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석기에서 신석기시대로, 2. 곡물재배, 3. 사냥과 고기잡이, 4. 토기와 신석기인 예술세계
신석기 시대(新石器時代, The Neolithic Age)는 인류가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한 시기를 말한다. 채집과 수렵생활을 하던 인류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의 온난화로 농업생산에 가능해졌기때문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대체로 기원전 9,600~9,500년전 중동지역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 유적으로는 집터와 무덤, 조개더미가 있으며, 큰 강 주변이나 해안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는 넓은 평야가 많지 않아 한반도 신석기인들은 농경을 주로 했다기 보다는 강가나 바닷가에서 고기잡이이와 사냥, 채집등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서는 2015년 겨울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전시에서는 빙하기가 끝난 이후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서 인류가 농경과 도구의 발명 등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의 구성은 빙하기 이후 환경변화를 보여주는 동물상과 식물상, 새로운 도구, 신석기인의 농경, 사냥 생활을 보여주는 각종 유물들과 정착생활을 결과임 무덤과 예술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신석기시대는 빙하기 이후 따뜻해진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구석기시대와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던 시대입니다. 이번 전시는 신석기인들이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서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생활하였는지를 고고학 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물과 유적, 관련 자료 등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습니다. 전시의 1부는 환경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동물상과 식물상, 그리고 새로운 도구들을 볼 수 있으며, 2부에서는 따뜻해진 환경으로 인해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바다 자원의 활용과 더불어 새로운 동물 사냥 방법, 곡물의 재배와 사육 등을 통해 신석기시대의 본격적인 생활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3부는 풍부해진 자원의 이용과 안정된 정착생활의 결과인 무덤과 예술품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격시맸던 환경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석기인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2015년 겨울 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전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 한반도의 신석기문화와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의 신석기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프롤로그, 따뜻한 시대의 시작
지구의 인류가 등장한 이래 가장 기온이 낮았더너 약 1만 8천년전을 기점으로 서서히 따뜻해졌다. 중위도 지방까지 덮여 있던 빙하가 점차 녹기 시작하면서 낮은 지대는 물에 잠기고 해수면은 높아져 1만년 전 무렵 한반도의 해안선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기후 변화로 초본식물과 양치식물의 비율이 높았던 식물상은 온대성 활엽수림인 참나무속으로 바뀌었고, 동물상도 추운 기후에 적합한 매머드나 털코뿔이 등 대형 포유류는 점차 사라지고 사슴, 멧돼지, 고라니와 같은 중소형 포유류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사람들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존의 도구를 개량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를 통해 식량의 획득과 저장, 조리와 섭취 방법을 발전시켜 자연에 순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연을 개척해 나가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신석기문화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반도의 신석기인.
따뜻함이 가져온 변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약 1만 년 전 빙하기 이후 등장한 신석기문화를 보여주는 우리나라의 유적은 한반도 남서쪽 끝에 위치한 제주도에서 많이 발견된다. 빙하기에 동북아시아 대륙의 끝에 연결되어 있던 제주도는 이 시기에 완전히 섬으로 분리된 상태였다. 고산리, 강정동, 김녕리 등 제주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는 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석기인 작은 돌날 몸돌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지표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토기, 화살촉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 고산리 유적에서는 유기물 흔적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토기와 함께 나무를 가공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인 간 돌도끼, 식물종자 등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로 만드는 갈돌과 갈판, 간석기를 제작하기 위한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 조합의 양상은 한반도의 구석기시대 후기 문화상과는 완전히 다르며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조사된 구석기시대 최말기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되는 시기의 유물상과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출처: 중앙박물관>사라진 동물
한반도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면서 많은 동물들이 번성하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비교적 온난했던 홍적세 중기(약 70만년 ~12만 5천년 전)의 동물로는 사슴, 사향노루, 쌍코뿔이, 불곰,동굴곰, 하이에나, 사자, 호랑이, 늑대, 너구리,족제비, 오소리 등이 있다. 이 중 쌍코뿔이, 동굴곰, 하이에나, 사자 등은 현재 한반도에서 볼 수 없는 동물이다. 홍적세 후기(12만 5천년 ~1만 2천년 전)의 동물로는 사슴, 노루, 사향노루, 산양, 멧돼지, 털코뿔이, 매머드,불곰, 동굴곰, 시베리아족제비, 북쪽오소리, 호랑이, 늑대, 너구리 등이 있다. 이전 시기의 쌍코뿔이와 하이에나 등이 사라지고 매머드, 털코뿔이, 시베리아족제비, 북쪽오소리 등이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홍적세 후기에 기후가 한랭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매머드 이빨조각, 전북부안, 구석기시대.
빙하기 이전까지 유라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 초원지대에 살았던 코끼리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 포유류인 매머드의 흔적이다.
매머드
매머드는 신생대 홍적세에 유럽, 북아시아, 북아메리카의 초원지대에 살았던 대표적인 화석동물로 코끼리와 함께 포유류 장비목(長鼻目)에 속한다. 매머드의 평균 수명은 60세 정도이과, 골격은 250개 정도의 뼈로 이루어졌다. 무게는 약 4~6톤으로 거대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온종일 먹어야 했다. 주로 들이나 산에서 자라는 키 작고 뿌리가 붙은 상태로 무리 지어 있는 풀과 나뭇가지, 나무껍질, 쑥, 데이지, 민들레, 미나리, 머위, 이끼, 낙엽 등을 먹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매머드 아래턱뼈, 러시아, 구석기시대
매머드는 아래턱 양쪽과 위턱 양쪽에 모두 4개의 커다란 어금니가 있다. 표면에는 빨래판처럼 생긴 에나멜 주름층이 있어 아래턱을 앞뒤로 움직이면 상하의 어금니가 교차하면서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삼키기 좋게 부드러워진다. 어금니가 다 닳으면 다른 어금니로 교체되는데, 생후 6개월, 4년, 10년, 20년,35년에 하나씩 교체되어 평생 여섯 개의 어금니를 사용한다. 마지막 어금니가 다 닳아서 빠지면 매머드는 제대로 먹을 수 없어 죽게 되기 때문에 매머드에게 어금니는 생명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매머드 상아, 러시아, 구석기시대
다 자란 매머드의 상아 무게는 45~80kg, 길이 2.5~4m에 이른다. 수컷 매머드의 상아가 크고 무거우며 더 많이 구부러져 있다. 매머드의 상아는 평생동안 자라는데 1년에 15cm 이상 자랄 때도 있다. 상아에는 나무처럼 나이테가 있어 이를 근거로 매머드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매머드는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상아를 사용했기 때문에 닳은 부분의 위치를 보면 오른쪽 것인지 왼쪽 것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쌍코뿔이 볼기뼈, 구석기시대
쌍코뿔이 어깨뼈, 청원 두루봉 동굴, 구석기시대
쌍코뿔이 아래턱뼈(복제), 구석기시대
동굴곰 머리뼈(복제), 구석기시대
하에에나 노뼈, 머리뼈, 제천 점말동굴, 구석기시대.
빙하기 이전 비교적 온난했던 구석기시대 사자와 함께 한반도에 살았던 하이에나의 흔적이다.
불곰 위턱벼, 아래턱뼈, 제천 점말동굴, 구석기시대, 코뿔소 이빨, 단양 구낭굴, 구석기시대
번성한 동물
충적세(1만2천년~현재)에 들어서면서 사슴, 고라니, 물소, 소, 멧돼지, 불곰, 오소리, 수달, 호랑이, 개, 여우, 늑대 등이 확인된다. 홍적세 후기와 비교하였을 때 충적세 동물상의 가장 큰 특징은 매머드와 털코뿔이 등 추운 기후에 적합한 대형 동물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는 기후 온난화에 따른 결과이다. 동물들은 주로 중소형 크기로 대부분 온대성의 숲에 사는 것들이다. 물소가 하동 목도 조개무지와 풍남 온천 궁산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어 당시 기후가 현재보다 오히려 높았음을 보여준다. <출처: 중앙박물관>
물소뼈, 하동 목도,
물소뼈, 창녕 비봉리,
물소뼈, 3. 영월 연당 쌍굴
산양 아래턱뼈, 발뼈, 발꿈치뼈, 평창 기화리, 구석기시대
개뼈 1. 여수 안도, 2. 부산 동삼동, 3. 통영 상노대도, 4. 영월 연당 쌍굴
매머드, 쌍코뿔이나 동굴곰 등의 구석기시대의 대형 포유류들은 신석기시대의 따뜻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를 대신한 것이 작고 빠른 동물들인데 한반도 신석기시대에 발견되는 대표적인 동물로는 사슴, 돼지, 물소, 개 등이 있다. 이런 작고 빠른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신석기인은 창보다 훨씬 멀리 날아갈 수 있는 활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반도의 신석기인
구석기시대부터 시베리아와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따뜻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신석기인이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신석기시대 사람뼈의 형태적 특징,시베리아 지역 신석기 문화와의 연관성, 유전자 관련 연구 등에 의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한반도 신석기인의 등장을 동남아시아 등 남방 지역 인구 집단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사람 뼈에서는 심해 잠수 어업에 의해 발생하는 외이도 골종, 식생활 환경을 반영하는 에나멜형성 부전증 등 신석기인의 삶의 흔적이 관찰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머리뼈, 여수 안도
안도 사람(추정복원)
안도사람은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에 있는 안도 유적 1호 무덤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초기의 남자 머리뼈를 기초로 추정, 복원한 신석기시대 사람이다. 1호무덤은 세로 250cm, 가로 160cm, 깊이 20c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안치한 뒤 조개껍질이 섞인 흙으로 덮여 있었다. 남자의 왼쪽 팔뼈가 여자의 오른쪽 팔뼈 아래에 놓여 있어 남자의 시신을 먼저 안치하고 나중에 여자의 시신을 넣어 묻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묻은 시간차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두 사람은 부부 등의 친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구석기 전통이 남아 있는 도구
구석기시대에는 직접떼기, 간접뗴기, 눌러뗴기 등 돌을 깨서 석기를 만들었다. 구석시대 후기부터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형태와 기능이 다양한 작은 석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작은 돌날은 작은 몸돌을 한 방향으로 여러 번 깨서 돌날을 얻는 것인데. 이렇게 얻은 돌날로 돌화살촉의 제작이 가능하다. 신석시대인 제주 도련동 유적에서는 토기와 함께 작은 돌날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제주 고산리 유적 등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초기의 돌화살촉 중에서 돌을 깨서 만든 것이 많다. <출처: 중앙박물관>
작은 돌날 몸돌, 제주 도련동
구석기시대의 후기부터 발달한 석기 제작기술은 신석기시대가 되면 더욱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어 다양한 석기들을 만들어냈다. 이 중 작은 돌날은 작은 돌날 몸돌에서 돌날을 떼어내는 방법으로 만든 격지석기이다. 몸돌을 한 방향으로 여러 번 타격하여 돌날을 얻어내기 때문에 돌날은 능선이 규칙적이고 나란하게 나타난다. 작은 돌날 도구들은 크기가 작아 손에 직접 쥐고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무나 뼈 드으이 자루에 끼워 사용하는 끼움식 석기로 이용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돌날, 1. 제주 도련동, 2. 제주 오등동
격지, 1. 서귀포 강정동, 2. 제주 도련동
뗀 화살촉, 1. 청주 사천동, 2. 동해 기곡, 3. 곡성 오지리, 4. 광주 연제동,
뗀 화살촉, 5.포천 화대리, 6. 제주 고산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이전보다 더 멀거나 높이 있는 작고 빠른 동물들도 비교적 손쉽게 잡는 등 사냥의 효율을 높였다. 이른 시기의 화살촉은 주로 돌을 깨서 만든 뗀 화살촉이지만 점차 돌을 갈아 만든 간 돌화살촉으로 변해갔다.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뗀 돌화살촉들은 눌러뗴기 수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두 차례에 걸친 조정 작업을 통해 완성하였다. 뗀석기이지만 그 형태는 구석기보다 한층 더 발전한 것으로 신석기시대의 도구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새롭게 등장한 도구
지구온난화라는 변화 속에서 신석기인은 새로운 도구를 개발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새로운 도구는 대개 식량자원의 획득과 섭취라는 목적으로 기술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롭게 발명하기도 하였다. 중소형 포유류처럼 작고 날쌘 동물을 잡기 위한 활과 화살, 풍부해진 어패류를 잡기 위한 낚시와 작살 그리고 그물, 견과류와 재배한 곡물을 갈기 위한 갈판과 갈돌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식량자원을 효율적으로 조리하기 위해 토기를 발명하여 널리 이용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간 돌화살촉, 1. 강릉 주문진, 2. 양양 지경리, 3. 강릉 하사동, 4. 김포 운양동, 5. 연천 학곡리, 6. 용인 농서리.
숫돌, 돌자기, 1. 서귀포 강정동, 2. 제주 오등동, 3. 제주 고산리, 4. 통영 연대도, 돌자귀, 5. 창녕 비봉리
갈판과 갈돌, 1.제주 고산리, 2. 서귀포 강정동
갈판과 갈돌은 재배한 곡물이나 도토리 드으이 열매 껍질을 벗기거나 가는데 쓰였던 식량 가공구이다. 식량 가공구가 널리 사용된 이유는 기온 상승으로 인한 식생의 변화와 함께 토기의 발명으로 먹거리의 종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갈판과 갈돌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양손으로 갈돌을 잡고 앞뒤로 밀어서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갈돌을 한손에 쥐고 찧거나 돌려서 사용하는 것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고산리식 토기, 1. 제주 고산리,
고산리식 토기, 2. 제주 오등동,
고산리식 토기, 3. 제주 도련동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인간이 물질의 화학적 변화를 이용한 최초의 발명품이다. 토기를 만들어 음식물의 조리와 저장에 이용하면서 더욱 많은 종류의 열매와 동식물의 섭취가 가능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고산리식 토기이다. 약 만년 전에 등장한 고산리식 토기는 유기물을 섞어 바탕흙을 개었는데,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유기물은 타 버리고 그 흔적이 표면에 남아 있는 토기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간 돌도끼, 1. 서귀포 강정동, 2. 제주 도련동,
간 돌도끼, 3. 제주 고산리, 4. 제주 오등동,
간 돌도끼, 5. 창녕 비봉리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