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 절터 뒤편 언덕에 있는 무학대사탑(보물)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1327~1405년)의 승탑이다. 탑은 팔각형으로 된 석탑위에 세워져 있다. 탑은 8각형의 기단위 탑신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기단은 연꽃모양을 하고 있으며, 탑신 몸돌은 둥근 북모양을 하고 있는데 용과 구름이 입체감있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전형적인 승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승탑이다.
무학대사는 18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 불교를 배웠으며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에 만나 배웠으며,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였으며 태조와 함께 새도읍지로 한양을 정하는 큰 역할을 했다. 회암사 주지로 지내다가 금강산 금장암에서 입적하였다.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승려로 잘 알려져 있다.
<양주 회암사 절터 뒷편 언덕에 있는 무학대사탑(보물)>
고려말~조선초에 활동한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난간이 있는 팔각형 석단 위에 승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초 양식을 대표하는 승탑이다.
<탑신>
탑신 몸돌은 둥근 북모양을 하고 있으며, 겉면에 용과 구름을 생동감있게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붕돌과 머리장식은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전형적인 승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반대편에서 본 모습>
<무학대사탑 앞에 놓여진 상석>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쌍사자석등>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보물,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指空), 나옹(懶翁)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부도는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부도는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2016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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