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에 남아 있는 양진당(보물)이다. 이 저택은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에서도 종택에 해당하는 고택으로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영(1539~1601)의 고택이다. 사랑채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류운룡의 아버지이자 관찰사를 지낸 류중룡의 호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으로 이 집을 크게 중건한 류영의 어릴때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원래 99칸 저택이었던 이 저택은 ‘ㅁ’자영 살림집과 별당형식으로 지은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별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의 큰 규모로 앞면 3칸은 대청마루,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마루는 일반가옥의 사랑채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며, 대청마루에 달린 문은 모두 열 수 있게 되어 있어 누각과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서원이나 향교의 강당과 비슷한 규모로 주로 이곳에서 문중회의나 집안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일반 가옥 건물 중에서는 건축양식과 제작수법이 우수한 건축물이다.
<안동 양진당(보물)>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하회마을 서쪽편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양진당이다. 보물306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에서도 종택에 해당하는 집으로 류성룡의 아버지인 류중영(1515~1573)과 형 륜운룡(1539~1601)이 살았던 집이다. 원래는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대저택으로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고 한다. 대체로 바깥쪽 행랑채들이 없어지고 담장으로 바뀐것으로 보인다.
<양진당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과 행랑채>
양진당은 경북지역 대부문의 고택과 마찬가지로 안채와 사랑채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고택 왼쪽편 솟을대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솟을대문 사이로 보이는 사랑채>
<사랑채 행각>
사랑채 행각에는 소를 키우던 외양간(마구간?)과 작은 온돌방이 있다.
<솟을대문 사이로 보이는 마당>
지금은 담장으로 외부와 구분하지만, 99칸 저택이었을 때는 바깥쪽에 행랑이나 작은 사랑채 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
사랑채는 ‘ㅁ’자형 안채 옆으로 ‘-‘자형을 이어붙인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축대를 높게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는데,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안채와 연결된 1칸은 온돌방으로 하고, 나머지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는데 마을 종택으로 문중회의 등이 열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정면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고택이라는 현판이 결려 있다. ‘입암立巖’은 류성룡의 아버지로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택 이름인 양진당(養眞堂)은 이 저택을 크게 중수한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사랑채 대청마루에 ‘양진당’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 옆 쪽문 뒷편으로는 양진당 불천위 조상에 해당하는 류중영과 류운룡을 모신 2개의 사당이 있다.
<사랑채>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축대를 높게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아 웅장해 보인다.
<사랑채 대청마루>
앞면 3칸, 옆면 2칸의 넓은 대청마루로 ‘양진당’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는 집주인이 외부인을 접견하는 것이 주기능이나 이곳 양진당은 하회마을 종택으로 문종회의나 집안 행사 등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툇마루>
사랑채 앞에는 난간이 있는 복도를 두고 있으며, 안채와 연결되는 작은 쪽문을 통해 이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툇마루에 장식적인 목적의 난간을 두는 것은 조선후기나 구한말 한옥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이다.
<온돌방>
사랑채 왼쪽 온돌이 깔려있는 방은 집주인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면서 생활하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온돌병 옆을 판문이 있는 통로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왕래할 수 있다. 이 출입문은 집안행사시 안채에서 준비한 음식을 행사장소인 대청마루로 옮기는 통로로 사용되었는데, 마을 종택으로 집안행사때 많은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마당을 넓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사당 출입문>
불천위 조상인 류중영과 류운룡을 모신 사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이다.
안채
양진당의 살림집이라 할 수 있는 안채는 경북지방 고택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ㅁ’자형 주택 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대청마루 판문과 마당의 작은 쪽문을 통해서 사랑채를 출입할 수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으로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안채>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양진당 살림집. 정면 행랑채만 중문 포함 8칸에 이르는 대저택이다. 중문 왼쪽으로 2개의 방과 대청마루를 두고 작은 사랑채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변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홍수에 대비하여 대체를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고 있다.
<안마당>
안채도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2칸규모의 안채 대청마루는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챈 왼쪽으로 날개채를 두어 방과 창고 등을 두고 있다. (*하회마을 양진당은 안채를 공개하지 않아 참조로 인천 월미공원에 복원한 양진당 사진임)
<온돌방과 광으로 구성된 왼쪽편 날개채>
<부엌과 광 등으로 구성된 왼쪽편 날개채>
안채 부엌 위에는 음식을 보관하는 상방을 두고 있으며, 창문을 통해 바람이 잘통하게 하여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안동 하회마을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로 풍산류씨 집성촌이다. 양진당은 풍산에서 살단 입향조 류종혜가 하회마을로 들어와 집을 지었던 곳이라고 한다. 하외마을에는 류성룡 종택인 충효당(보물)을 비롯하여 제일 큰 규모의 저택인 북촌댁, 남촌댁 등 고사와 옥연정사, 겸암정사 등 정자, 인근에 서애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 류운룡을 모신 화천서원 등이 있어 조선시대 지방의 권문세가들이 살았던 집성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회마을 북쪽 부용대 절벽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
하회마을은 서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흘렀다가 다시 서쪽으로 흐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전체가 동쪽을 제외하고는 강을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양진당은 마을 서쪽편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꽃모양을 하고 있는 마을 형상에서 꽃술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명당이라고 한다.
안동 양진당, 보물,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이 집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하회마을에 들어와 최초로 지은 집이기에 유서가 깊다. 15세기 무렵에 지은 후 임진왜란 때 화재를 겪기도 하였고, 여러 대에 걸쳐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대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 곳 사랑채에서 가진다. ‘양진당’이라는 이집은 풍산 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1687~1761년)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 ‘입암고택’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안동시청>
* 참조:
1. 두산백과
2. 한옥의 미, 경진당
3. 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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