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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벽암대사비’이다. 조선중기 승려인 벽암선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단순한 형태의 비석익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참전했으며 법주사를 크게 중창했던 벽암선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고 있다. 비문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그 옆에는 송시열이 지은 속리산의 내력을 적은 글을 새겨 놓은 속리산 사실기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벽암대시의 행적을 적은 비석과 송시열이 글을 지은 속리산기실비가 세워져 있다.

벽암(碧巖)은 보은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출전하여 호남지방에서 활동했으며, 인조 때에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병자호란때에는 의승들을 모집하여 참전을 준비하였으나 강화가 성립하여 지리산으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벽암은 승려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고, 전국 각처에 산성을 축성하는데 참여하여 불교가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조선후기에 새로이 부흥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화엄사와 쌍계사를 중수하는 등 거듭된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사찰들을 복구하는데 기여하였다. 속리산 법주사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으며, 그의 승탑은 조계산 송광사에 위치하고 있다.

<벽암대사비>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약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어 놓고 있다.

<벽암대사비 윗부분>


<비몸에 적힌 글>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벽암대사비 옆에 있는 작은 비석>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이 비석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1575~1660년)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5년(1664)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며 규모는 높이 213㎝, 폭 110㎝, 두께 35㎝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명을 모은 후 항마군이라 이름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출처: 문화재청>

<속리산 사실기비>


<비석에 적힌 글>

속리산의 내력을 적은 비석으로 송시열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비각에 걸려 있는 현판>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이 비는 1666년(현종7)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3cm, 너비 65cm이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서 속리산이 명산암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있는데 내용은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거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 명산에 큰 거북이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을 찾다가 마침내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