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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사택지적비(보물),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비석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사택지적비(보물)이다.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사택지적이 남긴 비석으로 부여 부소산성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화강암 한면 한면을 다듬어 네모모양의 칸을 만들고 그 안에 글씨를 새겼다. 비석의 오른쪽에 봉황(혹은 삼족오)이 새겨져 있다. 현재 전하는 백제의 유일한 비석이다.

비문은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며 금당과 탑을 세운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글의 양식은 두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따로 나누어 운을 맞춘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이다.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에 의자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간 대좌평 ‘지적’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부여 사택지적비(보물)>

, 현존하는 유일한 삼국시대 백제의 비석이다. 백제말 유력한 귀족이 남긴 비석으로 당시의 세련된 문화를 보여준다.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은
몸이 나날이 늙어감을 한탄하여
금속을 다듬어 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
높다란 금당의 자비로운 모양은
신성한 구름을 보내는듯하고
우뚝한 탑의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럽고 밝은 정기를 지니고 비상하는 듯하다.
(중앙박물관, 2011년)

백제 대좌평 사택지적은 누구?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에는 642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대좌평 지적’이 등장한다. 그는 사택지적비에 등장하는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대좌평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었고 사택 가문은 백제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지적은 최고 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654년, 절과 탑을 짓고 사택지적비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글씨체와 유려한 비문은 이들이 매우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였음을 보여준다. (부여박물관, 2012년)

<비석에 새겨진 글자>

네모모양으로 칸을 나누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남조의 영향을 받은 글씨체와 글의 양식을 보여준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글자는 화강암의 한 면을 다듬고 네모모양으로 나누어진 칸에 새겨져 있다. 현재 4행만 남아 있는데, 각 행에는 세로로 14자씩 있다. 비문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로 그 내용은 사택지적이 금당을 세우고 탑을 쌓은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비문 양식 및 글씨체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중앙박물관, 2011년)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
  5. 중앙박물관