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금제여래좌상(국보)이다. 경주 구황동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사리함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통일신라 성덕왕 때(706년)에 순금으로 만든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사리함에 적혀있어 그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배, 불신, 대좌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눈.코.입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석굴암 본존불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불꽃무늬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는 엎어 놓언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는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대표하는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통일신라만의 고유한 양식이 많이 형성되었다. 통일신라 불상이나 석탑을 보면 고려시대에 비해서 조형미나 조각수법, 예술적인 표현 등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고구려 불상에서 보여주었던 생동감 넘치고, 힘있는 모습은 다소 줄어들고 후대에 들어서는 정형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국보, 경주 구황동 황복사터 삼층석탑 출토, 706년.>
얇은 옷주름이 강조된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706년에 석탑 사리함에 봉인한 아미타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옆에서 본 모습>
광배에는 인동초, 당초무늬, 덩쿨무늬, 연꽃무늬 등 다양한 무늬를 새겨 놓고 있으며,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뒤에서 본 모습>
옷자락과 대좌의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 입체적이다.
<연꽃을 엎어 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 대좌>
황복사(皇福寺)로 전해오는 절터의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사리함 뚜껑에 새긴 글에 따르면 신문왕(神文王)이 세상을 떠나자 692년 아들인 효소왕(孝昭王)이 어머니 신목태후와 함께 석탑을 세웠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聖德王)이 금제 아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에 안치하였다. 불입상은 얼굴 이목구비의 경계와 윤곽이 부드럽고, 두툼한 옷주름에 가려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 등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 남아 있어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얇은 옷주름으로 강조된 불좌상의 풍만한 신체는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706년에 봉인한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불상이 발견된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뚜껑>
성덕왕이 부왕인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 2구를 비롯하여 사리 등을 넣었다는 조성내력을기록해 두고 있다.
<사리함에서 같이 발견된 금제 여래입상(국보)과 여래좌상(국보)>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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