.

남산 중턱에 위치한 와룡묘.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던 도교적인 성격의 사당으로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이다.


백자병, 조선,

남산 회현자락 백범광장 발굴시 출토된 청화백자병이다.

임당유고(林塘遺稿), 1638년,

회현동 일대에는 동래정씨의 종족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살았던 정유길이 남긴 문집에 회현동 생활을 묘사한 시가 실려 있다.

동악선생집(東岳先生集), 1640년,

이안눌의 문집으로, 그는 묵사동(현 묵정동)에 기거하며 근처에 단을 쌓고 권필, 홍봉서 등 당대의 문장가들과 ‘동악시단’을 꾸려 시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선유봉(仙遊峰), 1742년, 복제,

양천현의 풍경을 그린 『양천팔경첩』에 실려 있는 선유봉 그림으로, 한강 건너 멀리에 남산이 보인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산붕우리들 낚시배에 가리고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종남산에 오르네
– 정선 –

천우각 금오계첩, 1768년,

1768년(영조 44) 9월 의금부 도사 10명이 조직한 금오계(金吳契) 모임을 정리한 『금오계첩』 중 김윤겸이 그린 삽화다. 남산 북쪽 골짜기 천우각 주변 실경을 표현했다.

친근한 ‘앞산’
‘남산’은 남쪽의 산이라는 뜻 외에도 ‘앞산’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늘 가까이서 마주하는 남산은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는 푸근한 곳이었습니다. 더욱이 산세가 완만하면서도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표 명소였습니다. 산에 오르면 도성의 전체 모습과 한강이 굽어 보이고, 사계절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여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남산의 아름다운 여덟 풍경을 뽑은 ‘남산팔영(南山八詠)’과 수많은 시에서 ‘목멱산 꽃구경’, ‘목벽산의 봉화’, ‘목멱산의 해돋이’ 등 남산의 매력이 찬미되었습니다. 또한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곳곳에 이루어 많은 문인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남산 북사면의 청학동, 귀록정을 비롯하여 회현동의 홍엽루, 쌍회정 등 경치 좋은 곳에서는 각종 모임과 시회가 자주 열렸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백납병풍(百衲屛風), 18세기,

정선의 회화 23점을 모아놓은 백납병풍 중 첫번째 화폭에 남산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구름에 둘러싸인 남산으로, 정상에 소나무를 표현한 것이 보인다.

백납병풍 중 첫번째 남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

남산의 뺴어난 여덟 풍경(南山八詠)
북쪽궁궐에 가로 지르는 구름
남강에 넘치는 물
바위 밑에 그윽한 꽃
고갯마루의 높은 소나무
3월의 답청놀이
중앙의 등산놀이
언덕에 올라 관등행사 구경하기
시냇물에 갓끈 빨기,
– 정이오 –

고종의 ‘자주 염원’: 장충단
군사시설인 남소영 터에 1900년 고종은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장충단을 설립합니다.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은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의 의열함을 기림으로써 군대의 사기와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하련느 일본 낭인들을 막아서다 피살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식 등의 영혼을 달랬던 것은 점차 간섭해오는 외세 일본에 대한 주주 의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장충단의 단사는 3층 기단에 14칸으로 웅장한 규모로 지어졌으며, 봄.가을 두차례의 제향과 군악연주, 조총 발사 등 장대한 예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자주적 항일 의지는 십년도 채 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 자리는 일본 식민지배의 영웅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장충단(奬忠壇)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 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은 서리와 눈발보다도 늠름하고 명절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는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제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를 복돋우고 군사들의 마음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장대하다
– 민영환, 장충단비문 –

나라를 위한 일에서 죽은 자에 대하여 반드시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것이 귀신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군사들의 기세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다. …. 울적하고 원망에 싸인 혼백들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어 통곡하는 소리가 저승에 흩어져 있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내가슴이 아프다.
– 『고종실록』 권40, 1900년 5월31일 –

장충단공원.

을미사변 당시 순국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민영환이 지은 글이 새겨진 장충단비가 세워져 있다.

무예가 번성한 남산
남산에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분영인 남별영과 남소영, 그리고 무기를 보관하는 화약고와 남창 등 군사기반시설이 위치하여 수도 방위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남별영은 묵정동, 지금의 필동에 위치했으며 남소영은 남소문 옆, 지금의 장충동에 위치해 있었다. 군사들은 인근에 들어와 거주하였고 그 일대 평평한 터는 그들의 무예 연마 장소가 되었는데, 바로 창동천과 연결된 상선대와 북록 주자동 끝의 예장(藝場)이었다. 또한 석호정이란 활터도 두어 백성들의 상무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단오와 같은 명절에는 도성 안 젊은이들이 모여 씨름을 겨루었는데 예장과 남사면 옆 녹사장이 씨름장소로 유명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훈도방주자동지, 1621년,

권희가 편찬한 주자동의 연혁과 풍속을 기록한 지리지이다. 주자동은 명동역과 충무로역의 중간 지역으로, 예장을 일부 포함하였다.

석호정 사진.

사진집 『조선』에 실린 석호정 모습이다. 남소영.남별영의 영향을 받아 무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남산에 모였다. 그 중 석호정은 대표적인 민간 활터로 장충단 뒷편 산기슭에 있다.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전국의 활터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꼽힌다.

금영명 명문화, 조선후기,

조선시대 오군영 중 하나인 금위영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로 남산 봉수대지에서 출토되었다.

남소영 안에 어가를 멈추고내려다보니 한가지 쾌사로다. 하늘은 군기를 엄숙하게 하고 땅은 해광을 진압하여 오도다.기병 정병은 병법의 변화이고 종횡으로 씩씩한 진영 벌여 있네
– 정조, 남소영에 제하다. –

남소영도, 18세기,

남소영에서 벌어진 연회장면을 묘사한 김홍도의 그림이다. 남소영은 장충동과 한남동을 잇는 고개의 남소문 근처에 있었던 어영청의 분영이다.

남산
위도 37˚32’~37˚33′, 경도 126˚58’~127˚00’에 위치한 남산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에 걸쳐 있습니다. 2009년 측량을 통해 남산은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남산은 남동-서북쪽으로 기다란 타원형이며, 긴 장축의 산은 두 봉우리와 다섯 지맥으로 나늬는데 최고 높이 서봉(265m)에는 N서울타워가, 조금 낮은 동봉(243m)에는 미군 통신대가 있습니다. 서봉에서는 남대문, 필동, 용산 방향으로 세 지맥이, 동봉에서는 장충동, 한남동 방향으로 두 지맥이 뻗어 나갑니다. 전체 면적의 86%가 해발 200m 이하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주로 북사면과 서사면이 경사가 가파르고 노출된 암반이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한 반면, 남사면과 동사면은 굴곡이 없고 완만하여 식물생장에 적합하고 산책하기 좋습니다. 두 봉우리가 이루는 은근한 산세는 예로부터 말이 안장을 벗어놓은 모양, 누에머리 모양같다고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