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계백장군댁이다. 이 저택은 사비성에 있던 고위군관의 주택을 재현하였다. 삼국시대 백제의 주택에 대한 자료는 부여 관북리유적의 건물터 등을 발굴.조사하기는 했지만 문헌자료나 출토유물 등이 거의 없어 사실상 당시 모습을 상상하여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저택의 공간배치는 조선시대 양반들 대저택과 마찬가지로 집주인이 손님을 맞고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영역과 여자들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건물들은 지붕에 기와를 얹어놓은 한옥 형태를 하고 있지만 온돌이 보편화되어 있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마루나 온돌방, 출입문 등이 후대의 한옥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침실에는 침대를, 거실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해서 당시 주택을 재현해 놓고 있다.
<백제 군관주택>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군관주택이다. 당시 귀족들의 살았던 주택을 재현한 것은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히 놓고 있다.
군관주택(계백장군댁)
백제말기의 대표적 무관인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해오자 계백은 자신은 처자를 베고,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명을 맞이하여 다섯번의 전투에서 네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절과 기상은 후대에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행랑채>
행랑채는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긴 건물로 중간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작은 방들은 집주인을 모시는 식솔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사랑채>
사랑채에 해당하는 공간에는 2동의 큰 건물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에 있는 선인재라고 이름붙여진 이 건물은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방과 마루가 없어서 조선시대 사당과 비슷한 건물형태를 보이고 있다. 건물내부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손님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문>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출입문.
<안채>
안채는 조선시대 한옥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졌다. 여러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2동의 건물과 창고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양쪽에 여러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침대가 놓여져 있는 침실>
<거실>
가운데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거실이 배치되어 있다. 온돌이 보편화된 후대 한옥과는 달리 대청마루가 없다.
<뒷편에 있는 건물>
부엌과 방들로 구성되어 있는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부엌>
<서재와 같은 집무실 성격의 거실>
<건물 뒷편에 놓여 있는 창고>
곡식등을 저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가야의 고상가옥처럼 지면에서 약간 높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옆쪽에 있는 작은 부속건물>
<창고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
<출처>
- 백제문화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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