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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남산의 힘] 유신의 방패

남산에 개발독재시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시설들과 함께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군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와 권위주의 시대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자리잡으면서 일반이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주었다. 원래 남산북쪽에는 조선시대에도 군사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헌병대와 총독부가 설치되었는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도 그 역할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남산은 급속히 성장하는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측면과 함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남산에 남은 안기부 대표적 건물터.

남산 입구 옛 안기부가 있던 자리.

한옥마을로 바뀐 옛 수방사 자리.

인혁당 사건 관련 진술서, 탄원서,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고인들의 진술서와 사형선구를 받은 이주병, 김용원, 하재환의 아내들이 쓴 탄원서이다. 항소심 후 작성된 이 문서들은 결국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였다.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길 의문사 해명 촉구 성명서, 1975년,

1973년에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최종길 교수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한 문서이다. 이외 긴급조치로 인해 투옥된 교수 및 학생들의 복권을 요구한 내용도 담고 있다.

민청학련사건 항의서, 1975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 가족들 전원이 당국에 인권 유린에 대해 항의한 문서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공산정권 수립 기도 혐의로 180여 명이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민청학련사건 항의서, 1975년

민청학련관련 항의서, 1975년

진도가족 고정간첩단 사건 관련 박근홍의 진정서, 1981년

박정희대통령에게 보내는 인권탄압 중단 요청서, 1974년,

독일복음주의교회협의회에서 인권 탄압 중단을 요청한 문서이다. 시기와 내용상 민청학련사건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김근태 고문 피해 호소문, 1985년,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이 남편의 고문 사실을 호소한 전단이다. 김근태는 남산 인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고문을 받았다.

나는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가-안기부의 간첩조작극, 1985년,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수감된 황대권이 60일간 안기부 지하실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수기이다.

 나는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가-안기부의 간첩조작극, 1985년,

나는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가-안기부의 간첩조작극, 1985년,

보람찬 내일, 1972년,

10월 유신의 당위성과 미래상에 대해 홍보하는 문화공보부에서 발행한 유인물이다.

제9대 대통령 박정희 취임 기념물, 1978년,

국민의 직접선거가 아닌,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리는 왜 삼선개헌을 반대하는가, 1969년,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서 발행한 삼선개헌 반대를 주장한 홍보물이다. 언론과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개헌을 단행하였다.

최종길 고문치사 사건 관련 기자회견, 2002년,

최종길 고문치사 사건은 2002년에서야 비로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그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인혁당 재심 무죄판결의 경과와 의의 보고대회 자료집, 2007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2007년에 이르러서야 국가 조작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복권시켰다.

안기부.수방사 규탄자료, 1980~90년대,

남산 안기부와 수방사의 불법연행, 고문수사, 선거개입 등을 비판한 문서이다.

유신의 방패
원래 남산의 북사면은 계곡이 좋아 한양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헌병대와 총독부 등의 통치시설이 위치했었습니다. 유신 정부는 이곳에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특수시설단지를 만들었습니다. 옛 헌병대 자리에는 수도방위사령부를, 예장자락에는 중앙정보부를 설치하였습니다. 41개의 건물에 들어선 당시의 ‘중정’은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무서운 조직이었으며, ‘남산’하면 중정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권위주의 시대, 정권의 정치적 고비마다 많은 사람들은 영장도 없이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조작된 누명을 쓰기도 했으며 죽음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무소불위 ‘남산’에 의해 조작된 여러 사건의 진실들은 훗날 진실화해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노력으로 무죄로 밝혀졌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