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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릉] 왕릉을 세우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영대 왕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을 말하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선존 목조의 덕릉부터 마지막 순종의 유릉까지를 말한다. 또한 왕세자, 왕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園)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왕릉은 삼국이 통일되던 시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의 무덤에서 당나라에 영향을 받아 정형화된 왕릉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통일신라의 왕릉 제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왕릉에서 전해졌다. 조선왕릉은 모두 완전히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왕자와 공주, 후궁들의 무덤까지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왕릉 조성에 대한 제도와 규정 등이 국조오례의나 경국대전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과정과 관리 내역 또한 의궤나 능지 등 다양한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왕릉은 유교적인 세계관과 장례전통, 풍수지리사상 등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왕릉 조성에 관한 의식과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16년 여름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는 조선왕릉이 가지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 조선왕실의 장례의식과 왕릉의 조성절차,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있다. 조선왕릉은 서울 도심부터 근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손쉽게 접근하기 좋은 공간이며, 일정부분 왕릉에 대한 지식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조선의 왕릉제도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의 전시회였다.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2009년 6월 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의 27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의 42기 왕릉 중 북한에 있는 신의왕후 제릉과 정종 후릉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대한민국에 소재한 조선 역대 왕릉 40기가 모두 남아 전해진 완전성과 조선왕실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차별화된 진정성, 그리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지녀야 할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왕릉이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 등 실정법에 따라 효율적으로 통합 관리되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았다.

조선왕릉의 영원한 수호자, 문석인과 무석인

조선왕릉의 봉분 앞에는 문신과 무신의 모습을 한 석인이 영면한 왕과 왕비의 영혼을 지키고 있다.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석인은 왕릉의 가장 대표적인 석물로서, 왕과 왕비의 왕릉에는 문.무석인 각 1쌍씩 세워졌으나 사후에 추승된 경우에는 문석인만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시대에 따라 크기와 양식이 변화하였다. 조선초기부터 15세기 후반까지의 석인상은 대체로 2m 50cm 정도의 크기에 다양한 표현 방식이 시도되었고,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석인상의 크기는 3m이상으로 거대해지면서 얼굴의 크기가 커지고 전체적인 표현방식이 단순해졌다. 18세기 이후에는 석인상의 크기가 다시 작아지면서 표현방식에 사실성이 추구되었는데, 이는 당대의 사회와 왕실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위치.

조선 왕릉은 대부분 한양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의 위치는 풍수지리를 고려했지만 당대의 정치적 상황 등이 반영된 부분이 많다.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유교적 통치 이념속에서 절대적 권위와 위엄을 지닌 신성한 존재였던 왕과 왕비가 사후에 묻히는 왕릉은 생전에 거처하던 궁궐과 마찬가지로 성역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왕릉 위치의 선정부터 건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는 국가의 예법에 따라 신중하고 엄격하게 진행되었으며, 완성된 이후에는 왕과 왕비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왕실 의례의 장소로서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조선왕릉은 500년 역사의 건축, 조경, 조각, 제도, 의례 등 유.무형의 요소가 이루어져 있는 공간이다. 또한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왕릉이 대부분 온전히 남아 있어 역사적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힘들다. 2009년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이같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의 왕실문화와 통치철학, 국가이념의 결정체인 조선왕릉을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왕실의 영혼을 담은 채 500년 역사를 지켜 온 조선왕릉의 가치가 이번 기회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의 왕릉 건설은 왕은 죽은 후 장례절차와 함께 시작된다. 조선시대 국장절차는 왕이 죽은후 발인까지는 5~7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으며, 왕릉의 조성 또한 그 기간에 진행된다. 왕릉의 조성은 풍수지리, 관리의 용이성, 정치적인 상황과 국왕에 대한 평가 등이 반영되어 그 입지가 정해진다. 업적이 뛰어나거나 정상적으로 세자에 왕위가 계승되는 경우 등은 선왕의 의지 등이 반영되어 왕릉의 입지가 선정된다. 하지만, 국왕의 권위나 업적이 높게 평가받지 못한 경우는 왕릉조성에 용이한 선왕의 능역 부근에 왕릉이 조성되기도 한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태종, 세조, 효종, 숙종, 정조 등은 은 독자적인 능역을 형성하거나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곳에 왕릉이 조성된다. 임진왜란 당사자인 선조의 경우 동구릉에, 병자호란 당사자인 인조는 파주에, 숙종의 능역 부근에 본인 자리를 마련해 두었던 영조도 동구릉에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왕조의 국장 절차,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1758년』의 주요 국장절차

덕수궁 국장 화첩, 1919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고중의 국장 모습이다. 사진으로 조선시대 국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19년에 있었던 고종의 국장 장면을 흑백 사진으로 촬영하여 경성일보사에서 발간한 사진첩이다. 사진첩에는 국장에 관련된 사진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사진첩의 이름에 붙은 ‘덕수궁’은 덕수궁에 기거하던 고종을 지칭하는 말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순종 국장 기념 사진첩,

1926년. 조선의 마지막 국장이라 할 수 있는 순종의 국장 사진이다.

1926년에 있었던 순종의 국장을 촬영하여 경성사진통신사에서 발행한 사진첩이다. 국장의 준비과정부터 영결식까지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릉의 시작, 국장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의 장례 절차는 국장이라 하였으며, 왕릉은 국장의 절차와 함께 만들어졌다. 나라의 가장 큰 슬픔인 국장은 민간의 장례의식에 비해 장중하고 복잡했으며, 왕실의 각종 의례 중 소요기간이 가장 길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장례준비를 위한 임시 관청이 도감이 설치되어 관련 절차를 진행하였는데, 국장도감(國葬都監)은 관(재궁梓宮)을 왕릉에 모시는 일을, 빈전도감(殯殿都監)은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염습(殮襲)과 상복을 준비하는 일을, 산릉도감(山陵都監)은 능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魂殿都監)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많은 경우 빈전도감이 혼전의 업무까지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렸다. 국강은 왕과 왕비가 승하한 후 발인을 거쳐 재궁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 끝났는데, 이 과정에 약 27개월 가량 걸렸으며 대략 70단계에 달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국조오례의, 1475년.

성종때 제도화된 국장의 절차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 의례를 길례, 가례,빈례,군례,흉례로 구분하여 전체 5권 2책으로 정리한 책이다. 국장에 대한 내용은 흉례에 속해 있으며 권7 59개조, 권8에 32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국조상례보편, 1758년.

조선후기 국장 절차를 제도화한 내용이다.

국가의 기본 예식을 정리한 『국조오례의』 중에서 상례 부분만을 따로 수정.증보한 책이다. 홍계희가 왕명에 의해 1758년(영조 34)에 간행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 국가 상례의 준칙이 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철종국장도감의궤, 1865년, 보물

철종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이다.

국장의 진행 과정과 각 관청 간의 연계와 재정의 출납, 인력의 동원과 사용한 제기 및 의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철종빈전혼전도감의궤, 1865년, 보물

철종의 국상 중 발인 전까지 관을 모시는 빈전과 부묘 전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는 임시기관인 빈전혼전도감에서 준비하고 거행한 사실들을 기록한 의궤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 1865년, 보물

철종의 예릉 조성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이다. 전체 공사의 과정을 기록한 도청의궤와 실무를 담당한 각 부서의 역할이 기록된 각소의궤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순종황제애책문, 1926년경

순종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글로 민영휘가 지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슬픔을 나타내는 글을 지어 올렸는데, 이 애책문에는 지존을 잃은 슬픔과 함께 살아 계실 때의 행적을 적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순종황제인산만장, 1926년경

순종황제의 장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적은 만장을 모아 놓은 것이다. 만장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 만사라고도 한다. <출처: 고궁박물관>

인종옥책, 1545년

1545년(명종 즉윈년)에 승하한 인종에게 금보와 함께 제작하여 올린 옥책이다. 옥책은 8폭으로 되어 있으며, 48행에 걸쳐 인종의 덕을 기리며 묘호와 시호를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소병풍, 조선 빈전과 산릉 수도각,

혼전 어재실에 배치하였던 6폭 소병풍으로, 바탕면에 종이나 저포, 비단만을 바르고 그림이나 글씨로 꾸미지 않았다. <출처: 고궁박물관>

인종금보, 1545년

1545년(명종 즉위년)에 만들어진 인종의 어보이다. 이 어보는 인종이 승하한 후 ‘인종’이라는 묘호와 ‘헌문의무 장숙흠효’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만든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조성
조선왕릉의 조성은 국상 직후부터 임시기관인 산릉도감이 담당하여 약 5~7개월 동안 최대 15,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는 대공사였다.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명당을 찾아 왕릉의 자리를 찾았는데, 보통 풍수적 길지라고 할 수 있는 배산임수의 입지를 갖추었고 산이나 지형지물로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격리되고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를 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구역 내의 왕릉이나 바로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 중 한 곳을 선례로 삼아 규모와 정자각의 체제, 석물의 크기 등을 맞추어 왕릉을 조성하였다. 왕릉의 조성은 석물을 제작하는 일에서부터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정자각 등의 건물을 만드는 일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산릉도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작업장을 나누어 여러 기구를 개설하여 업무를 분담하였다. 왕릉 공사에 필요한 각 관청에는 많은 수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장인들은 17세기 초부터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워 부역의 형태로 조달하였으나, 이후에는 인력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명릉도>, 1757년 이후.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왕릉을 그린 산릉도이다.

최고의 명당을 찾아서
왕릉의 자리는 미리 정해놓은 후보지들을 예조에 소속된 관상감의 지관들을 중심으로 풍수에 밝은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한양 주변 백 리 안팎의 여러 곳을 살펴보고 정하였다. 이를 ‘간심(看審)’이라 하며, 왕릉의 자리는 세번의 간심으로 결정하였다. 첫번째 간심에서는 10여곳 이상을 둘러본 다음 산도를 그려 검토한 후, 그 중 두세곳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다시 간심을 하여 한 곳을 결정하고 다시 그곳을 세 번째 간심한 다음 확정하였다. 왕릉으 자리는 풍수지리에 따라 왕실과 국가를 번영시킬 수 있는 길지인 동시에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격리된 곳이면서 도성과 멀지 않아 후대 왕이 의례를 위해 이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했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장소로 왕릉지를 정하였기 때문에 이전 왕릉의 근처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그 결과 현재의 구리시(동구릉), 고양시(서오릉, 서삼릉), 파주시(파주 삼릉) 등에 여러 능이 가까이 모여 조성된 왕릉군이 생겨나기도 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북도각릉전도형>, 1808년 이후

함경도에 소재한 태조 4대조 능과 태조와 관련된 사적지를 그린 그림으로 산릉도 6폭, 사적지 그림 6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산릉도는 6폭 모두 풍수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출처: 고궁박물관>

《경이물훼》중 <태조망우령가행도>, 19세기

태조가 망우령에서 자신의 능지를 살피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태조가 남재의 예비 장지터를 자신의 능지로 정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의령 남씨 집안에 전래된 왕실 행사도를 모사한 화첩의 일부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여지도》중 <경기부충청도>, 18세기

1책 8장의 필사본 지도 중 경기도와 충청도를 한데 묶어 제작한 제1창 <경기부충청도>이다. 당시 조성된 왕릉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을 만든 사람들
조선왕릉을 만드는 업무는 산릉도감이 전담하였으며, 산릉도감은 총호사 1명, 제조 3~4명, 도청 2명 등 25명 내외의 관리로 구성되었다. 산릉도감은 토목과 건축공사, 각종 석물의 제작과 설치, 매장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능별로 9개의 부서를 만들었다. 이중에서도 왕릉의 임시건물과 기계류 제작을 담당했던 삼물소, 정자각 등의 공사를 담당했던 조성소, 석물 제작을 담당했던 부석소에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조선왕릉의 공사에 필요한 장인들 중 조각 등 고급기술이 필요한 업무를 맡은 장인의 경우에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많은 공사에 투입되었으며, 직업을 세습하기도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광재 현판,

세조와 정희왕후의 왕릉인 광릉 재실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보인다. 흑색 바탕에 음각으로 새겨 분칠을 하여 글씨를 표현하였으며, 판의 가장자리를 깎아서 테두리 장식 효과를 냈으며 뒷면 또한 음각을 하여 장식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1800년, 보물

1800년 7월부터 11월 사이에 진행된 정조의 건릉 조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과 특이사항에 대한 보고 문건과 전교, 세부 물품 내역서와 공정과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산릉도감 계회도, 1575년, 보물

1575년(선조8)에 제작된 명종비 인순왕후 장례 당시 산릉도감관원의 계회도로, 권벌의 아들 동보가 당시 도감 계원으로 받아서 그의 자손에게 전례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신정왕후수릉산릉도감의궤, 1892년, 보물

1890년 4월 17일 승하한 익종비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1890년 5월 13일 산릉 공사를 시작하여 9월5일 안릉전을 행할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동구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인 건원릉 주변에는 많은 왕릉이 자리잡았다.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 등을 고려해야 하며, 많은 땅이 능역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새로운 능역을 조성하기는 힘들었다. 왕권이 강력했던 왕이 아닌 경우는 대부분 정치적, 경제적 이유 등으로 기존 능역에 왕릉이 자리 잡았다. 봉분의 형태에 따른 조선왕릉의 형식. 왕릉은 봉분을 조성하는 형태에 따라 한사람이 매장된 하나의 봉분을 단독으로 배치한 단릉(單陵),  봉분 두 개가 나란히 배치된 쌍릉(雙陵), 두사람 이상을 하나의 봉분에 매장한 합장릉(合葬陵), 봉분이 각자 다른 언덕에 배치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봉분 두 개가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봉분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三連陵)이 있다.

태조의 건원릉.

 한사람이 매장된 하나의 봉분을 단독으로 배치한 단릉(單陵)이다.

태종의 헌릉,

봉분 두 개가 나란히 배치된 쌍릉(雙陵)이다.

세종의 영릉,

두사람 이상을 하나의 봉분에 매장한 합장릉(合葬陵)이다.

세조의 광릉.

봉분이 각자 다른 언덕에 배치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가운데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있다.

효종의 영릉.

봉분 두 개가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헌종의 경릉.

봉분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三連陵)이다.

조선왕릉, 세우다.
왕릉의 건설은 왕과 왕비의 장례인 국장 절차와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의 국장은 최고의 예를 갖추어 치러졌으며, 각종 의례를 준비하는 임시 관청인 도감(都監)이 설치되어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왕과 왕비의 승하에서 발인까지는 5~7개월 정도가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왕릉의 위치 선정부터 능침과 부대시설, 석조물의 조성이 진행되었다. 왕릉의 자리는 풍수지리에 따른 길지이면서 향후 관리 및 의례 시행 등을 고려하여 도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정하였다.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즉시 왕릉의 건설 절차가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이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임시 시설물을 설치하여 엄숙하게 진행하였다. 모든 공사가 끝난 뒤 국장 절차에 따라 왕과 왕비의 관이 안치된 왕릉은 의례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변의 숲까지 공간의 성격에 맞추어 조성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