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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고려, 조선시대 불상 (2016년)

1. 삼국시대 불상2. 반가사유상3. 통일신라 불상4. 고려, 조선시대5, 석조불상, 철조불상

고려와 조선의 불교미술은 화려한 통일신라 불교미술에 비해 그 표현 방식의 섬세함이나 예술적 완성도에서는 크게 뒤떨어져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의 생동감 넘치는 투박하고 거대한 석불들과 철불상들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완성도 높은 석탑의 제작은 크게 줄어들고, 고승의 사리를 모시는 승탑이 고려초기에 만들어 졌다. 고려중기 원나라 침입이후에는 티벳과 몽골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경천사지석탑 등과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는 유교국가로 불교미술은 발전하지 못하고 서민적의 느낌을 주는 불상 등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불상

고려 불상은 통일신라에 비해 세부 표현이나 조각수법, 조형미 등이 크게 떨어져 현재 기준으로도 완성도 높은 불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반면 지방호족의 힘을 과시하거나 민간의 바램을 표현하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석불이나 파주 용미리 석불 등 거대하고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몽골의 침입이후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교풍의 불상이나 도교의 영향이 받은 경천사지 석탑같은 불교미술 작품들을 남겨 놓고 있다.

고려시대 불상은 신체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통일신라 불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불교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을 이어 돌이나 철로된 항마지촉 불상(降魔觸地印,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과 비로자나불상을 주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키가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석불도 많이 만들었다. 고려 후기에는 고려전기보다 세련되고 온화한 모습의 불상이 유행하였다. 또한 중국 원나라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국적인 불상도 함께 만들어져 일시나마 유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아미타여래삼존불상.

가운데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양쪽에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협시보살로 배치되어 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고려


금동대세지보살입상, 고려.

웅장한 면은 있으나 세부적이 묘사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많이 떨어진다.


금동관음보살입상, 고려


보살,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고려 14세기.

라마교 불상의 특징이 반영된 고려후기 불상이다.

고려 불상의 전통적인 요소와 티베트-몽골불상의 이국적 요소가 조화를 이룬 고려후기 보살상이다. 긴 눈매에 살며시 다문 입술, 단순한 목걸이나 보살상의 자세 등은 전통적인 요소인 반면, 연꽃잎이 위아래로 맞닿은 타원형 대좌, 커다란 원형 귀걸이, 팔에 감긴 천의 형태 등은 새롭게 등장한 형식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보살,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고려 14세기

부처, 금동불좌상, 고려 14세기


탄생불, 금동탄생불(金銅誕生佛), 인천 강화 발견, 고려 후기

석가모니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한 장면을 표현한 불상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연화대좌 위에 올라서 있으며, 가늘고 긴 신체가 특징인 고려시대 탄생불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와 보살, 금동불좌상.금동보살입상, 고려 14세기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 금동불감(金銅佛龕), 고려 14세기

불감(佛龕)은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으로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석탑 안에 봉안되었다. 목조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감의 문 안쪽에는 역사(力士)를 조각했고 안쪽 벽에는 부처와 보살을 표현하였다. 불감 바깥에는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사천왕과 팔부중(八部衆)을 각각 양옆과 뒷면에 새겼다. <출처: 중앙박물관>

관음보살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준말로,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한다. 관음신앙의 기본 경전인 <법화경>에 의하면, ‘관세음’이란 중생의 고통 소리를 듣고 구원한다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관음보살은 세상 모든 중생의 바람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고 정병을 든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 통일신라 중엽에는 밀교의 영향을 받은 십일변관음상도 조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석굴암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원나라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동관음보살좌상, 고려 14세기.

라마교 불상의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섬세하면서 세부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황동불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갸름한 얼굴에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힌 신체 등에서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이 엿보인다. 가부좌한 자세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뒤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 윤왕좌의 앉음새를 취하고 있다. 윤왕좌는 원래 인도 신화에서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 취하는 자세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관음보살, 금동관음보살좌상, 고려 14세기

보관에 화불(化佛, 중생 구제를 위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부처)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보살상임에도 아미타불의 손갖춤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아미타불상의 협시인 관음보살상 역시 아미타불이 맺는 구품인을 맺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불상

조선시대 불교는 고려와는 달리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조선초 개혁정책으로 사찰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토지와 노비들을 많이 잃었다. 조선중기까지 많은 사찰들이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폐사하게 되었으며 큰 불사를 일으키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명종때 문정왕후가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그 인력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활약함으로써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큰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다만, 대웅전같은 불전 건축 위주였기때문에 인상적인 불상을 제작하지는 못하고, 개인적으로 시주해서 만든 작은 불상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기때문에,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주도의 불교 문화는 융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1천년 넘게 우리 민족의 생활 깊숙이 파고든 역사를 바탕으로 그 전통을 면면이 이어왔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나 세조와 같은 군왕을 비롯한 왕실의 후원아래 수준 높은 불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큰 활약을 함에 따라, 전란 이후에는 전쟁에서 훼손된 많은 절과 불상을 새로 짓고 만들었다. 지방에 있던 승려 장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기 불상은 대부분 조선 초기에 비해 형태가 단순하고 세부묘사가 적은 소박한 모습을 띤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덕십년」이 새겨진 지장보살, 「正德十年」銘石造地藏菩薩坐像, 보물, 조선 1515년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위하여 깨달음을 미룬 보살이다. 다른 보살상과는 달리 민머리의 스님모습이거나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다. 바위모양 대좌 뒤의 명문을 통해 정덕 10년 3월에 김순손 부부 등의 시주로 절학을 비롯한 승려가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삼세불, 금동 삼세불 좌상, 고려말~조선초 14~15세기

삼세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로 이루어진 삼존상을 말한다. 보통은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로 구성되는데 이 불상과 같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위.아래 연꽃이 서로 붙어 있는 대좌와 머리 중앙에 뽀족하게 솟아 오른 계주에서 고려말에 유행했던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이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음보살, 은제도금관음보살좌상, 조선 15세기


아미타불, 은제도금아미타불좌상, 조선 15세기

부처와 보살, 금동불좌상.금동보살좌상, 경기 남양주 수종사 오층석탑 출토, 조선 1628년

부처와 보살, 금동불좌상.금동보살좌상, 경기 남양주 수종사 오층석탑 출토, 조선 1628년

1957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수종사 오층석탑에서 30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인조 6년(1628) 정의대왕대비가 발원하고 승려 성인이 제작한 불보살상 23구가 포함되어 있다. 인목대비로 잘 알려진 정의대왕대비는 선조의 계비였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폐서인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후에도 자주 불사를 행하였는데, 수종사 불상에는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인목대비의 염원이 담겨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관음보살,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1763년

발원문에 따르면 1763년 안양암에서 만든 두 점의 관음보살상 중 한 점이다.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위해 비구 양제, 이복경 등이 시주하였으며 제작을 담당한 수조각승은 취겸이다. 조각승들은 주로 금강산 등 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들로 추정된다. 관음보살상은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라 복장물과 함께 일본에서 반환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관음보살, 석조관음보살좌상, 조선전기

보살, 석조보살좌상, 조선전기

동그란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 그리고 얼굴 크기에 비해 짧은 신체가 특징인 조선시대 보살상이다. 신체는 돌로 조각하고 금을 입혔으며,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보관은 금속으로 만들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선정 자세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