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능산리고분군(사적)이다. 백제의 도성인 부여 나성(사적) 바깥쪽 나즈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사비기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6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1971년 1기의 무덤이 다시 발견되어 총 7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산을 등지고 있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제 마지막 도성인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는 부여 나성 바깥쪽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는 신라와의 투쟁이 많았던 시기이고, 사비성 방어에 있어서 가장 취약지인 이 곳에 왕릉을 조성함으로써 도성방어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백제후기에 조성된 대부분의 무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무덤 조성과 관련된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형은 일반적인 원형봉토분 형태를 하고 있다. 내부는 널방과 널길로 구성된 굴식돌방무덤이며, 뚜껑돌 아래를 지하에 조성했다. 백제 왕릉이었음이 알려져 있었기때문에 대부분 도굴되어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유물이 거의 없으며 목관을 꾸몄던 금동관못 등이 일부 출토되었다.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골짜기에서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왕름이었음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주었다. 현재는 최근에 조성한 의자왕 부자의 가묘까지 합쳐서 백제왕릉원이라고도 부른다.
<부여 능산리고분군(사적)>
사비기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로 총 7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7기의 고분 중 앞쪽편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1호 무덤(동하총)>
능산리고분군 중 오랫동안 개방되어 있던 곳이다. 굴식돌방무덤으로 내부에는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가 있어 유명한 곳이다. 현재는 보존을 위해 일반에 개방하지 않고 능산리사지 옆에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동하총 내부로 들어가는 널길>
널길의 길이가 길고 바깥쪽으로 갈 수록 넓어진다.
<동하총 내부(모형)>
벽면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천정에는 연꽃과 구름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동하총(모형)
능산리 동하총은 그 벽화로 말미암아 유명한 고분이다. 백제 사비시대의 이 벽화는 발견 당시 비교적 선명하였으나 일반에게 개방되어 왔던 관계로 많이 퇴색되어 희미한 형태만 남아있고, 현재는 그 보존을 위하여 동하총은 폐쇄하고 이 자리에 실물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이 고분은 화강석과 편마암을 곱게 다듬어 장방형으로 축조한 굴식돌방무덤이다. 남쪽 앞에는 널길을 설치하고 널방은 3.4 m x 1.51 m, 높이 1.94 m로서 연꽃과 구름이 그려진 천정을 비롯하여 동서남북 모두 한 장의 판석을 사용하였으며, 벽화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이 동하총의 벽화와 비교되는 웅진시대의 공주 송산리 제6호 전축분은 그림 부분만 점토를 바른 위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석제표면에 직접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앞쪽 가운데 있는 2호 무덤(중하총)>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다. 능산리 고분군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호 무덤(서하총)>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하게 만든 후 판석을 덮었으며, 널길이 짧다. 사비기 백제 때 유행했던 무덤 양식이다.
<4호 무덤(서상총)>
3호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5호(중상총), 6호(동상총), 7호 무덤>
<능산리 고분군 앞>
<금동산무늬 꾸미개>
<금동널 꾸미개>
<금동널못>
<금동널못>
<금동 꽃모양 널못>
<금실>
<능산리 고분군과 능산리사지 사이의 공간>
<능산리사지(사적)>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골짜기를 메워서 사찰을 조성했다. 원래 계단식 논이 있던 곳이었는데 모형관 공사중 유물의 일부 출토되어 1992년부터 2008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 사적,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사비시대(538~660년)의 백제 왕릉묘역이다. 나성의 동쪽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정비되어 있는 7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도 각기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크게 3개의 무덤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가운데 중앙 구역에 위치한 무덤 널이 그 크기나 위치로 보아 사비시대 역대 왕들의 왕릉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앙 구분군의 입지는 전통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지세와 잘 일치되고 있어 백제 당시에 이미 풍수지리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이래 여러 차례 조사되었으나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옻칠과 금박으로 장식된 관의 파편만 남아 있었다. 최근 나성과 능산리 왕릉묘역 사이의 계곡에서 이곳에 안장된 역대 왕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절터가 조사되었는데, 그곳에서 백제 금속공예의 진수를 말해주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 국립부여박물관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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