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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태안사 입구에 있는 광자대사탑비(보물)이다. 고려초 태안사를 크게 일으킨 광자대사 윤다의 행적과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적은 탑비이다. 현재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이 온전히 있으며, 글이 적힌 비몸은 일부 조각만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은 사실적 표현과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머릿돌에는 네귀퉁이에 이무기 머리를 조각했으며 앞면에는 극락조를 입체감있게 새겼다. 비봄이 파손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지만 옛기록에 따르면 광자대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945년)는 고려초 구산선문 동리산파 3대 종조(宗祖)이자 태안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어려서 집을 나와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선을 수행했으며 승려 혜철에게서 배웠다. 선승(禪僧)이면서도 율법을 중시여겼다. 시호는 광자대사이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글자가 적힌 비몸은 파손되어 없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표현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난 걸작이다. 머릿돌은 네귀퉁이에 이무기 머리를 새겼으며, 위에는 3개의 꽃봉우리, 앞쪽에는 극락조가 표현되어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광자대사탑(보물)>

<승탑들이 세워져 있는 태안사 입구>

태안사(泰安寺)는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때 3명의 승려가 창건했다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 승려 혜철이 머물면서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고려초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중창하면서 지역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수선결사를 이끈 송광사가 번창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초에는 효령대군이 머물기도 했다. 사찰내에는 적인선사탑(보물), 광자대사탑(보물), 광자대사탑비(보물)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 선종 동리산문 중심사찰이었던 곡성 태안사>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보물,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광자대사탑비는 광자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 행적을 새긴 석비이다. 석비는 거북이 모양이 귀부를 맨 아래에 두고 그 위에 비문이 새겨진 비신을 세운 다음 맨 위에 용으로 꾸며진 이수를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는 비신이 파괴되어 그 일부가 석비 옆에 남아 있으며 새겨진 글자도 마모되어 부분적으로만 판독할 수 있는 상태이다. “조선금석총람”과 “해동금석원”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자대사탑비는 고려 초 태안사를 고쳐 지은 광자대사의 탑비로 고려 광종 원년(950)에 세워졌다. 또한 효공왕의 측근으로 불심에 대한 문답을 주고 받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귀부는 아래에 얇은 받침돌을 두었고 귀갑무늬와 꼬리, 뒷발이 뚜렷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머리는 목이 짧으나 생김새가 사실성을 띠고 있으며 비석 받침대에는 구름과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수에는 네 모서리에 몸을 감고 있는 용이 표현되었고 연꽃 봉우리가 세 곳에 얹어져 있으며 중앙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일부가 소실되어 아쉽기는 하나 광자대사승탑과 함께 스님의 행적을 기리고 가람의 장엄함을 돋보이게 하는 귀한 탑비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