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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국실] 중국회화

1. 예기(禮器), 2. 명기와 도용, 3. 신선사상과 도교, 4. 불비상과 불상, 5. 도자기, 6. 중국회화

중국 회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전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비단그림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후한대(後漢)에는 한대화상석(漢代畵像石)이라불리는 신화나 전설을 주제로한 그림들이 돌방무덤 벽면이나 기둥 등에 그려지면서 중국 미술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이후 불교 석굴사원의 벽화를 그리는 전통이 수.당시대까지 이어진다. 중국회와에서는 처음에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당대후기부터 자연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실제 중국회화는 송대초기에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는 수준높은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북송후기에는 화면을 단순화하여 느낌을 묘사하는 중국회화의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명.청대에는 송대의 회화전통을 계승한 화풍이 황실과 민간에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원대의 문인화를 계승한 화풍 또한 성행하였다.

꽃과 새(花鳥圖, 작가모름, 명) 중 두마리의 새가 마주보고 있는 부분.

화려한 색감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선의 예술, 중국회화
중국 회화는 한대(漢代)부터 명.청대(明.淸代)까지 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하였다. 한대의 인물화를 시작으로 당대 후기부터는 점차 자연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송대 초기 비로소 수준 높은 작품이 그려지는데 이 시기의 산수화는 마치 그 장소에 잇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후 북송 후기에는 불필요한 요소를 안개로 표현하여 화면을 단순화하였다. 명.청대는 이전 시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다양한 화파와 화법이 출현한다. 산수화는 명대초기에 송대회화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절파(浙派)가 황실과 민간에서 주류를 이루며 활동하였으나 중기 이후에는 원대 문인화를 계승한 오파(吳派)가 장쑤(江蘇)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꽃과 새 등을 그린 화조화는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리는 공필채색화(工筆彩色畵)와 간략하고 거칠게그리는 수묵사의화(水墨寫意畵)가 모두 유행하였다. 인물화는 도교, 불교와 관련된 주제를 반영한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많이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꽃과 새, 花鳥圖, 작가모름, 명

비단 위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려진 화조도로서, 장황은 일본식으로 개장되었으나 화폭 자체는 원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화면에 다정하게 짝을 이룬 닭과 참새, 팔가조(八哥鳥)는 화창한 봄 기운과 함께 부부의 금실을 의미한다. 팔가조는 늙은 어미를 봉양하는 새라고하여 효도를 상징하는데, 모란과 함께 등장하여 귀한 집에 효자가 난다는 주제를 보여준다. 공필(工筆)의 구륵채색법과 조방한 수묵몰골법의 절묘한 결합, 화려하면서도 근엄함을 잃지 않는 귀족적 아취 및 여백이 주는 시적인 정취 등에서 명대 원체(院體) 화조화풍의 그림임을 알 수 있으며 당대 최고 수준의 화격이 느껴진다. <출처: 중앙박물관>


꽃과 새, 花鳥圖, 여기 呂紀(15세기 초 ~1505년경), 명, 견본채색

사실적이며 세밀한 표현이 돋보인다.

여기는 명대 중기의 화조화가로 자가 정진, 호가 낙우.낙어이며, 저장성 닝보(寧波) 출신이다. 홍치 연간(1488~1505년)에 대표적인 궁정 화조화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짙은 채색을 사용하여 공필(工筆)로 섬세하게 그리거나 수묵의 활달한 필치로 윤곽선 없이 수묵으로만 그리는 화풍을 동시에 구사하였다. 이 그림은 설경을 배경으로 한 쌍의 꿩과 대나무, 매화, 동백을 공필로 그려 채색하였다. 꿩은 오덕(五德, 文武勇仁信)을 갖춘 고결한 문인을 상징하며 대나무, 매화, 동백은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의미가 담겨져 있어 이러한 주제의 그림들이 당시 문인관료들의 사회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고양이와 장미, 심전(1682~1762년 이후), 청 1733년, 견본채색(絹本彩色)

심전은 청대(淸) 저정성 더칭(德淸) 출신의 화조화가로, 자는 형지, 호는 남빈이다. 이 그름은 관지(款識)를 통해볼 때, 심전이 1733년 8월 나가사키의 관사에서 그린 것이다. 심전의 화조화는 대부분 길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그림에 묘사된 괴석(怪石)과 장미 그리고 고양이도 모두 장수를 축원하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괴석은 발묵(潑墨)으로 표현하였으며 장미는 분홍색 꽃과 짙은 녹색 잎을 대비시켜 표현하였다. 바닥의 수풀은 가벼운 필치로 그려진 반면 고양이는 매우 꼼꼼한 필치로 털의 부드러운 질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청정호접도, 蜻蜓胡蝶圖, 제백석(1863~1957년), 1934년

제백석은 호남성 상담현 출신으로 이름이 황, 자는 위청인데 백석이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은 가난하여 가구점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40세에 전국을 여행하기 시작하여 57세 전후에 북경에 정주하고 그림에 전념했다. 서위(1521~1593년), 팔대산인(1624~1703년), 석도(1642~1707년)를 비롯, 양주팔괴로부터 조지겸(1829~1884년), 오창석(1884~1927년)에 이르는 명.청대의 개성파 화가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전각에도 솜씨가 있었다. 간결하고 힘찬 붓을 휘둘러 초화, 벌레, 새우 따위를 애정과 유머가 넘치는 화풍으로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73세인 1934년에 그린 것인데, 안례홍에 날아드는 듯한 잠자리와 나비가 표현되어 있다. 안례홍은 간략하고 빠른 필치로 나타낸 반면 잠자리와 나비는 매우 섬세하고 꼼꼼하게 묘사하여 색채와 함께 대조를 이룬다. 제백석의 뛰어난 사생력과 활달한 필치의 조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홍하도, 紅荷圖, 장대천(1899~1983년), 1944년

장대천은 중국 사천성 내강(內江) 출신으로 본명은 정권, 호는 대풍당이다. 돈황(敦煌)의 벽화를 모사하고, 명산대천을 사생하면서 개성이 풍부한 발묵(潑墨)과 발색(發色)의 경지를 이루었다. 1947년 홍콩, 1949년 대만, 1950년 인도를 비롯하여 아르헨티나.브라질 등지에서 살았으며 파리와 뉴욕을 비롯하여 태국.독일 등 세계 여러나라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 피카소에게 동양회화를 가르치는 등 세계유명 작가들과 교유하면서 작품세계를 넓혔다. 이 작품은 1944년 친구이자 연극인인 주기하를 위해 그려준 것이다. 특유의 발묵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 연잎과 한 송이의 붉은 꽃봉오리가 대비되어 신선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난초와 대나무,蘭竹圖, 공육기(1657~1723년), 청, 견본수묵(絹本水墨)

공육기는 산동성 취푸(曲阜) 출신으로 자는 종재 또는 익산, 호가 난당이다. 공자의 67세손으로 연성공의 작위를 세습하였으나, 생애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묵란(墨蘭)에 조예가 깊어 필치가 굳세고 뛰어나며 조맹부의 필의(筆意)를 얻었다고 전한다. 이 그림에서는 두 개의 바위 사이에 난초와 그 오른쪽으로 댓잎을 그리고 엷은 먹으로 선염하여 땅과 잡풀을 묘사하였다. 난잎을 유려한 필치로 기렉 뺴는 표현 양식은 대개 명대(明) 이전의 묵란에서 많이 보이는 것으로 공육기가 난 그림의 전통적인 표현 양식에 숙달되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중앙박물관>


대나무, 墨竹圖, 진원소(17세기 활동), 명, 지본수묵(紙本水墨)

진원소는 장쑤성 쑤저우(蘇州) 출신의 선비화가이다. 1606년 향시(鄕試)에 떨어진 뒤 시서화에 전념하였다고 전한다. 그림은 산수도를 잘 그렸지만 특히 묵란에 뛰어나 사람들이 보배롭게 여겼다. 그의 묵란은 명대(明) 제 1인자라는 평을 들어ㅓㅆ는데, 이 무구죽도는 진원소가 묵란뿐만 아니라 묵죽에도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금전지(金箋紙)에 괴석과 묵죽을 그렸는데, 엷은 먹의 갈필(渴筆)로 성글게 크고 작은 괴석의 윤곽만을 그린 다음, 보다 짙은 먹으로 줄기가 가늘고 긴 대나무를 여리여리하게 그렸는데, 운치가 있으며 넉넉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출처: 중앙박물관>


냇가 정자의 선비, 溪亭高士圖, 맹영광(1590~1648년), 청, 견본채색(絹本彩色)

정자에 앉아 있는 선비의 모습.

맹영광은 청대(淸) 화원 화가로 저장성 후이치(會稽) 출신이다. 자는 월심, 호는 낙치생이다. 세필의 공필화와 호방한 필법의 철파풍의 작품을 남겼다. 1645년에 소현세자를 따라와 조선에 3년간 머무러며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그림은 정자의 한쪽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읽던 책을 펼쳐 놓은 채 앉아 밖을 내다보는 고사(高士)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위에 예서체의 제찬에서 이 그림이 맹영광이 도진루저(淘眞陋邸)에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선비의 풍모가 넘치는 고사의 인물이나 부드럽게 묘사된 옷자락, 그리고 화면 전체의 정교한 선묘와 화려한 채색, 높은 완성도에서 그의 공필화 취향을 볼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도원동천도, 桃源洞天圖, 傳 왕문(1497~1576년), 16세기

왕문(王問)은 강소성 무석(無錫) 출신으로 자는 자유, 호는 중산이다. 1532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벼슬은 광동안찰사 첨사까지 지낸 문인화가였다. 화품은 ‘남송(南宋)에 가까우며 오파(吳派)에 들지 않았다’는 평을 얻었다. 이 그림은 도연명(365~427년)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도화원기’는 동진의 태원 년간(376~395년)에 무릉(武陵, 지금의 湖南省 桃源縣)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복사꽃이 피어있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그 끝에 있는 동굴을 통해 별천지에 다녀왔다는 이야기이다. 도연명이 ‘도화원기’를 통해 도원을 형상화한 이후, 도원은 문인들의 이상향으로서 문학적 소재와 그림의 주제로 많이 다루어졌다. 그림의 아래에는 주인공인 어부가 배에서 내려 도원에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책을 읽거나 바둑을 두는 등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초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도 같은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난정회서도(왼쪽), 蘭亭會序圖, 작자미상, 16세기, 이홍근 기증

난정회서도(오른쪽), 蘭亭會序圖, 작자미상, 16세기, 이홍근 기증

이 그림은 중국의 동진 영화 9년(353)에 왕희지(王羲之, 307~365년)를 비롯하여 사안(320~385년) 등 명사 42인이 현재의 절강성 소흥(紹興)의 명승지인 회계산 북쪽의 난정(蘭亭)에 모여 수계(修禊)의식을 치르고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연회를 베풀었던 역사적 고사를 표현한 작품이다. 화면 왼쪽에 인장이 찍혀 있어 당인(1470~1524)의 그림으로 전해졌으나, 필체가 당인의 전형적인 서체와 다르며, 가정년간에는 신미년이 없는 모순때문에 후대에 가필된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곡수를 사이에 두고 문인들이 시를 짓는 모습을 그렸는데, 대나무 숲을 이파라 하나까지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당인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명대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와 화풍의 경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림이다. 화면 밖에 찍힌 “實事求是”, ‘小蓬萊學人”은 모두 김정희(1786~1856년)의 인장으로 당시에 이 그림이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추경산수도, 秋景山水圖, 傳 해강(1746~1803), 18세기

이 그림은 화제(畵題)에서 알 수 있듯 저녁 노을이 지는 호숫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늦가을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전체적으로 필치가 부드럽고 준법을 짧게 사용하여 맑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해강의 전칭작이지만 산수의 윤곽을 담묵의 점선으로 표현하는 해강화법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해강의 자는 철생, 호는 몽천도인이며, 대부분 여생을 항주에서 지내면서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글씨와 전각에도 뛰어났으며, 그림은 동기창(1555~1636년)의 영향을 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배잠기공비’를 옮겨 씀, 臨 裵岑紀功碑, 복삼(1827~?), 19세기 후반, 예서(禮書)

이 글씨는 중국 한대(漢) 비석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를 청대(淸)의 전각가(篆刻價) 복삼이 임서(臨書)한 작품으로 서체는 예서이다. 배잠기공비는 서한(西漢) 영화 2년(137)에 세워진 비로, 돈황(敦煌) 태수 배잠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을 담았다. 한대 비석의 초기 형식을 대표하는 이 비석은 청 옹정7년(1729) 신강에서 발견되었다. 배잠기공비는 한대 예서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일찍이 추사 김정희도 심도있게 연구한 바 있다. 배잠기공비의 비석 글씨를 임서한 복삼은 전각 및 서예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했으며, 정학교(1832~1914)와도 교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전각(篆刻)예술은 시서화와 함께 문인의 예술정신을 표현하는 대표 분야로 비문, 봉니(封泥), 와전(瓦塼) 등 고대 글씨의 옛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바탕이 되어야 이룰 수 있다. 이 임서본에서 보듯, 서예와 전각은 고대 금석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꾸준한 임서를 통해 필의를 이해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의영 필 해서 대련, 王懿榮 泌 楷書 對聯, 왕의영(1845~1900), 19세기 후반, 해서

이 글씨는 중국 청(淸)의 왕의영이 해서로 써내려간 작품으로, 단정하면서도 각이지고 날카로운 필획으로 구사하였다. 칠언(七言) 대구(對句)를 대련으로 구성한 왕의영의 해서 글씨풍은 초당대(初唐代) 서가들의 글씨 및 그 이전 시대의 비석연구를 바탕으로 이룬 것으로, 이 같은 서풍은 당시 청대 금석학자들의 글씨풍이기도 했다. 왕의영은 청대의 관료이자 금석학자로, 자는 정유, 호는 연생이다. 청왕조의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였던 그는 1899년 당시, 하남성 안양 소둔촌 땅에서 캐내어 약으로 썼던 ‘용골(龍骨)’이라 불리던 고대 동물뼝에 담긴 비밀을 밝혀내었다. 용골에 새겨진 것은 바로 고대문자, 갑골문이었다. 왕의영이 시초석이 되어, 이후 갑골문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가 계속되었고, 전설로만 여겼단 은(商) 왕조의 실체가 사실임이 규명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중국의 문방구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