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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천사(興天寺), 태조가 신덕왕후의 정릉 원찰로 세운 사찰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흥천사(興天寺)이다. 이 사찰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조성하면서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창건되었다. 흥천사는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부근에 있었는데 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이후에도 오랜 기간 덕수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태조가 창건한 사찰로 권위가 있었기때문에 한양 도성안에 큰 사찰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연산군 때 큰 화재로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흥천사는 대찰로서 위상을 잃어버리고 급격히 쇠퇴한다.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불교를 크게 지원했던 인물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연산군이 원각사를 비롯하여 도성내 큰 사찰들을 없애버린 것으로 보인다. 유학자인 사림들이 주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불교를 배척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대에는 다른 곳으로 절을 옮겨짓고 신흥사로 이름을 고치기도 했으며, 정릉이 복구된 이후 정조 때 정릉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에 크게 중건하였다고 한다.

흥천사가 정조 때 중건되기는 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불전들은 대부분 구한말인 철종과 고종대에 지어졌으며 구한말 사찰건축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북악산 동쪽편 자락 언덕에 가람을 조성하고 있는데, 경내 마당을 넓지 않은 편이다. 강당과 요사채 기능이 합쳐전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던 ‘대방’이라는 건물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 뒷편에 주불전인 극락보전, 좌.우에 지장전과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다. 구한말 왕실의 비호를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지원하여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현재 사찰에는 대원군이 쓴 현판, 영친왕 쓴 글씨가 남아 있고,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이곳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원래 흥천사에 있었던 동종(보물 1460호)은 지금도 덕수궁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북악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흥천사>

태조가 정릉 원찰로 세운 큰 사찰로 원래 덕수궁 부근에 있었으나, 불교를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때문에 정릉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일주문>

<흥천사 대방>

조선후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건물로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와 신도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법회를 여는 강당 기능이 같이 있는 건물이다.

<누마루>

<뒤에서 본 대방>

양쪽 날개채를 달아 내었다.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1853년(철종4) 건축
극락보전은 1853년(철종4)에 세워진 것으로,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흥천사의 주불전이다. 태조는 1397년(태조6)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조성하고 곁에 흥천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하지만 1409년(태종9)에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없어졌다. 1669년(현종10)에 정릉을 수리하고 근처 암자를 옮겨 신흥사라고 했으나, 1794년(정조18) 현재 터에 다시 지은 뒤에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름을 되찾았다. 극락보전은 다포로 공포를 짠 팔작지붕집이며, 규모는 정면3칸 측면 3칸이다. 판벽에는 불교 고사를 가득 그렸는데 반야용선도가 눈에 뛴다. 꽃문살과 기둥 위에 장식한 용머리 조각은 조선말기 건축에 나타나는 장식의 경향과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서울 근교 사찰에는 대방이란 건물을 짓는 경향이 등장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흥천사 대웅전 앞에도 대방이 있다. <출처:서울시청>


<문살장식>

포도나무와 작은 동물을 표현하고 있다.

<명부전>

흥천사 명부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1855년(철종6) 건축
1855년(철종6)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로 1894년(고종31)에 고쳐 지었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하여, 많은 사찰에 명부전이나 지장전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기둥 위에 다포와 익공을 절풍한 공포를 짜고 맞배지붕을 덮었다. 기둥머리에는 용 모양으로 조각한 부재를 끼워 장식을 더하였는데 이는 대웅전을 만든 건축방식과 비슷하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을 배치하고, 벽에 시왕도를 걸어 명부임을 나타냈다. 이에는 조선후기 사찰의 건축 특성이 드러나 있다. 흥천사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 원찰로 도성 안의 정릉 옆에 지어졌다. 도중에 터를 한번 옮겼다가 1794년(정조18)에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대웅전과 명부전을 세웠고, 고종대에 흥선대원군 등 왕실의 지원을 얻어서 절의 모습이 새로워졌다. 당대의 명필로 이름 높았던 흥선대원군이 만세루에 걸려 있는 흥천사 현판 글씨를 썼다. <출처:서울시청>

<지장전 뒷편 미륵불입상>

<극락보전 왼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관음전 옆 연화대>

<사찰 안쪽에 있는 요사채>

<덕수궁에 남아 있는 흥천사명 동종(보물)>

태조가 신덕왕후를 위해 만든 것으로 ‘흥천사’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말 중국종의 특징이 반영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범종이다.

흥천사 연혁
1396년에 조선 태조 고황제 5년에 태조후비 강씨 신덕왕후꼐서 승하함으로 능지를 한성부 서부 황화방(지금 중구 정동)에 정하고 1월에 창봉함에 있어서 환후에 원찰을 건립하기 위하여 그해 12월에 능지 동편에 개기하여 1398년 7월에 170여칸에 대찰을 준공하여 흥천사라 명명하였다. 1492년 7월에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높이 2.8m의 대종을 본 사에 주조하다. 1504년 12월(연산군10)에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재 본사를 소실하였으며 1508년에 정릉을 숭화방 사아리로 봉하고 본사는 구지에 두고 사아리 능방에 소암을 신축하고 신흥사라 하다. 1669년에 신흥사가 능실에서 너무 구근하므로 우문외 창립 정유지로 이건 하였으나 건물이 극히 초초하야 1794년 9월에 본사주지 산경화상과 민경화상이 사아리로부터 돈암동 현위치로 이건하다. 1910년 덕수궁 근처에 흉폐된 신덕왕후 무덤 근처에 흥천사 5층 사리탑을 이재하다. 1747년(영조23)에 흥천사의 대종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던 것을 후에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 놓았다. 1846년 계장화상이 칠성각을 창건하다. 1865년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주호에 의하여 대방과 찰사를 재건 대찰의 면모를 갖추고 본명을 복활하다. 1934년 독성각을 시시시 원명화상이 재건하다. 1942년 종각을 주지 운월화상시 화옹스님이 중건하다. 1969년 용화전을 주지 일우화상시 화주 운파화상이 중건하다. 1970년 연화대를 일우화상시에 신축하다. <출처: 흥천사>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