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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 부여와 삼한의 철기문화

기원전.후의 시기에는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중계무역 등으로 번성하다, 한무제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이 시기 한반도 북부에는 부여와 고구려, 옥저.동예가,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 경재을 통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부여는 그 세력이 지금의 길림성 일대이지만, 부여에서 분화된 세력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지배계층이 되었기떄문에 한반도 고대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느슨한 연맹체 형태였으며 고구려에 예속된 상태였다.

부여와 옥저.동예는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이지만, 그 영역이 만주와 북한지역이기때문에 국내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최근에 김포 운양동 지역에서 부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김포 운양동(2012년 발굴), 1.칼,

2.창, 3.제비꼬리모양 창,

4.손칼, 농공구와 장신구, 6.낫, 7.끌, 8.도끼,

5.화살촉 9,귀걸이,

10.구슬

김포 운양동 유적
주구묘에서 금귀걸이와 쇠칼, 투겁창, 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부여의 대표적인 유적인 유수 노하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금귀걸이와 부여의 특징으로 알려진 제비꼬리 모양의 쇠 투겁창 등이 출토되어 부여가 남부지방에 끼쳤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항아리, 11,12,13. 함북 웅기 송평동(1929년 발굴)

갈색간토기, 14.함북 종성 지경동(1985년 입수), 항아리, 15.함북 종성 삼봉리(1948년 지표조사), 항아리, 16. 전 강원 강릉(2000년 입수)

부여(夫餘)
부여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5세기까지 존속하였던 고대국가이다. 영역은 중국 지린성 일대로 추정되는데 중심지는 주변 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왕은 중앙을 지배하고 지방은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관리들이 통치하였다. 농업과 목축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말과 구슬, 모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부여 왕실의 후손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지배 계층이 되었으므로 부여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여는 동이 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으로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에 알맞다…. 목책을 둥글게 쌓아 성을 만들고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 『후한서』 동이전 –

옥저.동예
옥저는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읍락의 군장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통일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고 고구려의 견제와 지배를 받으면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였다. 옥저의 무화는 두만강 일대의 단결-크로높카 문화로 추정된다. 동예는 한반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옥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로, 각 읍락들은 산과 물을 경계로 영역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노예나 동물로 변상하는 제도가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옥저는 토질이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음식.주거.의복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예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하고,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조선의 동쪽이 모두 예의 땅이라고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작은 고을들을 모두 나라로 일컬었다.  – 『삼국유사』 권1 칠십이국 –
진한은 동쪽에 있어 열두 개의 작은 고을을 나라로 일컬었다. – 『삼국유사』 권1 칠십이국 –
변한은 남쪽에 있어 열두 개의 작은 고을들을 각각 나라로 일컬었다. – 『삼국유사』 권1 칠십이국 –

이 시기에는 철기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쇠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으며,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국가의 지배질서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삼한의 철기는 초기에는 주조로 만든 호미, 괭이 등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철기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무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삼한에서는 아주 발달된 한국형 동검이 출토되기는 하지만, 청동검은 지배계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의기로서 역할을 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철제무기가 크게 발전하면서 무기로서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삼한의 철제무기는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변한에서는 철을 낙랑과 왜에 수출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1.낫, 충북 제천 양평리(1982년 발굴), 2.낫, 경북 경주 조양동(1979년 발굴),

3.따비, 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4.따비, 경북 경주 조양동(1979년 발굴), 5.따비, 경북 포항 옥성리(1994년 발굴)

6.쇠스랑, 경남 김해 양동리(1990년 발굴), 7.가래, 충북 충주 하천리(1983년 발굴), 8.가래, 경북 포항 옥성리(1994년 발굴)

9. 납작도끼, 경남 김해 양동리(1990년 발굴), 10.납작도끼, 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11,12. 도끼, 경북 경주 조양동(1979년 발굴), 13.도끼, 경북 포항 옥성리(1974년 발굴), 14.도끼, 충북 제천 도화리(1983년 발굴), 15.도끼, 경남 김해 양동리 (1990년 발굴)

삼한의 농기구
삼한에서는 철제 농기구의 제작.보급으로 농경지가 확대되고 본격적인 수리시설이 만들어지는 등 농업 생산 기술이 향상되었다. 철제 농기구는 경지를 가는 작업에서 곡물 수확에 이르는 모든 농사 과정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를 통한 경지의 확장과 생산력 증대는 인구 증가와 더불어 권력의 집중화를 가져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한반도 남부의 크고 작은 성읍국가들 또한 느슨한 마한.진한.변한의 느슨한 연맹체였다가. 마한은 백제를 중심으로, 진한은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되었으며, 변한은 가야연맹체를 유지하였다. 호남지역의 마한, 경남지역의 변한, 경북 지역의 진한으로 구성된 삼한은 고조선의 세력교체시 이동한 세력들이 근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쪽 지역에 존재했던 삼한은 중국, 일본과 주요 해상교통로에 있었으며, 고조선 멸망 이후 남하한 세력들의 우수한 기술과 지식 등으로 인해서 상당한 문화 수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과 변한은 중국,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보이며, 상당한 문화 수준를 보이는 유물들이 이들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16.칼.칼집, 경북 경주 사라리(1996년 발굴)

17.칼, 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18.창, 경북 경주 조양동(1979년 발굴), 19.창, 경북 경주 사라리(1996년 발굴)

20.화살촉, 충남 천안 청당동(1996년 발굴)

21.꺽창집, 대구 평리동(1974년 발견)

삼한의 무기
삼한에서는 철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무기를 만드는 재료가 청동에서 철로 바뀐다. 이 시기의 무기는 예리한 날과 살상력이 높은 꺾창, 투겁창, 화살촉, 칼 등이 있었다. 이러한 철제 무기는 전투에서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어 삼한의 소국들이 통합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제철도구

23.송풍관, 경기 화성 기안동(2012년 발굴)

24.숫돌, 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25.쇠망치, 경남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26.철광석, 경남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철기문화의 발전
우리나라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지만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작.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철기 사용으로 향상된 생산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의 철기는 주조로 만든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한의 철기 제작 기술이 보급되어 무기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말갖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여러 나라의 생활

가무와 음주를 좋아하는 풍속이 있다. 현악기가 있는데, 모양이 축과 같다. 이것을 켜면 소리와 곡조가 나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현악기, 광주 신창동(1992년 발굴, 복제품)

동이나 부여는 음식을 먹을 때 거의 모두 조두를 사용한다. – 후한서 동이전
큰 밤이 나는데 크기가 배반 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1.원형칠기와 감,

2.밤이 담긴 굽다리접시

삼한 사람들의 음식 문화
다호리 유적에서는 원형두, 방형두, 원통형 칠기, 뚜껑 달린 원통형 칠기, 사각합, 컵형 칠기 등이 출토되어 칠기가 당시 최고 상층 집단의 식기 또는 제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사 지낼 때 상 위에 올리는 삼색 과실인 밤과 감도 출토되어, 한대의 거울 명문에 등장하는 대추와 함께 이때 이미 제사의 기본 상차림이 마련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평남 대동 대동강변(1927년 구입), 3.한경

큰 구슬이 크기는 마치 대추 같다. – 후한서 동이전
구슬을 재보로 삼아 이를 옷에 달아 장식을 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기도 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목걸이, 1,2,3. 경남 김해 양동리 (1990년 발굴)

4,경남 창원 삼동동(1982년 발굴), 5.충남 천안 청당동(1996년 발굴)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1.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 경북 경주 사라리(1996년 발굴)

2.칼.칼집, 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3.칠기 신발, 평남 대동 채협총(1931년 발굴)

말갖춤, 1.경북 경주 조양동(1979년 발굴), 2.경남 창원 다호리(1988년 발굴),

3.울산 하대(1996년 발굴), 4.경북 경주 탑동(2010년 발굴)

삼한의 말갖춤
말갖춤은 말을 부리기 위한 도구로, 고조선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말갖춤은 수레 부속구와 함께 출토되어 주로 말이 수레를 끄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부 지역에서 출토되는 말갖춤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 대표적이다. 모두 재갈멈추개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초기의 것은 단순한 프로펠러 모양이지만, 후기가 되면 S자 모양으로 변하고 고사리무늬 장식 등이 더해지기도 한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여.삼한
고조선 멸망 전후, 중국 동북 지역에는 부여와 고구려, 한반도 동북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문화 역량을 강화하여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마한.진한.변한은 점차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본격화하면서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였다. 철기의 사용으로 국가의 지배 질서도 빠르게 확립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