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태안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주문이다. 사찰 출입문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지금은 대부분의 사찰에서 일주문을 두고 있지만 오래된 건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태안사 일주문은 원래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후기 숙종 때 고쳐지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 1칸의 2개의 기둥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태안사(泰安寺)는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때 3명의 승려가 창건했다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 승려 혜철이 머물면서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고려초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중창하면서 지역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수선결사를 이끈 송광사가 번창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초에는 효령대군이 머물기도 했다. 사찰내에는 적인선사탑(보물호), 광자대사탑(보물), 광자대사탑비(보물)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
조선후기 숙종때 세워진 것으로 전통적인 일주문 양식이 남아 있는 출입문이다. 건물은 앞면 1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옆에서 본 일주문>
기둥에 비해 상당히 크고 무거운 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일주문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안사 일주문을 오르는 길>
<곡성 태안사>
통일신라말 선종을 이끌었던 동리산문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한국 사찰의 입구에는 단아한 일주문이 있기 마련이다. 이 일주문은 고려 태조 28년(937) 경 광자대사가 태안사를 개창할 때 지은 것이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나 조선 숙종 9년(1683)에 각현선사가 다시 지었고, 이후 1917년 영월선사가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태안사의 여러 건물들이 한국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일주문과 능파각, 보제루만 소실되지 않고 남았으며, 일주문은 1980년에 한 차례 보수하였다. 건축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단층 맞배집으로 기둥 사이에는 3구,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를 짜 올린 다포식 건물이다. 서까래 밑의 공포는 양서형의 실미첨자로 외4출목, 내3출목의 공포를 가득히 짜 올려 화려한 형태를 보여준다.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내부의 기둥 위에는 용의 머리를 설치하여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뒷면에는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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