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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조선왕실과 백자

1. 조선왕실과 백자, 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 3. 지방의 백자, 4. 문인문화의 유행, 5. 백자의 제작, 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 7. 문양이 된 문자, 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백자는 분청사기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순수와 절제가 돋보이는 백자는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시대 지배층인 사대부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졌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취향의 백자와 서민 취향의 분청사기가 같이 만들어졌으나, 조선중기 이후 관요가 설치되면서 백자를 주로 백자를 만들게 되었다. 관요는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에서 관장했는데 조선중기에 경기도 광주 분원이 설치되면서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 수준높은 백자를 안정적으로 왕실과 지배층에 공븝하였다. 구한말에 상인들이 분원 관요의 운영에 관여하게 되면서 백자의 질은 급속히 떨어지면서 그 역할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화여대박물관에서는 박물관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백자’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박물관에서 소장중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를 비롯하여 600여점의 다양한 조선백자가 전시되었다. 전시의 구성은 왕실과 관련된 관요의 백자 제작, 백자와 문인문화, 백자에 표현된 다양한 문양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자 청화운룡문 항아리, 조선 18세기 후반, 고려대박물관.

청화기법을 사용하여 만든 큰 항아리이다. 표현에 국왕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어 궁중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요에서 제작하여 납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실과 백자
우리나라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부터로 이미 10세기경부터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자기 가마에서 청자와 함께 백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인 틀이 갖추어지고 생산품이 규범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조선 왕실이 경기도 광주군에 사옹원(司饔院) 산하의 ‘분원(分院)’ 도자기 제작소를 설치하는 15세기 후반부터이다. 왕의 일상식과 궁중연향, 사신접대 등 격식과 절차가 수반되는 음식관련 업무가 사옹원 소관이었으므로 분원은 15세기 이래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백자 제작을 주도하였다. 유교적 예제의 실천과 위계적 질서가 근간이었던 조선왕실은 오례(五禮)로 체계화된 의례의 준행에 많은 기물(器物)들이 필요했다. 의례용 기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명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기에 법식에 맞추어진 공예품을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은 왕대비나 임금의 환갑 등에서 백자나 의장물을 법도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효를 다하고자 하였으며 백자 항아리에 술을 담고 꽃을 꽂아 만민화친(萬民和親)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특별한 왕실 행사에 소용되던 백자에 대해서는 여러 의궤류의 기록이나 도설(圖說) 등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필요했더너 백자의 수량과 종류, 조달방법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 보물, 조선 17세기.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백자항아리이다. 항아리 표면에 구름과 용이 그려져 있어 궁중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화 기법을 사용한 초기 작품이다.

조선전기 관요백자

관요(官窯)는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만들던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설치.운영되었다. 고려초기에는 서해안 지역에 청자요지가 형성되었으며 중기부터는 강진과 부안의 관요에서 수준높은 고려청자를 제작.납품하였다. 조선초에는 전국에 136개의 가마에서 도자리를 만들었으며, 조선중기 이후 사옹원에서 직접 운영.관리하는 분원이 경기도 광주 일대에 설치되었다.

백자호, 조선 15세기

백자청화 천마문 호 뚜껑편, 조선 15세기 후반, 16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 변천리 9호 백자요지 출토. 백자청화 운룡문 호 뚜껑편, 조선 15세기 후반 ~16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 우산리 9호 백자요지 출토.

백화청자 매화문 소호, 조선 16세기

백자 유개호, 조선 15세기


백자병(조선 16세기), 백자발(조선 16세기), 백자접시, 조선 16세기


백자 편병, 조선 16세기


백자 화형 잔, 조선 16세기

백자 호, 조선 16세기

연향의 격식을 완성하는 용준(龍樽)
조선시대 궁중 연향은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거행되어 효와 예를 보이는 자리였다. 연향에 사용된 기물은 다양하지만, 특히 ‘용준’은 술을 담거나 쌀을 채우고 비단 등으로 만든 꽃을 꽂아 장식하는 용도로 필수적인 기물이었다. 용준은 기본적으로 청화백자로 제작되었고 문양 구성에 대해 정해진 형식을 따랐지만, 용의 생김새나 부속 문양의 배치 등에는 세부적으로 변화가 보이며 부득이하게 안료 자체가 달라진 경우도 있었다. 특히 17세기 전반에는 거듭된 전란으로 물력과 청화 안료가 부족하여 부득이 청화백자 용준을 대신할 방책들이 모색되면서 ‘석간주’로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 용준이 제작, 사용되기에 이른다. 청화백자의 제작이 다시 활발해지는 조선 후기에는 원래대로 청화백자로 제작되어, 본래의 격식을 갖추고자 노력했지만, 19세기 후반이 되면 중국산 청화백자로 추정되는 ‘당화준(唐畵樽)’이 궁중 연향에 사용되는 등 점차 용준의 제작과 수요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용준 제작과 사용을 위한 지침을 기록한 문서

백자호, 조선 18세기 전반

백자 원호(圓壺), 달항아리

백자 호, 조선 18세기 전반, 창덕궁 선원전 출토.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둥근 모양의 호(壺). 궁중에 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달항아리’로도 불리는 대형의 백자 원호는 크고 둥근 몸체와 구연과 굽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 주로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되었다. 대형의 원호는 형태를 한 번에 만들기 어려워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접합하므로, 안쪽 면에 이어붙인 자국이 보이며 몸체 중간 부분에 가로로 줄이 생기듯 균열이 생기거나 틈이 벌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원호는 창덕궁 선원전에서 출토된 예가 이어 왕의 어진을 봉안하고 생신에 다례를 거행했던 선원전의 기능으로부터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호, 조선 18세기 전반

백자호, 조선 18세기 전반

조선후기 왕실 명문백자

백자청화 수자문(壽字紋) 접시, 조선 19세기.

정유년(1837년) 8워에 순조의 삼녀 덕온공주의 집인 저동궁(苧洞宮)에서 길례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접시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복자문(壽福字紋) 화형 발, 조선 19세기,

명문으로 보아 정유년인 1837년 헌종과 효현왕후의 가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화접문(花蝶紋) 합.모란문(牡丹紋) 호,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국화문(菊花紋) 병, 조선 19세기,

저동궁(苧洞宮)의 지밀고간(至密庫幹)에서 사용된 청화백자 병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복자문(壽福字紋) 발.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자문(壽字紋) 접시, 조선 19세기,

신해년(1851)에 대전 곳간에 같은 모양의 접시가 대.중.소 3종으로 2,000점에 달할 만큼 많은 수량이 납입되었다는 내용이 있어 궁중의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1851년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왕비책봉 의식이 있었던 사실이 주목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자문(壽字紋)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모란문 발, 조선 19세기,

고종 4년(1867) 11월 중건된 경복궁 내의 제수각 곳간에서 신미년(1871)에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 발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불수감문(佛手柑文) 발, 조선 19세기 중반,

신미년(1871)과 가까운 시기의 임자년인 1852년 대전 곳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접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초화문(草花紋) 접시, 조선 19세기,

‘大’는 대전(大殿), ‘進’은 진상품을, ‘別進’은 벌번조품을 의미하며 ‘大進’명은 어용품을 표기한 것으로 왕실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차청화 ‘운현(雲峴)’명 접시,

조선 19세기 후반, ‘운현’ 명문이 있는 그릇은 1863년 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으므로 1864년 이후 제작되어 운현궁에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차청화 ‘운현(雲峴)’명 발, 조선 19세기 후반,

백자창화 수복자.국화문 반상기, 조선 19세기

반상기는 조선후기 다채로워진 음식문화의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식기 조합이다. 고종 31년(1894)의 『분원자기공소절목』 중 「내출별번기명공가」에서는 분원에서 왕실로 납품한 반상기의 가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반상기 중 양각으로 장식하고 뚜껑을 갖춘 칠첩반상기를 13냥, 청화로 장식하고 뚜껑을 갖춘 칠첩반상기를 11냥 5전, 무늬가 없고 뚜껑을 갖춘 칠첩반상기를 10냥으로 표시하여 실제로 조선후기에 다양한 종류의 반상기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말기 사기계 공인이 쓴 『하재일기』에도 반상기에 대한 기록이 다수 등장한 점으로 보아 조선후기 고급 식기로 유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백자청화 국화문 반상기는 조선후기 반상기형에 같은 문양의 병과 주자까지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굽이 있는 접시, 고족접시

<기사계첩> 일부분, 조선 1720년, 비단에 채색, 보물

굽이 높아진 백자접시, 고족접시는 제례뿐만 아니라 사연(賜宴)과 연향(宴饗) 등 궁중 잔치에서도 사용되었다. <기사계첩>의 ‘기사사연도’ 장면에는 왕이 베푸는 궁중잔치에 낮은 흑칠원반에 꽃과 고배 음식을 담은 고족접시의 상차림이 차려져 있는데, 이는 단순한 음식상의 의미를 넘어 왕이 백성과 신하, 빈객에게 내리는 음식으로 ‘예’를 치르고 공경의 의미를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와 양반층의 증가에 따라 제례가 증가하면서 고족접시의 사용도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상공업, 유통, 교통의 발달로 19세기말 20~세기 초에는 일반 계층으로 확산되어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나 <평생도>처럼 민간의 혼례나 잔치에서도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 고족접시, 조선 19세기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