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있는 삼년산성(사적)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인 5세기 소지왕 때(470년) 쌓았다. 삼년산성이 위치한 보은읍은 상주와 청주,대전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중요한 교통로 중 한곳이며 삼국이 한강유역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백제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길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주변에는 1,600여기에 이르는 많은 고분들이 남아 있어, 당시 신라가 이곳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3년에 걸쳐서 성을 쌓았다고 하여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삼국시대 태조 왕건이 이곳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보은 삼년산성(사적)>
삼국시대 신라가 한강유역을 진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통로에 쌓은 산성이다. 고구려 산성의 영향을 받았지만 신라 산성 고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삼년산성 전경>
보은읍 방향으로 흐르는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삼년산성은 성벽이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전체 길이는 1,680m에 이른다. 축성방식은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하게 쌓은 석축식 산성이다. 고구려 산성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신라 고유의 축성방식이 보인다.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고 있는데, 4개의 성문 7개의 치성, 우물터, 물이 흘러라가는 수구(水口) 등의 시설을 두고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깥쪽에만 돌로 쌓은 석축성의 형태를, 남쪽과 북쪽은 돌로 쌓은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13~20m에 달하며, 폭 8~10m 이를 정도로 상당히 넓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년산성 배치도>
보은읍 방향의 서문을 주출입문으로 하고 있으며, 남.동.북문을 두고 있다.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능선 정상부 등에 치성을 두고 있다.
<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마을에서 보이는 삼년산성>
돌로 쌓은 석축이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문으로 들어가는 길>
<삼년산성 서문터>
마차가 출입했던 바퀴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문 앞 물을 배출하는 수문>
<성안에서 보이는 성문>
서문 주변으로는 돌로 쌓은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폭이 상당히 넓고 건고해 보인다.
서문지(西門址)
삼년산성의 주 출입문으로 추정되는 서문지는 산성 문지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 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낀 지점의 북쪽 경사면에 있어 성 박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또한 서문지를 중심으로 남북을 2개의 치성이 배치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80년 보은 지역의 대홍수로 후대 문지 아래층에서 1차 문지로 추정되는 자취가 노출됨에 따라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서문은 2단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차 문지는 기둥홈과 문설주 홈, 문확 홈이 파인 신방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 225cm, 폭 422cm의 규모로 되어 있다. 특히 문지방석에서 폭 166cm의 마차 바퀴 마멸 흔적이 발견되어 무척 큰 마차가 통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일반적인 성문의 구조와 다르게 외부로 열리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2차 문지는 2차 문지가 매몰된 후 안쪽으로 들여 조성하였는데 수해로 남쪽의 신방석이 위치가 바뀌어 문구부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2차 문지는 1차 문지와는 반대로 성문이 안으로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북서 방향 성벽>
치성이 있는 북서쪽 봉우리로 연결되는 성벽. 상벽 안쪽에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에 글자가 새겨진 암각자>
연못 이름인 ‘아미지(蛾眉池)’라 새겨진 글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암각자(岩刻字)
삼년산성 내 연못 맞은 편 암석지대에 새겨진 글자들을 말한다. 가장 아랫부분에는 아미지(蛾眉池), 윗부분에는 유사암(有似巖)과 옥필(玉筆), 그리고 보은사 쪽 앞벽에 남술(南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 가운데 ‘아미지’는 규모도 크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당초의 연못이 점차 줄어들어 서쪽 성벽 근처에 마치 반달 모양으로 남아 있던 모습을 보고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 2m, 너비 3.5m 크기의 수직 암벽에 높이 66cm, 폭 19cm로, 신라의 명필가 김생의 글씨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미지’가 새겨진 암석 위에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평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산성 경관을 조망하거나 적을 감시하려고 지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삼년산성 내부>
<연못>
산성내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연못인 아미지(蛾眉池).
<서문 동쪽 성벽>
넓적한 중간크기의 돌로 촘촘히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 산성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치성>
능선 중간쯤에 성문을 방위하기 위해 쌓은 치성이 있다. 일반적인 산성의 치성과는 달리 곡선적인 반원형 치성을 하고 있다.
<서문 남쪽 성벽>
<남문이 있는 능선으로 오르는 길>
<성벽 너머로 보이는 보은읍 소재지>
비교적 넓은 농지들이 있다.
<서문 주변 성벽>
서문 북쪽편과 봉우리에 치성이 있다.
<성벽>
석축의 폭이 상당히 넓다. 여장이 있는 조선후기 산성과는 달리 석축위에 목책을 설치했다.
<삼년산성 남쪽편 모서리에 위치한 남문>
병사들이 출입하는 통로라기보다는 모서리부분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치성 성격을 갖는 곳이다.
<삼년산성 남문>
성문이 좁은 편이며, 사다리를 이용해서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이다. 출입문 기능이 없는 곳을 여러차례 폐쇄되었다고 한다.
남문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 끝에 위치하며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지은 치성(雉城)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 문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지의 규모는 너비 3.6m, 길이 10.8m이고 높이는 서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약 5m, 동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9m에 이른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으로 두세 차례 개축하다가 결국에는 문 입구를 폐쇄하였으며, 남문지 부근의 성벽도 두세 차례 개축했다. 문지 터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바닥 확쇠 한쌍과 문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 못과 철제 광주정이 출토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남문 서쪽 성벽>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았으며 그 너머로 보은읍 지역이 내려다 보인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의 성격을 갖는 지점이다.
<남문에서 산성 동남쪽 봉우리에 있는 치성으로 연결되는 성벽>
원래 성벽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성 동남쪽 봉우리에 위치한 남동치성>
상주에서 보은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감시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성격을 갖는 곳이다.
<남문에서 연결되는 성벽>
<남동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지역>
상주에서 보은으로 들어오는 교통로이다. 부근에는 1,600여기의 신라 고분이 확인되고 있는 대야리고분군이다. 신라가 이곳에 산성을 쌓으면서 많은 인원들을 이주시킨 것으로 보인다.
보은 대야리 고분군
이 고분군은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보은읍 어암리, 대야리, 성주리, 길상리, 풍취리, 강신라와 탄부면 평각리에 분포하고 있다. 오정산을 중심으로 비탈진 지역 곳곳에 볼 수 있으며 600ha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봉분의 지름이 15~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168개소, 10m 내외의 중형 고분이 141개소, 소형 고분이 1,225개소로 모두 1,64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몇 개의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며 대야리와 평각리 경계 지역에서는 신라 고분군 중 지름 20m에 달하는 대형 봉토분이 많이 조사되었는데 이렇게 많은 수가 조사된 유적은 영남 지방을 제외하고는 보은 삼년산성 고분군이 유일하다. 고분의 구조와 주변에 수습된 유물로 볼 때, 삼년산성이 축조 시기가 5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사이에 신라인이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야리 고분군은 산성과 고분군이 함께 분포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중부 지역 최대의 신라 고분군으로서, 신라 묘제와 토기 편년 연구 및 신라 지방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
<남동치성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사실상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 형태를 하고 있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바깥쪽에만 돌로 석축을 쌓은 석축성 형태를 하고 있다.
<동문 주위 성벽>
동문은 속리산 말티재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경북 상주로 연결되는 25번 국도가 지나간다. 성문 아래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심한 편이다.
<삼년산성 동문>
멀리 속리간 법주사로 연결되는 말티재고개와 주변 산들이 보인다. 성문 안쪽은 옹성처럼 ‘ㄹ’자 형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동문지
동문지는 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에 있으며, 이곳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수구(水口)가 있다. 동문지의 원래 모습은 성벽의 안쪽 약 절반 정도가 다른 곳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ㄹ’자형으로 돌아야만 통행이 가능한 형태였다. 지표에 남은 모습을 보아 동문지는 적이 공격해 올 때 방어를 겸비한 특이한 성문 구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는 적어도 서너 차례에 걸쳐 수축하고 개축했으며 ‘ㄹ’형 구조는 후대에 문지 조성 과정에서 축조된 구조물로 밝혀졌다.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 인접 성벽 위쪽에서는 삼국시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이 발견되었고, 안쪽의 평평한 곳에서는 방아확, 돼지 모양의 기와조각, 목제 망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동문 주변 성벽>
경사가 심한 지역에 성벽을 쌓아 외부에서 성벽을 공략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능선을 따라 석축성을 쌓고 있다.
<삼년산성 북동쪽>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길들이 보인다.
<북동쪽 성벽>
<북동쪽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
<북동치성>
산성 북동쪽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삼년산성 동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와 비슷한 기능을 갖는 곳이다.
<북동치성>
<북동치성에서 보이는 보은읍치 서북쪽 들판>
<북문 주변 성벽>
삼년산성 북동치성에서 서북치성으로 이어지는 성벽. 중간에 북문이 보인다.
<북동치성에서 보이는 삼년산성 내부>
<북문 주변 성벽>
<삼년산성 북문>
북문지
북문지는 성문 밖으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어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성문 양식으로 보았으나, 발굴 조사 결과 차단벽으로 추정되던 시설은 후대에 축조된 치성으로 밝혀졌으며 현재의 성문은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북문지 입구에는 처음 쌓은 성벽이 붕괴된 후 성벽의 채움석을 정리한 후 문구부를 설치하였고 바닥면은 바깥쪽으로 경사지도록 하였다. 규모는 폭은 3.5~3.6m, 길이는 7~7.5m에 이르며 문부 안쪽으로 성안으로 통할 수 있는 6m 너비의 계단이 1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후대에 조성된 치성은 처음 쌓은 성벽의 바깥 면에 빗대어 축조한 것으로 길이 6.6~7m, 너비 12~13m의 규모이며 양쪽 측벽과 모서리 부분이 심하게 붕괴되어 있다. 또한 치성 상부에서는 4개의 초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는 정면 5~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서북치성으로 연결되는 성벽>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동문 안쪽에 있는 작은 사찰>
현재의 사찰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 산성을 관리하던 승병들이 이곳에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 앞에서 보이는 남동치성과 주위 성벽>
보은 삼년산성, 사적,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12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마립관 8년(486)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규모로 수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하여 삼년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삼국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둘레 1,680m, 폭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다수의 건물터가 남아 있고, 산성 인접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반원형 치성과 성내 배수를 위한 수구 등 특이한 축성양식과 축성 및 수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아미지 인접 암각 군에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김생의 글씨체로 전해오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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